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생각하다 말고 이하늘이 뚜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건드릴 수 있다면 제 문제도 좀 같이 건드려주시지. 좀 전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저 때문에 계속 몬스터 나와서.”
〖그거 조금 섭하군. 이미 많이 손대서 그 정도로 그친 거란다, 나의 주인공.〗
그게 무슨 뜻이지. 난도를 높였다는 건가.
〖그 반대지. 난도를 낮추고 또 낮추고, 한없이 낮춘 게 그 정도다.〗
엥?
이하늘의 얼굴에 황당한 기색이 어른거린다.
“그럼 원래는 이보다 더 어려웠다는 거네요?”
혹시 나만?
바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하늘은 이보다 어려웠다면 얼마나 더했을지 예상해 보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주변을 둘러보곤 멍한 얼굴로 물었다.
“이 게이트는 어떤 원리로 휘말린 사람들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걸까요?”
남의 기억을 어찌 아는 걸까. ‘게이트 도감’을 읽을 때부터 궁금했던 사실이었다. 저자도 모르는지 뭐라 설명이 없었다.
레바브가 인적 사항 뽑듯이 이 게이트에 휘말리는 사람마다 족족 기억을 뽑나?
우스운 생각에 별이 반응했다.
〖기억하느냐. 네가 주인공인 책이 있다고.〗
기억 못 할 리가. 왜 멋대로 내가 주인공인 소설을, 아니 책을 만드냐고 진지하게 따졌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래. 그럼 나의 주인공. 그 책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대뜸 문제를 날리는 별. 주야장천 문제를 풀어 잠시 쉬어가려 했거늘 다음 페이지에 가기도 전에 코너 속 퀴즈 타임을 멋대로 갖는다.
그러나 이하늘은 투덜대는 대신 진중하게 머리를 굴렸다.
한 인간이 ‘주인공’인 책……. 그런데 ‘소설’은 아니라 하고.
음.
“전기(傳記)……?”
〖정답이다. 아주 영민해.〗
1년에 한 번 듣기도 어려운 ‘영민하다’란 소리를 오늘로 벌써 두 번째 들었다.
영민한 것도 참 많다고 생각하면서 종아리를 계속 두드리는 사이 바람이 불었다.
기분 탓일까, 오래 걸어 뻐근했던 다리를 자꾸만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제 일생이 적힌 책이라……. 되게 흥미롭네요. 근데 그거.”
제 책만 있는 게 아니죠?
조그마한 확신에 가까운 물음에 별이 나른하게 웃는다. 굽어본다.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아내며 혀를 내두른다.
하나를 몰라도 열을 눈치채는 하늘아. 넓디넓은 곳이 텅 비어서 오히려 한없이 작구나.
채워야 한다.
‘절대’를 무시하고 모든 걸 욱여넣으라면 욱여넣어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게끔 커다랗게, 만들 수 있었으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역설적으로 무궁하다.
그러니 그리 급히 굴 필요 없지.
따라서 별은 하나의 지식만을 하늘에게 꽂아 넣었다.
〖이미 죽었거나 현재 숨 쉬어 사는, 또는 앞으로 생을 얻을 모든 것에는 책이 존재하니.〗
〖그래. 네 말이 맞다. 만물에는 저마다 책이 있단다.〗
과거, 현재, 미래가 적힌 그야말로 일대기, 전기.
“그럼 이 게이트는 그 책을 읽고서……. 게이트가 읽었다고 하니까 뭐가 말이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읽고서 문제를 만드는 거예요?”
〖그래봤자 누가 쓰다 버린 폐기물. 스크랩이잖느냐. 많은 것을 읽진 못하고 겉핥기로 아는 것뿐이란다.〗
감히 ‘스크랩 게이트’ 따위에게 책을 읽을 권한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권한 없는 것치고는 저에 대해서 너무 자세히 아는 게 아닌지.”
이하늘이 세세했던 문제를 떠올리며 다시 툴툴거렸다.
별은 웃었다.
〖바다의 0.01%와 강의 0.01%가 같다고 보는 건 아니겠지, 나의 주인공?〗
말인즉, 내 책을 겉핥았을 때랑 다른 사람 책 겉핥았을 때의 읽을 수 있는 양이 다르다는 건가?
그건 마치 자신의 책에 기록된 것이 다른 존재들보다 많다는 것처럼 들려왔다.
〖되었으니 이제 움직이도록. 어서 돌아가고 싶잖아.〗
배회하던 바람이 그친다. 이어서 별이 그만하면 되었지 않느냐고 재촉한다.
하지만 아직 다리 아프다고요.
어느새 종아리를 콩콩 두드리던 것을 멈추었던 이하늘은 슬쩍 발을 꼼지락거렸다.
어라?
어째선지 다리가 안 아프다. 오히려 푹 쉰 것처럼 가볍기 짝이 없다. 이하늘은 눈을 깜박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진짜 안 아프네. 아까까지 근육통 온 것처럼 쑤셨는데.
두드림의 효과가 이렇게 컸던가, 우스운 생각을 하던 이하늘이 어깨를 으쓱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다음 페이지로 향할 문고리를 쥔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다른 세 분 무사한 거 맞죠?”
