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눈을 감으니 ‘성어(星語)’가 기록된 창이 흐릿해진다. 그러나 별의 말을 듣지 못하는 건 아니다.
이번에는 나만 ―고 ―― 마.
어차피 ――― ―는 계속해서 삭제할 테니 이제 그럴 리 없겠지마는.
정정하겠다.
귀가 있어도 별의 말이 다 들리는 건 아니었다.
그녀의 언짢음이 우스운 걸까, 별이 맑게 웃었다.
그럼 또 만나, 나의 하늘.
언제 떴는지도 모를 눈을 바로 하자 책상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하이레가 보였다.
새카만 눈이 내려다본다. 모노클 너머로 무미건조함이 느껴진다.
책상 앞 의자에 앉은 이하늘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불렀다.
“대표님……?”
“깨어났습니까. 오래 걸렸네요. 가입은 마쳤나요?”
아, 아.
사태 파악을 완료한 이하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단은요.”
“몸은?”
“몸? 아, 괜찮아요. 이제 두통도 안 느껴지고…….”
“신기하군요.”
하이레가 솔직하게 감상평을 남기고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웬 손. 설마 잡으라는 건 아니……겠지?
이하늘이 그 손을 잡아야 하는 건지 고민에 빠졌을 때.
허공에서 프린트된 것처럼 종이가 툭 튀어나와 그대로 하이레 손에 안착했다.
‘오…….’
손잡았으면 그대로 퇴사할 뻔.
십년감수한 이하늘 앞에서 종이를 묵묵히 읽던 하이레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수식언이 거창하네요.”
듣자마자 이하늘은 깨달았다. 저 종이에 좀 전 성신의 가입 정보가 적혀 있다는 것을.
아, 그게……. 제가 아무렇게나 말했는데 허용이 되더라고요.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삭이는데 하이레의 말이 이어졌다.
“언약하고 싶은 상대는 있으나 각성자는 없다? 상대가 각성자가 아니라서 언약하지 못한다는 뜻입니까?”
“그, 그런 것 같아요.”
“보통 이런 경우엔 레바브를 통하지 않고 바로 각성시키는 특수한 방법이 있는데……. ‘전지전능’하면서 그런 방법은 안 쓰는 모양이군요.”
음, 그, 언약하고 싶은 상대가 시스템 운영자라서 각성을 못 시키나 봐요. 잘 모르겠지만…….
“블라인드 처리된 것도 많고. 범상치 않은 성신인 것 같은데 대면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하늘 씨.”
정중한 말에 이하늘은 그저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고생은 무슨. 이상한 상황만 겪고 왔다.
그런데…….
“근데 대표님. 그 성신은 누가 담당하나요?”
평소의 이하늘이라면 딱히 궁금해하지 않았을 텐데 성신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잔뜩 듣고 와서일까, 눈을 도르륵 굴리며 묻는다.
“대표인 저와 이세현이, 이세현 씨가 맡을 겁니다. 언약하지 않은 성신이니 딱히 담당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아하. 그렇구나.
하긴, 시스템 운영자 한 명당 성신 다섯을 담당한다고 했던가.
‘……또 만나자고 그랬는데.’
의미심장하다 못해 수상한 성신에게 또 만날 수 없으니 꿈 깨라고 태클이나 걸고 깨어날걸.
마음에도 없는 생각을 했을 때였다.
〖무슨 소리야, 날 막을 자 없다 했잖아.〗
“으악!”
〖그렇게까지 질색할 필요 없지 않나…….〗
묵묵했던 귓가에 이젠 익숙해져 버린 목소리가 닿고 또 채팅 창이 형성되어 성어가 올라온다.
또 만나자는 말이 이렇게 금방 실행될 줄 몰랐기 때문에 이하늘은 과하게 놀랐다.
하이레가 두 눈썹 사이를 좁혔다.
“왜 그러시죠?”
“아니, 그게…….”
〖대표란 놈이 말이야. 좀팽이처럼 내가 원하는 곳에 배정 안 해주면 쓰겠어?〗
이번의 목소리는 하이레도 들은 모양이었다. 그가 멈칫하더니 눈썹을 올린다.
살에서 길로 성질이 변한 건 둘째 치고.
“무슨 뜻이지?”
〖너 따위에 속하기 싫으니.〗
〖열 번째 운영자에게 배정해 달라는 뜻이란다.〗
얼핏 친절한 것 같은 말투에 하이레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고작 별 따위가 원하는 게 너무 많다 생각하지 않나?
〖고작? 단어 선택이 영……. 국어 못하지?〗
마음대로 생각도 읽으시고.
〖이건 조언이라고 해두자. 너도 알 텐데. 날 감당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가늘게 들리던 목소리가 일순 또렷해졌다.
하이레는 단번에 눈치챘다. 지금부터 들리는 울림은 이하늘에게 닿지 않는다.
오로지 저에게만 닿는 성어.
아니나 다를까, 속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시스템에 가입했으니 더 이상 ‘날것’이 아닌데도.
하…….
실소를 흘린 하이레가 살벌하게 묻는다.
“추방당하고 싶나?”
