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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52)화 (52/90)

<제52화>

이하늘이 탈색 머리를 고수해 오는 건 다른 색으로 예쁘게 덮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주기적으로 무슨 색으로 염색할지 생각하곤 했다.

물론 십 년간 다른 색으로 덮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 지금은 염색보다 탈색이 우선이겠네.’

탈색을 안 한 지 한 달이 넘었다. 슬슬 뿌리가 지저분하게 보일 시기.

이제 이하늘의 머릿속엔 언제 미용실에 가느냐 하는 생각이 가득 찼다.

“근데 언니.”

쓸데없는 생각은 주문을 마친 시초야가 말을 걸면서 깨졌다.

이하늘이 가만히 눈에 초점을 잡자 시초야가 손깍지를 끼더니 그 위에 턱을 올렸다.

“언니, 헌터야?”

이건 또 무슨 갑작스러운 질문이지.

일단 고개를 저었다.

“엥. 아니라고? 그럼 아까 무릎 두드린 건 뭐임?”

턱으로 책상을 가리킨다. 정확히는 책상 아래에 있는 이하늘의 무릎을.

기막힌 이하늘이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어떻게 봤어?”

“본 게 아니라 들렸어. 무릎 열심히 두드리는 거.”

“귀가 좋네.”

“그래서 뭔데? 헌터 맞지?”

“아니라니까. 무릎은, 그냥 두드렸어. 통화 끝나는 거 기다리기 지루해서.”

시초야의 선글라스 위로 눈썹이 산처럼 치솟았다가 순식간에 꺼졌다.

“하긴. 각성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쪼매 아쉽네. 헌터기만 했어도.”

“헌터기만 했어도?”

이하늘이 수저통을 열었다. 젓가락과 수저를 세팅하자 시초야가 컵에 물을 따랐다.

“스카우트하는 건데…….”

“스카우트?”

“……아니, 그게 아이고. 그 뭐고. 그, 그. 그, 고용?”

고용?

중학생이 뱉을 만한 단어가 아니라 이하늘이 눈을 가늘게 떴다.

“헌터를 고용한다고?”

시초야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보통 ‘스카우트’라고 하면 요즘 사람들은 ‘그것(not 볼드×트)’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바로 ‘길드 스카우트’.

그렇다면 나 헌터요, 하고 광고를 때리는 거나 다름없어 저도 모르게 다른 단어로 바꿨다. 마찬가지로 부적절한 표현이었다.

‘에이 씨, 애초에 와 숨긴 거고.’

그건 이하늘이 저를 못 알아봤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혔는데도.

그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고 시초야의 흥미를 끌기에 매우 충분했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사람을 마주하는 게 얼마 만인지. 그래서 숨기고 싶었던 걸지도.

‘됐다, 마 치아라. 역시 적성에 안 맞는다이가. 힘숨찐 놀이하는 십관종들 존경한다, 시바.’

사실 나 헌터라고, 고용이 아니라 길드 스카우트를 말한 거였다고 밝히려는 그사이.

진정한 십관종들의 누나, 이하늘은 시초야를 유심히 관찰했다.

‘헌터를 고용…….’

이하늘은 경호원―이라고 구라친― 동생을 하나 데리고 산다. 덕분에 언젠가 경호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살펴본 적이 있다.

경호원들이 경호하는 대상은 참으로 광범위했는데, 그래도 대표적인 건 역시 사람이었다.

그것도 좀 대단한, 죽으면 안 되는 사람. 그래서 몸을 날려 지켜야 하는 사람.

그러다가 다치는 경우가 숱하게 많은 게 경호원이다. 그래서 헌터 시대인 지금, 그 업계에는 각성자가 많다고 했다.

왜냐하면 고용주가 헌터를 원했으니까.

이하늘은 실례를 무릅쓰고 헌터를 고용하고 싶다는 시초야를 훑어봤다.

선글라스, 매끄러운 머리카락, 햇빛 하나 안 받은 것처럼 하얀 피부.

뭔가, 이제 보니 부잣집 딸내미 같았다.

‘특히 저 선글라스. 몇십만 원, 아니 몇백만 원 하는 거 아냐?’

시초야가 온라인 쇼핑몰에서 13,900원 주고 산 선글라스라는 걸 꿈에도 모르는 이하늘은 물었다.

“꼭 헌터여야 해?”

꼭 헌터여야 해?

그 문장에 시초야는 쫙쫙 붉은 밑줄을 긋고 별도 치고 용꼬리용용도 달았다.

어, 시바. 이거 중요해도 ×나 중요하다.

시초야가 말을 더듬었다.

“와, 와? 헌터가 아녀도 된다카믄 가, 가입할 기가.”

“가입? 고용이 아니라?”

길드에 들어가는 걸 보통 가입이라 하지만 시초야 입장에선 고용도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다.

“고용도 뭐, 맞는 말이제!”

사실 일반인이 길드에 못 들어갈 것도 없다. 사무직으로 고용하면 하니까.

