<제40화>
헌터가 곧바로 제상 위로 올라오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녹아 죽을 뻔했다.
“여기서 가만히.”
헌터에게서 또 흘러나오는 익숙한 어조와 목소리.
“저기……!”
이하늘이 그런 헌터를 붙잡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헌터가 빠르게 제상 가운데로 향했다. 기하학적 문양이 어지럽게 새겨진 가운데에, 이하늘이 좀 전에 보았던 구슬이 박혀 있다.
콰앙―!
한 번 더 땅이 폭발했다. 두 개의 불기둥이 생겼다.
“앗!”
무너지기라도 할 듯 제상이 흔들려 이하늘은 비틀거렸다. 반면 헌터는 흔들림 없이 걸어가 구슬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후웅―
헌터의 손이 구슬에 닿기 전에 어디선가 거대한 것이 날아왔다.
“으앗!”
날카롭게 퍼지는 이하늘의 비명.
그에 헌터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달려오더니 간발의 차로 이하늘의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그 덕에 이하늘은 피할 수 있었지만.
쿵―
헌터는 그대로 거대한 것에 부딪혀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허억, 미친.
이하늘은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무식하게 날아온 정체를 보았다.
바로 근처, 목이 잘린 악마가 팔을 마구 휘두르고 있었다.
‘무찔렀다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악마가 쿵쿵거리며 헌터가 있는 곳으로 돌진했다.
“안 돼!”
이하늘이 경악했다. 생각도 없이 제상 아래로 내려가 헌터에게 가려 했으나 느리게 흐르는 용암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임여명이 신경질적으로 일갈했다.
―제발 가만히 있어!
“하, 하지만…….”
―S급 헌터가 걱정돼? 그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너 하나뿐일 거다!
“하지만……!”
목소리가 이공이랑 똑같았단 말이야!
이공, 또 다른 자신의 남동생.
만약에 저 사람이 정말로 공이라면? 내 남동생이라면?
상상만 해도 심장이 조여들고 손이 떨렸다.
“그럼 확인이라도 해줘. 우리가 담당하는 성신의 언약자인 거잖아? 아까 순식간에 지나가서 못 봤는데……. 저 헌터 이름이 뭐야?”
순식간에 지나가서 못 본 게 아니라 정확히는 안 보였기 때문에 못 본 거다.
임여명은 그걸 지적하려다가 일단 대꾸했다.
―몰라, 나도. 힘숨찐 알아? 레바브가 웃기지도 않는 힘숨찐 놀이에 장단을 잘 맞춰주거든. 저 헌터도 그래서…….
쾅쾅쾅―
연달아 울리는 소리가 임여명의 말을 잘랐다. 목이 잘린 악마가 벽을, 아니 벽에 박혀 있을 게 분명한 헌터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소리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하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내.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
이하늘의 머릿속에서 책 페이지가 빠르게 뒤로 넘어가며 과거를 되짚었다.
〔코어 습득 완료!〕
〔코어를 정화하거나 파괴할 수 있습니다.〕
〔코어 파괴를 선택하여 지금부터 30초 후, 게이트는 폐쇄됩니다.〕
지난 2주 동안, 센터에서 밤낮없이 일하며 지겹게도 보았던 문장들.
이하늘은 ‘아는 게 하낟도 업’었지만 머리가 나쁜 건 아니다.
지겹게 타이핑했던 문장만으로 어떻게 해야 게이트를 닫을 수 있는지 안다는 의미다.
‘코어를 습득해야 해.’
그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가운데에 박힌 구슬로 향했다.
이공과 목소리가 똑같던 헌터가 망설임 없이 저 구슬을 잡으려고 했던 이유가 뭘까.
왜겠어.
저 구슬이 이 게이트의 코어인 거겠지.
이하늘은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단단히 홀린 듯 가운데에 박힌 구슬로 빠르게 다가갔다.
임여명이 다급하게 외쳤다.
―허튼짓하지 마!
“저게 코어잖아! 맞지! 저걸 손에 넣으면, 게이트를…….”
―일반인이 코어 건들면 죽는 것도 몰라? 너, 진짜. 대체 뭐 하고 살았길래 상식도 없는 거야! 이 멍청한 또라이야!
“그럼 어쩌란 말이야!”
이하늘이 새되게 외치며 다시 쿵쿵거리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센 충격에 메마른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아래에선 모든 것을 녹일 듯한 용암이 끊임없이 흐른다.
그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정신을 잃지 않은 일반인, 이하늘은 이를 악물며 코어 앞에 무릎을 꿇고 손바닥으로 제상을 짚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정녕 없나?
자신은 헌터가 아니고 일반인이 맞다. 이 상황에서 뭔가를 하려고 해봤자 설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도 사실.
하지만 찾아야 한다.
‘일반인인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하늘은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 어느샌가 눈을 감고 집중했다.