〖그 권한도 너에게 없단다.〗
〖내 모든 것은 저 애에게 구속되어 있느니.〗
〖그러니 소모적인 짓은 작작 할까. 나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널 실수로 죽였다가 이미지 깎는 건 지양하고 싶어서.】
“저기.”
〖으음.〗
끼어드는 올곧은 목소리에 어떻게 한 건지 몰라도 순식간에 성질을 바꾸는 약은 별.
덩달아 울컥하는 핏물을 겨우 쏟지 않은 하이레가 채팅창에서 시선을 뗐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하늘이 보인다.
“괜찮으세요, 대표님? 표정이 안 좋으셔서…….”
“…….”
“그 성신님이요. 센터 규칙에 어긋나는 게 아니라면 제가 맡을게요. 그러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요.”
눈치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하이레가 이로써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저 약아빠진 성신은 이 여자의 눈치를 보고 있다. 혹여 미움을 살까 봐.
그래서 하이레는 일부러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피가 묻어 나왔다.
당연하게도 이하늘은 놀랐고, 그 원인을 성신에게서 찾았다.
임여명에 이어서 대표님께 무슨 짓이냐며 정색하고 화내는 이하늘의 음성 사이로.
성신이 작게 감탄했다.
〖와, 약아빠진 건 너 같은데.〗
º º º
“전지, 뭐요?”
“‘전지전능한 절대자’. 우와, 네이밍 센스 죽이지?”
웃긴지 이세현이 낭랑하게 웃었다.
임여명은 웃지 않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다. 그 수식언이 과한 게 아니란 걸 제일 잘 알았으니까.
피를 왈칵 토해 내고 겨우 열두 시간 숙면만으로 회복한 임여명은 일어나자마자 업무에 복귀했다.
교대하면서 흘긋 본 이하늘의 모습은 멀쩡했다. 멀쩡해도 너무 멀쩡해서 마지막 기억과 달리 하이레가 가입을 도맡은 줄 알았는데 아니란다.
입사한 지 한 달은 넘었지만 실 근무 기간은 기껏 일주일 조금 넘은 애가 혼자 다 했단다.
그걸로도 모자라 담당까지 맡았다고.
이하늘이 담당하는 성신은 자동으로 저도 맡게 되기 때문에 임여명이 혀를 찼다.
‘그 괴물 새끼를 어떻게 감당하지?’
그가 미가입 성신과 콘택트했을 때 고집스레 대표를 부르지 않은 건.
해당 성신이 심상치 않아서였다.
생각까지 읽을 줄 알고 반발력도 심하다.
이런 걸 누가 감당하겠어.
어느 인간을 언약자로 삼고 싶어서 온 건지 몰라도, 대충 상대해서 훠이 내쫓을 생각이었다.
그 미친 별 새끼가 이하늘을 찾지만 않았어도.
【드디어 왔군.】
【이제 상담원 좀 바꿔주겠나?】
【이런 표현은 싫지만……. 그래, 네 파트너 말이다.】
짜증 나네.
어쨌든 이미 지나간 일.
그는 시험 삼아 이어폰을 껴봤지만 들리는 소리라곤 익숙한 네 성신의 지긋지긋한 목소리와 한 성신의 코골이뿐이다.
전지전능한 뭐시기는 말이 없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게 지금 이하늘이 자리에 없어서 그런 거라고 느껴지면 웃긴 망상일까.
“하…….”
본의 아니게 며칠치의 잠을 하루 만에 다 자버린 임여명.
―본인이 느끼기에― 쌩쌩한 몸으로 작업을 시작하려는데, 아직 하이레와 교대하지 않은 이세현이 아, 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다음 주에 5대 길드 모임 갖나 본데?”
“어제도 하려다가 못 했잖아요. 다음 주도 불확실한 거 아닌가.”
“으응. 근데 다음 주는 찐인가 봐. 모임 장소가 일반 VIP룸 같은 데가 아니더라고.”
“그래서요.”
“그 모임, 여명이 네 담당 언약자들 전부 참석할 거 아니야.”
시스템 운영자는 다섯 성신을 담당하나 제비뽑기하듯 아무나 다섯 명을 뽑아 맡기는 게 아니다.
매끄러운 일 처리를 위해 현실에서 가장 많이 ‘엮이는’ 언약자를 다섯씩 묶어 담당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최가영과 유성우, 이활은 같은 공무원 헌터이니 묶이고 이공과 이활은 말할 것도 없이 묶인다.
그렇게 그 넷은 ‘5대 길드+α’에 속해서.
“예. 참석하겠죠.”
모임에 죄 참석한다고 봐도 좋았다.
그래서 5대 길드 모임이 이뤄졌을 때 임여명 역시 살짝 바빠지곤 했다.
근데 이게 왜?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이세현의 의중을 알 수 없어 임여명이 미간을 찌푸리는 찰나.
“채널 접속할 거지? 그때.”
“성신들이 지랄할 테니 아마.”
“하늘 씨랑 같이 하는 건 어때?”
“뭐 하러.”
“채널 접속하면 네 성신의 말을 한꺼번에 전달해야 할 텐데, 혼자 하면 피곤할 거 아냐.”
아니. 뭐라는 거야.
1년에 두 번 이뤄지는 5대 길드 모임은 거창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임여명 입장에선― 맨날 싸우고 지랄하고 별 같잖은 얘기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