다만 시초야네 길드는 지금까지 없었다. 대장 시초야가 사무직을 스카우트하는 전례가…….

‘뭐어, 사무직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대장. 얼마나 보기 좋노.’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근데 정확히 무슨 일하는데?”

“어? 그건…….”

관심을 기울이는 대장치고 시초야는 사무직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잘 모른다는 것.

대충…… 뭐, 책상 앞에 앉아가 일하지 않겠나.

시초야가 대답하지 못하고 말을 끌자 이하늘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니, 바보 같은 질문이네. 헌터가 아니면 뭐든 위험한 일인 건 매한가지인데.”

“엥? 아이다! 사무직이 뭐가 위험해.”

“사무직?”

“그래! 일반인이면 사무직 해야지! 혹시 현장 뛸 생각했나? 말마따나 위험하게.”

“어, 하지만 경호…….”

“주문하신 더블치즈돈가스 둘 나왔습니다.”

점원이 등장하면서 이하늘의 말이 끊겼다.

얼마 안 가 메뉴를 놓고 간 점원이 자리를 뜨고, 시초야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사뭇 진지했다.

“근데 중요한 조건이 있어.”

그에 이하늘이 말없이 눈을 마주해 온다.

햇살에 닿으면 금빛으로 빛날 듯한 연갈색 눈.

허 참, 이상하지.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집적거리는 건 초딩 때 졸업한 줄 알았는데.

10년 전 재앙이 터지고 쑥대밭이 된 골목을 또래들과 전전했던 게 떠오른다. 동시에 그때 모두와 머리 모아 유치한 말을 했던 것도.

시초야의 입술이 비뚜름히 올라간다. 볼우물이 파였다.

“나랑 친구 해.”

친구?

잘못 들은 건가 싶은지 이하늘이 눈썹 사이를 좁혔다. 시초야는 그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다른 조건은 다 필요 없어. 일반인이어도 좋고 약해 빠져도 좋아. 하지만 내가 스카우트한 이상 나랑 친구 해야 해.”

크으, 시초야. 멋졌다. 아무 조건 없이 친구 하면 된다니. 역시 으리 하면…….

그때,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이하늘이 대뜸 속삭이다시피 말했다.

“열 살 가까이 차이 나는데 친구는 좀…….”

이 언니야가 갑자기 뭔 소리고.

“뭔데? 언니 무슨, 한 29살 정도는 되나.”

“아니, 내가 아니라……. 응? 혹시 19살이……세요?”

다시 끄트머리에 붙는 존칭과 서서히 깔리는 이 어색한 분위기.

원래부터 존칭하지 않았던 시초야도 분위기가 숨 막히게 변하자 슬그머니 끄트머리에 ‘요’를 달기 시작했다.

“……대체 날 몇 살로 봤는데, 요.”

“……중학생, 이요.”

근데 고3이세요? 아니, 고3이 무슨 학기 초에 현장학습 체험으로 서울을…….

다시 숨 막히게 깔리는 정적.

그 뒤로 울리는 건 두 사람이 돈가스를 먹느라 부딪치는 식기 소리뿐이었다.

이하늘에게는 고민이 있다.

이활 놈의 자식이 어떻게 일을 관두게 할 것인가?

막내 이활은 매번 일을 그때마다 받아서 불규칙한 생활을 했다. 언제는 일찍 들어오고 언제는 늦게 들어오고.

집구석에 안 들어올 때가 들어올 때보다 부지기수였다.

위험한 일이지만 최소한 규칙적인 생활이기만 했어도 일을 당장 관두라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활 말대로 모두가 돈 버는 게 좋은 일이라면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러던 와중 눈앞에 헌터를 고용하고 싶다는 부잣집 딸―아마도―이 나타난 것이다.

부잣집 딸이 헌터를 고용해? 당연히 경호원이겠지.

멋대로 생각한 이하늘은 자연히 이활을 떠올렸다.

부잣집의 경호원으로 고용되면 최소한 지금보다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이활이 헌터가 아니라는 건데.

그러나 헌터가 아니어도 된다는 것처럼 군다. 심지어 현장직이 아니고 사무직이란다.

와, 이건 꼭 해야 돼!

‘근데 고3이라니.’

당연히 중학생인 줄 알았는데. 그것도 한 14살.

그걸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면 다행이었겠으나 이하늘은 멍청이처럼 다 토로했다. 중학생인 줄 알았다며.

시초야가 무례하다고 날뛰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왜인지 시초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동안이기는 하다며, 자기를 애새, 아니 애로 보는 사람 많다고 이하늘을 달래주었다.

그래도 물 건너간 거겠지. 이활의 불규칙한 생활을 드디어 청산시키나 했는데.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어서 야간 조와 교대를 마친 이하늘은 아직도 낯선 휴대폰을 꺼내 들어 꾹꾹 문자를 보냈다.

[나 : 미안해 활아 너 좋은 데 다리 놔줄 수 있었는데 누나가 실수해서 그만 날려부려따ㅠ]

[이활 : 뭔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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