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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73)화 (7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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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이하늘은 저도 모르게 웃으면서 모노클을 톡톡 쳤다.

“이어폰은 몰라도 모노클은 창피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복붙? 저번에 텍본은 불법이라서 안 한다고 한 별이 누구였지?”

〖너와 레바브 따위가 같나.〗

참 나…….

실없는 별의 말에 이하늘이 다시금 작게 웃었다.

º º º

느닷없이 바닥이 뚫려 아래로 떨어진 최가영. 떨어지는 시간도 길고 길이도 깊었지만 그는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삐딱하게 주머니에 두 손 쿡 찌르고.

쭈그려 앉은 채로 이어 나직이 속삭였다.

“구려. 뭔가가 구려…….”

〔성신,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네 녀석의 정신머리 상태가 더 구리다고 일갈합니다.〕

“닥쳐라, 머리야……. 왜 그게 이딴 장난질에 지나지 않는 게이트에 까발려졌는지나 알아내.”

평소와 같다면 왁왁거렸을 별이 조용하다.

하, 이거 진짜 구리네.

그의 눈이 가늘어졌을 때다.

새카만 사위에서 아까부터 신경을 거스르게 만드는 찌를 듯한 살기가 느껴졌다.

일단 같이 떨어진 두 사람은 아니다. 애초에 같은 공간에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 새끼들도 뭔가 구리긴 한데.’

일단 넘어가고.

“머리야. 근방에 인간들 없지?”

당연히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묻는 특진과 과장, 최가영은 마스크와 팔자에도 없는 안경을 벗었다.

〔당신의 언약성 ‘머리로 장난치는 자’가 네 녀석이 싫어하는 일은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며 마음 놓으라고 이릅니다.〕

“좋아.”

황혼시. 최가영이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은 빨랐다. 그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가볍게 주위를 훑었다.

약 수백. 등급은 제각기. 그래도 자신의 등급, S보다 죄 아래.

최가영이 미소 짓자, 귓가에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

〔‘거짓말 구덩이’의 수하, ‘거짓 구더기’가 입맛을 다십니다!〕

〔‘거짓 구더기’, 『기억 더미』에 영역을 전개합니다.〕

“용쓴다, 새끼들아.”

비웃음이 실린 말을 내뱉은 최가영이 그제야 허리를 펴며 일어선다.

그대로 발을 쿵 구르며 스산하게 중얼거린다.

“【어딜 감히.〗”

〔성신 계승 스킬, 발동―‘압도적인 공포’〕

머나먼 곳, 별의 음성과 함께 섞여 흘러나오는 말.

성신과 언약한 자만이 빌려 쓸 수 있는 언어로, 스킬 발동 ‘성언’이라 일컫는다.

짧으면 짧을수록 좋고, 그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않을수록 좋다.

즉, 짧거나 제멋대로 내뱉었을 때 스킬이 발동되면…….

‘최강’이라는 뜻.

촤아아아악―

‘거짓 구더기’가 필드를 전개하기 전에 최가영이 먼저 광범위로 필드를 펼쳐 장악했다.

그의 필드가 붉게 물들어 있다. 그 영역에 속한 모든 것은 피아 구분 없이 이제부터 공포를 느낀다.

저항, 불가능.

이해, 불가능.

그야말로 ‘압도적인 공포’가 제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속절없이 느껴야 함이로다.

“그러게 새끼들아. 그냥 좋게 좋게 넘어가면 오죽 좋아.”

비죽이던 최가영이 혀로 느릿하게 입술을 훑는다.

“【죗값은 머리로.〗”

〔성신 계승 스킬, 연계 발동―‘불꽃 축제’〕

나른하기 짝이 없는 짧은 울림.

그 끝에 징그러운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비릿한 쇠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안에 액체가 든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수백 번 정도 울리고 겨우 그쳤다.

역겨운 냄새가 가득한 어둠 속.

아무렇지 않게 다시 쭈그려 앉아서 땅을 보던 최가영은 고개를 올려 위를 바라봤다.

방금 괴수들을 학살한 자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

얼마나 깊게 떨어진 건지 시선 끝에 구멍이 보이지도 않는다.

푹, 한숨을 내쉰 대한민국 최강 타이틀의 소유자가 중얼거렸다.

