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몬스터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일일이 확인 사살하기 귀찮다고.
서구적 외모의 여자가 피가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투덜거렸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언어는 유창한 한국어였다.
근처에서 무심하게 마지막 몬스터를 죽인 이가을은 듣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촤악, 그때 누가 봉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바벨 새끼도 웃긴 새끼야.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힘쓰는데. 쉣. 야, 가을! 우리도 시스템 운영자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
마찬가지로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서구적인 외모의 남자가 굵직한 목소리로 분노하듯 외쳤다.
이가을은 듣는 체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 ―― ―――.】
10년 전부터 말을 걸어왔던 존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벌레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에 시끄럽다고 일갈한 그는 귀를 문질렀다가 무심하게 사실을 알렸다.
“다음이 최상층이야.”
오, 하고 기껍다는 듯 시원스레 웃은 봉 든 남자가 언제 웃었냐는 듯 신경질을 낸다.
“근데 레바브 이 새끼는 너무 지랄해서 짜증 나네. 뭐 이렇게 아까부터 질척거려.”
〔경고, 허가받지 못한 등반입니다.〕
〔경고, 허가받지 못한 등반입니다.〕
〔경고, 허가받지 못한 등반입니다.〕
〔경고, 허가받지 못한 등반입니다.〕
마지막에 다다라서는 당장 꺼지지 못하냐고 윽박지르듯이 굵게 강조한다. 여자가 깔깔거렸다.
“우리가 탑 권한 뺏을까 봐 겁먹었는데?”
“그, 근데 이건. 여, 연습……이잖아요?”
“아, 깜짝이야. 너 아직 살아 있었니?”
여자의 무례한 발언에 커다란 몬스터 시체 뒤에 숨어서 덜덜 떨고 있던 동양인 여자가 음울한 표정을 지었다.
“연습 맞아.”
그러나 이가을이 단조롭게 대꾸하자 그녀의 얼굴이 도로 밝아졌다. 그래봤자 아주 미미해서, 아무도 못 알아볼 만큼의 변화였지만.
“일본만 불쌍하다니까. 그 많고 많은 나라 중에 최초로 권한을 뺏기는 거잖아?”
“지배하는 거 ×나 쉽네. 레바브 등록자 새끼들은 여태껏 최상층까지 안 오르고 뭐 했대?”
일본 수도 도쿄에 세워진 레바브탑을 허가받지 않고 등반하는 네 사람. 당연하게도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다.
레바브 시스템에 등록하지 않은 미등록 각성자.
동시에, 자기들끼리 ‘바벨’이라 부르는 역탑(逆塔)의 거주자기도 했다.
그들이 역탑 ‘밖’으로 나온 건 올해 1월.
그때부터 야금야금 이파리를 뜯어먹는 벌레처럼 여기저기 레바브탑을 올랐다.
물론 ‘야금야금’과 어울리게 처음엔 미미한 결과만 보였으나 최근은 계속 경신 중이다.
전 세계 인구 대부분이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부터 일본 같은 선진국까지.
기록을 갈아치울 때마다 나라는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 : 씨, 씨×. 지금 미등록 쇠악기들이 멋대로 등반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기록 경신한 거임? 빨리 재경신해!
펄펄 날뛰거나.
?? : 엥? 머임? 탑 최고 기록 왜 이따위죠?
경신된 줄도 모르거나.
?? : 누군지 알아내서 이민 오라고 해.
욕심내거나.
공통점은 여론에 안 알리고 나라끼리 은밀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뿐.
“한국도 소식 들었겠지? 성가시게 된 거 아닌가?”
“오히려 좋아. 한국도 너무 쉽게 지배하면 재미없잖아.”
“시, 실전이니까 쉽게 끝내야지 않을까요…….”
음울하게 남자의 말에 여자가 태클을 걸었다.
저 계집은 눈치 보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꼭 다 한다고 남자가 눈을 부라리자 그녀가 마구 엉킨 머리카락을 모아 커튼 치듯 얼굴을 가린다.
그러다가 몸을 굳히더니 갑자기 머리카락 커튼을 젖혔다. 음울한 표정에 곤란함이 배었다.
“저기, 일본이 눈치챈 것 같아요. ‘은닉’이 캔슬되려고 하는데……. 곧 있으면 등반할지도 몰라요…….”
“그렇다는데, 가을?”
남자가 이가을에게 들었냐는 듯 물었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대답 없는 이가을이 익숙한 남자는 곧 낄낄거리며 피 묻은 머리카락을 터는 여자에게 내기를 종용했다.
“최상층에 뭐가 있을지 알아맞히기 어때? 얼빠진 표정의 시스템 운영자? 아니면 공포에 질린 시스템 운영자?”
“그딴 재미없는 내긴 싫어. 난 그보다 무슨 소원 빌지나 고민할래.”
“최상층에 도달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을 믿는 거야, 자넷? 아, 간만에 웃겼다?”
“닥쳐.”