흥분이 가라앉았다. 자꾸만 생각을 방해하는 임여명의 따가운 목소리가 멀어졌다.
온몸을 괴롭히던 강렬한 더위 역시, 점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깊은 바닷속에 잠긴 것처럼.
마치 적막한 우주 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홀로 남은 것처럼.
그 속에서 이하늘이 조용히 눈을 떴다.
‘일반인이 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할 때가 아니야.’
일반인이 아닌 시스템 운영자가, 정확히는 시스템 운영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내야 한다.
자신은 시스템 운영자니까.
집중한 그녀의 갈색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해져 갔다.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분위기가 풍겼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스템 운영자가 반드시 지녀야 할 자질 세 가지.
〔귀하의 정신력, 집중력, 강인한 기개를 높이 사 선택했습니다.〕
자연과도 같은 정신력.
만물을 무시할 정도의 집중력.
그 어떤 존재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기개.
그리고 지금.
온몸을 휘감은 사슬로 인해 지금까지 펼쳐지지 못했던 이하늘의 얼어붙은 세 가지가.
똑―
겨우 녹아 한 방울 떨어졌다.
아.
이하늘의 정신력은 하늘과 같고.
이하늘의 집중력은 멸망 후처럼 고요하며.
이하늘의 기개는 고고한 별조차 꺼뜨리니.
고작 한 방울일지라도 파동이 해일과 같아서.
그 동(動)에, 그 음(音)에, 그 흔(痕)에.
【드디어 찾았다.】
【나의 잃어버린 주인공.】
궁극적인 존재가 반응했다.
“욱―”
갑자기 몸에 주욱 소름이 돋으며 구토감이 몰려왔다.
이하늘은 곧바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이랄지 올라오는 건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방금 뭐였지?’
아주 찰나에 불과했지만 고요한 우주에 홀로 남은 듯한 착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누군가가 그곳에서 억지로 끌어낸 것처럼 현실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박하늘, 괜찮냐니까? 정신 좀 차려!
멀어졌던 임여명의 목소리가 오른쪽 귀를 다급하게 때렸다. 이하늘이 미간을 찌푸렸다.
“입 좀…….”
【그래. 입 좀 다무는 게 좋겠어. 나의 주인공이 머리가 아프다잖아.】
“이건 또 무슨, 우욱!”
웬 낯선 목소리와 함께 모노클 앞에 채팅 창이 올라왔다. 이하늘은 의문을 표하다가 다시 입을 막았다. 속이 또 뒤집혔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람이 피부를 기는 듯한 혼동이 인다. 뭔가가 옭아매는 듯한 감각이…….
―젠장, 왜 저러는 거야. 코어 근처에 있어서 그런가? 아니, 그건 아닌데. 혹시 모르니까 거리를 벌려봐. 그리고 헌터가 준 포션을 마시는 게 낫…….
【흐음. 뮤트, 도와줄까?】
또 머릿속을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이하늘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
정신없이 들려오던 임여명의 말이 뚝 끊겼다.
“뭐, 여보세요? 여보세요, 임여명?”
【잠시 연결을 끊어놨어. 그러니 이제 나한테 집중해 줬으면 하는데.】
다시 속이 뒤집히고 두통마저 쏟아졌다. 이하늘은 미간을 와락 찌푸리다가 이를 갈았다.
착각이 아니다. 이 낯선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몸에 이상 반응이 일어났다.
“당신 뭐야? 성신이에요?”
【격 떨어지는 소리하지 말고. 속상하잖아.】
“성신이냐니까? 나 지금 채널 접속한 게 아닌데 어떻게……. 아, 혹시 저 헌터 성신이에요? 그래요? 임여명이랑 채널 접속하신 거죠?”
【우리, 꽤 극적으로 만났는데 좀 더 여운을 즐기면 안 될까.】
대화가 통하지 않고 빙글빙글 돌았다. 가뜩이나 예민해진 이하늘이 대답 제대로 하라고 외치려는 순간, 다시 땅이 폭발했다.
이제 불기둥은 자그마치 세 개였다. 자연히 바닥에 흐르는 용암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해진 이하늘은 입술을 깨물며 조금 전 이 세상에 홀로 남은 듯한 감각을 되찾으려 애썼다.
무언가 기발한 생각이, 들 것 같았는데…….
【더 속상하게. 나를 아예 있는 취급도 안 해주는군.】
“좀……! 생각 방해하지 마요, 지금 바쁘니까!”
【까다롭게 굴긴.】
“우윽……. 대답도 하지 마요. 그쪽이 말할 때마다 토할 것 같아.”
구역질을 넘어서서 내장까지 뒤틀리는 기분이다. 이하늘은 겨우 무시하고 필사적으로 도로 집중했다.
그래. 다시 생각하자. 시스템 운영자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건 바로…….
이하늘이 시선을 내려 제 열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타이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