별은 잠시 침묵하다가 으음, 곤란한 목소리를 냈다.
〖그 셋보다 네 동생 걱정부터 해야겠는데.〗
º º º
어느새 피해수습과가 도착해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주변.
그 근처 바닥에 앉아 다리를 마구 떨던 이활은 방독면을 쓴 것도 까먹고 손톱을 물어뜯으려다가 이를 아득 갈았다.
머리가 아까부터 진정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아 어떻게 될 것 같았다. 이공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활은 그저…….
그때 게이트가 맥박 뛰듯 박동했다. 이활은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그것을 이활만 본 게 아니었다.
피해수습과 3팀장이 중얼거렸다.
“설마, 방금 게이트…….”
게이트 입구가 박동한다는 건 한 가지를 뜻했다.
곧 있으면 게이트가 닫힐 거라는 것. 게이트에 휘말린 모든 것이 곧 쏟아져 나올 거라는 뜻이다.
하지만 인원 제한 게이트는 다른 의미도 가졌다.
임시 폐쇄가 철회됐다.
즉, 안의 인원이 줄었다는 뜻이고 그건…….
“허, 헉…….”
이활이 숨을 저도 모르게 헐떡였다.
그는 재빠르게 리스트를 펼쳐 즐겨찾기를 열었다. 세 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이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그러나 무용이다.
타깃이 게이트나 던전에 있으면 위치도 파악할 수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바로 갱신이 되지 않아 알 수 없다.
이활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거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확인했다. 역시 리스트는 바뀌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게이트에 휘말린 사람은 총 셋. 헌터 둘과 일반인 하나.
인원이 줄었다면, 그러니까 누군가가 죽었다면.
셋 중에 누가 죽었겠나.
요란하게 알람이 울렸다. 별이 그에게 상정하지 말라고 어른다. 달랜다.
닥쳐, 시발. 닥치라고, 닥쳐.
……아니지.
너 다 알고 있잖아. 위에서 보고 있잖아. 당장 이하늘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만 확인해. 내가, 너한테 한 번도 이딴 부탁한 적 없…….
【꼭 이렇게 어려운 부탁만 하지……. 길게 들을 수도 없으면서.】
【네 누나는 살아 있으니 약자야, 그만 땅 파. 개도 아니고.】
〔당신의 언약성, ‘사냥을 즐기는 자’의 무허가 개입으로 인해 페널티를 받습니다.〕
〔24시간 동안 성신의 눈과 입이 가려집니다.〕
〔24시간 동안 ‘성신 계승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인원이 줄었다는 사실에 무거워진 공기 속.
이활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임단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숨을 헐떡이던 보우가 대뜸 방독면을 벗더니 그대로 피를 게워냈기 때문이다.
“꺄악!”
임단명의 비명에 3팀장과 추가 진입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던 욜로인생이 고개를 돌리고 혀를 찼다.
“신입분, 괜찮으니까 진정하세요. 성신과 언약한 헌터는 가끔 저럽니다.”
뭣 때문인지 몰라도 신적 존재이신 성신께서 간혹 간접 메시지가 아니라 직접 목소리로 의사를 전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헌터들은 피를 토하거나 기절하기 일쑤. 거기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페널티도 받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헌터 대부분은 성신이 직접 접촉해 오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하…….”
보우처럼 만족하기 때문이다. 제 별의 개입을.
오랜만에 헌터인 상태로 피를 흘린 이활은 나직이 웃다가 거칠게 퉷, 하고 피를 뱉었다. 무심하게 스윽, 손등으로 입도 닦아냈다.
그래. 살아 있으면 됐어.
“내가 진입할게.”
방독면을 도로 뒤집어쓴 보우 헌터가 말했다.
욜로인생이 다시 그에게 시선을 던지기 전, 보우는 그대로 게이트에 진입했다.
탁, 허공에서 떨어진 이활은 가볍게 착지하며 눈앞을 가리는 게이트 정보 창을 정독하는 대신, 리스트를 펼쳤다.
그제야 잡히는 이하늘의 위치.
성신이 친히 개입해서 알려줬음에도 직접 확인하니 안도감이 파도치듯 밀려온다.
성신 계승 스킬이 막혔기 때문에 바로 그녀의 곁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지만.
이활은 뒤늦게 옆으로 밀어놨던 게이트 정보 창을 정독했다. 그의 눈썹이 하늘로 솟았다.
‘기억 더미?’
F급 중에서도 가장 별 볼 일 없는 게이트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죽었다고?
이활이 다시 리스트를 살폈다. 멀쩡히 살아 있음을 알려주는 최가영의 반듯한 이름이 보였다.
‘그럼 뭐야…….’
외국인 새끼가 죽은 거야? S급이라며?
이활은 머리를 굴리다가 욕을 읊조렸다.
외국인 헌터, 그것도 S급 헌터가 대한민국에서 죽었다면 일이 꼬인다. 그것도 ×나게.
“아니, S급이라는 새끼가…….”
죽긴 왜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