“일단 우린 레바브가 저딴 식으로 거부하는 미등록자라서 소원 안 들어줄걸.”
두 사람이 떠들고 있을 때 아직도 머리카락을 쥔 여자는 이가을을 초조하게 보았다.
곧 일본 헌터들이 올라올 거라고 했는데도―당연히 여기까지 올라오기 힘들겠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니.
“가을……? 우리 더 올라가지 않을 건가요……?”
그제야 이가을이 눈을 올렸다. ‘가을’이란 계절과 어울리는 그의 갈색 눈동자가 여자에게 고정됐다.
곧 흘러나오는 고저 없는 대답.
“안 올라가.”
그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내기하자고 치근덕거리는 남자였다.
“뭐? 야, 너 미쳤어?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지배 안 한다고?”
“내 목표는 지배가 아닌 거 알잖아.”
“아니, ×발. 뭐? 뭐, 인마? 아니, 이 미친놈이.”
너 인마. 목표가 세계 멸망 막기잖아!
“그러면 레바브탑 × 빠지게 지배하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뭐? 목표가 지배가 아냐? 그럼 뭔데!”
남자가 윽박지르자 이가을이 귓가를 매만졌다. 시끄러울 때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몰라서 묻는 거야?”
이가을이 짤막하게 묻자 그제야 남자가 체념했다.
그래. 이가을의 목표는 10년 전부터 단 하나였다.
‘구하기’.
세계 멸망으로 인해 다 뒈져버리는 인류를 구하는 게 아니다.
그는 언제나…….
어쨌든 이가을에게 세계 멸망을 막는 건 겸사겸사 하는 거였지, 주목표가 아니라는 뜻.
이가을이 최상층으로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면 여기서 뭘 더 해봤자 의미 없다.
빠르게 판단한 남자는 봉을 신경질적으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이해 못 하겠다는 투로 투덜거리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게’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만 볼 거라고?”
이 미친 새끼야.
이가을이 긍정의 침묵을 선보이며 고개를 들었다.
한 층만 올라가면 최상층.
그리고 그곳에는 일본 시스템 운영자들이 있다.
“후우…….”
이가을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찾은 것은 이하늘이었다. 당연했다.
10년 전처럼 같은 동네, 같은 집에 사는 이하늘에게 바로 접근하면 좋았겠으나 망할 ‘순서’란 게 있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전개’가 틀어졌다.
그럴 수는 있다. 애초에 이가을은 전개를 틀기 위해 이 짓거리를 해왔다.
그런데 마치, 이가을의 수작을 미리 알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레바브가 먼저 손을 써버렸다.
3월 즈음해서 시스템 운영자가 되어야 할 이하늘이 2월에 된 것이 그 증거다.
【―― ― ―――― ―――.】
그래. 네 말대로 레바브의 수작은 소용없는 짓이야.
이가을은 속으로 대꾸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위, 그러니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시스템 운영자가 되기 전에 저지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된 지금도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최상층 직전 층에서…….
이가을이 허공을 움켜쥐었다가 확 폈다. 그러자 하늘이 출렁이더니 균열이 생기듯 벌어졌다.
그에 이가을은 미소를 지었다. 확인해서 만족스럽다는 듯이.
남자가 질린다는 투로 물었다.
“만족하냐, 새끼야?”
“좋아. 돌아가자.”
“진짜 이대로 돌아가는 거냐고. 미친 새끼…….”
“아, 소원 들어주는지 궁금했는데. 쯧. 어디로 가? 한국?”
혀를 차며 묻는 자넷에게 이가을이 막 고개를 끄덕이는 차였다.
뜬금없이 정이섭에게서 연락이 왔다.
“…….”
물끄러미 허공을 보던 이가을이 손을 펼쳤다. 빈손에 책이 생기고, 그가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갈색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책을 읽은 그가 이내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네…….”
“뭐?”
“돌아가자.”
“어디. 한국 맞지?”
“아니.”
역탑으로.
º º º
마감.
영어로 Magam이라 쓰며―아니다― 거꾸로 해도 magaM인 그것. 정이섭은 그에게 쫓겨 노트북을 두드렸다.
빌어먹을, 이번에 자연으로 생긴 거랑 내가 만든 게 도대체 몇 개야?
본명 정이섭, 바벨에 등록한 닉네임은 허울뿐인 세례명을 따와 ‘요한’이다.
그렇다. ‘게이트 도감’의 저서, 그 요한이 맞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그는 1년에 두 번, ‘게이트 도감’을 개정해서 내는데, 지금이 바로 그 시기였다.
매번 자신이 정해둔 날짜에 이를 갈며 새로 생겼던 게이트를 정리한다. 왜 이걸 시작했는지 후회하는 건 덤.
“요한아아아.”
게이트 접속을 끊으면서 시몬을 데려왔던 정이섭은 뒤쪽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욕을 했다.
닥쳐, 제발 형. 형만 보면 머리가 아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