“위로 어떻게 올라간담?”

º º º

한편.

“아아아아악! 짜증나짜증나짜증나! ×이바알! 진입한 게 아니다? 뭔 개× 같은! 최가영 그 새끼한테 대놓고 의심받게! 썅! n은 뭐야? 난 그딴 거 안 썼다고!”

바닥에 등으로 떨어진 그 상태로 일어나지 않은 정이섭은 고함을 마구 질렀다.

‘게이트 접속’해서 다행이지, 실제로 진입했으면 영락없이 등뼈와 머리통이 작살날 뻔했다.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 점에 가슴을 쓸었겠으나 분노에 찬 정이섭은 이를 갈다가 좀 전의 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게이트 정보 창을 띄웠다.

어떤 개새끼가 조작한 거지?

자연 게이트를 무슨 수로…….

그대로 해당 게이트에 간섭하기 위해 손을 굴리던 정이섭은 섬광처럼 눈앞에 뜨는 창에 멍해졌다.

〔⚠경고⚠―접근 불가!〕

〔해당 게이트는 궁극적 존재, ‘■■’에게 권한이 있습니다.〕

〔엑세스 권한을 부여받으려면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뭐?

허락?

허어라악?

뭔데, 썅. 이거 뭐야?

“궁극적 존재? 이거 가을이 형 말고 또 있어?”

“저기, 요한아.”

광분하던 정이섭의 머리가 차게 식은 순간이었다. 그의 귀를 간지럽게 때리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아 씨, 형.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정이섭이 귀를 팍팍 문대며 고개를 돌렸다.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 시몬이 쓰러져 있다. 그것도 어디가 많이 골절된 상태로.

“아나, 형. 그러게 ×발. 왜 구라를 쳐? 그냥 처음대로 각성 안 했다고 계속 배를 쨌어야지.”

“백악관이 위세를 위해 나라 차원으로 좀 속이자는데 어떻게 거절해? 나는 말을 잘 들어서.”

지랄……. 말 잘 듣는 사람이 한국에 멋대로 와서 이하늘이랑 접촉하냐?

하긴, 드라마틱하긴 하다. 10년짜리 스테잉 게이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얼마나 자극적인가.

그 인간이 S급으로 각성했다고 하면 위세……는 모르겠고 모든 나라에서 관심을 가질 법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미각성자라니. 백악관도 속이 쓰렸을 터다.

실제로는…….

‘각성자가 맞지만.’

정확히는 ‘레바브’에 등록한 게 아닌, ‘바벨’에 등록한 각성자 말이다.

어휴.

정이섭이 한심하다는 식으로 한숨을 쉬었다.

“형들이 레바브 영역에서 힘쓰려면 탑 지배부터 해야 하는데 그게 뭐야, 안 부러진 데가 없네.”

“하하.”

“그러게 왜 왔어? 괜히 게이트에 휘말리고.”

시몬이 계속 웃었다.

“뼈가 아프네.”

실제로 뼈가 부러져서 아프다는 건지, 은유적인 표현인 건지 분간이 안 갔다.

뭐, 됐고.

“어쩔 거야? 최가영 백퍼 눈치 깠을걸.”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니 놀이는 관둬야지.”

1월 즈음해서 세상에 나왔으니 한두 달밖에 안 놀았지만.

“대통령님이 슬퍼하실 것 같아서 슬프네.”

“그럼 지금 그냥 나간다?”

“가을 동생한테 인사 못 하고 가는 게 좀 마음에 걸려.”

“제에발! 그 말 가을이 형 앞에서 절대 꺼내지 마.”

“아쉽더라.”

정이섭이 일어나서 시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뭐가.”

“그 애 손가락, 예쁘던데. 잘리면 안됐잖아.”

“또 시작이네.”

정이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직 둥둥 떠 있는 창 속의 궁극적 존재를 재차 눈에 담았다가 미련 없이 접속을 끊었다.

두 사람이 사라졌다.

º º º

최가영이 저 깊은 지하에서 어떻게 위로 올라가야 하나 고민에 빠졌을 때.

이하늘 앞의 전광판은 바쁘게 움직였다.

[정답은…… O입니다!]

[23페이지―성공]

[정답을 맞힌 1번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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