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80)화 (80/90)

<제80화>

그도 그럴 게 앞뒤 생각 안 하고 그를 빼 왔다. 저만 사라져도 최가영이 대한민국을 뒤질 판에 개유명하신 시몬도 데리고 와버린 것이다.

‘충동적으로 굴지 말걸…….’

물론 시몬은 ‘놀이’를 그만둔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성급했던 것도 맞아 머리가 아팠다.

그 속도 모르고 시몬은 자넷을 찾았다.

“자넷 언제 온대? 나 슬슬 아파서 정신 잃을 것 같은데.”

그럴 만도. 전신이 박살 났는데 어떠한 수습도 하지 않은 채로 몇 시간이 지났으니까. 아무리 각성자라도 정신을 놓을 만한 고통이 느껴질 것이다.

“정신력으로 버텨…….”

“나는 시스템 운영자가 아니라서 정신력이 바닥이라.”

“나불대는 입만 가만히 둬도 덜 아플 것 같다는 게 내 판단이야.”

“아프다고오.”

무시로 일관하자 급기야 영어로 아프다고 지랄 염병을 떤다. 결국 정이섭은 이가을에게 연락했다. ‘자넷 누나 언제 와?’ 하고.

그러지를 말았어야 했는데.

“……그 게이트에 개입한 게 형이 아니라고……?”

빠져나왔던 ‘기억 더미’ 게이트.

이상한 문제에 짜증이 나 발악하다가 조금 간섭하려 했더니 권한이 없다며 튕겼다.

궁극적 존재라길래 형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이하늘은 안전하겠거니 하고 나온 건데.

아니, 그것보다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다 말한 거였는데.

‘썅. × 됐다.’

시몬이 이하늘과 접촉한 걸 이가을이 모른다는 걸 알았다면 이렇게 병신처럼 혼자 다 털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저를 내려다보는 이가을의 눈빛은 여상했다.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눈이었다.

그러나 정이섭은 공포를 느꼈다.

등 뒤로 주르륵 식은땀이 흘렀다.

“형…….”

“시몬은.”

“나 여기 있어.”

형, 너 큰일 났어. 그나마 멀쩡한 손을 흔들어서 위치 알려줄 때가 아니라고.

이가을이 바로 시몬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형편없는 몰골로 누운 시몬을 내려다보다가 입을 연다.

“만난 이유.”

“촬영할 겸 너 만나러 왔는데 네가 없었어.”

“만난 이유.”

“내가 운이 좋잖아. 업체 사람들이랑 회식했는데.”

짜잔.

네 동생이 있더라.

“만난 이유가 뭐냐고 물었어.”

“내 운을 의심해?”

그건 좀 가슴 아픈데.

시몬이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눈을 휘었다.

“그 책에 안 적혀 있어?”

나 분명 네 동생에게 많이 떠들었거든. 그렇다면 내 말이 ‘기록’됐을 텐데.

녹색 눈이 이가을의 손으로 향했다. 평소에 꺼내고 있지 않은 검은 책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시몬이 턱을 까딱했다.

“한번 확인해 봐.”

“이 책에 네 저의 따위는 안 쓰여 있으니까.”

아. 설마.

“내 속내가 안 적혀 있어서 믿을 수 없다는 거야?”

아니, 뭐, 그렇겠지. 그 책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안 믿어줄 줄이야.

“정말 운이 좋아 만난 건데…….”

안 믿는 게 가을답다 해야 할지.

시몬이 다시금 웃음을 흘리다가 멀쩡한 손가락을 까닥였다.

손가락. 그걸 보니 가느다랗던 손가락이 생각났다.

근데 가을.

“네 동생 손가락 예쁘더라.”

느닷없는 손가락 칭찬.

그 말을 이해 못 할 이가을이 아니었다.

저번에 시몬이 한번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고 ‘책’에도 둘의 대화가 버젓이 기록됐으니까.

이가을이 말없이 시몬을 응시했다. 얼마 안 가 함께 탑으로 돌아온 자넷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막 휴게실에 가서 휴식하려 했던 자넷이 반응했다.

“왜?”

“시몬 치료해 주지 마.”

“앗, 그건 진짜 너무한데? 나 정말 아파.”

“그러게 왜.”

이가을이 읊조렸다. 동시에 책에서 본 시몬의 말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고려해 보겠대요.’

“하늘이한테 거짓말을 해.”

9. 남산 위에 저 게이트…… 1절만 해라

“넵…….”

‘기억 더미’ 게이트에 휘말리고 나온 지 사흘째인 화요일, 저녁 8시 반.

각성 세밀 검사를 받으려면 꼭 특진과 헌터와 동행해야 했다.

그래서 관리국에 도착하자마자 사람을 기다렸던 이하늘은 이하늘 씨 맞냐는 질문에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그녀의 얼굴에 뜬 감정은 복합적이었으나 대표적인 건 떨떠름함, 당황, ‘네가 여기서 왜 나와?’ 하는 놀람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색 머리인 남자가 친근하게 말을 건다.

“그러시군요. 오늘은 제가 특별 담당입니다.”

만나서 반갑다고 불쑥 내미는 커다란 손을 슬쩍 본 이하늘은 망설이다가 반가운 척 일단 악수했다.

최가영이 못 오면 부담당이 오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대체 왜 이 사람이.’

당연하게도 속으론 전혀 반기고 있지 않았다. 눈앞의 사람이 불편했기 때문에.

때는 몇 주 전, 채널 접속을 처음 한 날.

게이트에 휘말린 시스템 운영자들을 어떻게든 구해내기(…….) 위해 힘냈던 이하늘이 그곳에서 보았던 헌터는 단 두 명.

하나는 최가영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늘색으로 염색한 거 잘 어울리네.’

지금 눈앞의 (구)금발남 유성우였다.

원래는 아무런 유감도 없는 상대였다.

채널 접속한 당시 안 보일 자신을 보는 것처럼 굴어 착각을 일게 한 사람이긴 했으나 그저 그뿐.

솔직히 말해 잊고 있었다고 말해도 좋았다.

그러나.

“근데…….”

“…….”

“우리 어디서 본 듯한데. 그쵸?”

이런 식으로 떠보는 게 조금…….

이하늘은 한숨을 삼키며 이틀 전 일요일을 떠올렸다.

º º º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어둠이 내려앉은 집.

거기서 날백수(이공, 23세)가 거실 소파에 앉아 드물게 다리를 마구 떨며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다. 한 손엔 휴대폰을 든 채.

몇 시간 전, 쌍둥이에게 연락이 왔다.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왔다는 짤막한 한 줄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누나가.

우스운 건 이 사실을 가족에게 숨기고 싶어 한단다. 그래서 이공은 당장 보호 센터에 튀어가고 싶은 걸 참았다.

‘아니, 어차피 보호 센터에 가면 숨길 수도 없는데 왜 안 알려주려는 거지.’

지금쯤이면 거기 등록했을 테니 센터에서 연락받은 거라 하고 갈까.

곧 그가 느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정신 차리자. 새벽이야.

똑딱거리며 거실에 울려 퍼지는 초침 소리를 눈 감고 쫓던 이공이 얕게 수마에 잠겼을 때였다.

“영아.”

누군가가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번쩍 눈을 뜬 그는 제 누나를 보았다.

“왜 여기서 자? 들어가서 자지. 나 기다렸어? 불편하게 옷도 안 갈아입고.”

“……안 갈아입은 게 아니라.”

이활한테 소식 듣자마자 갈아입은 거야.

이공이 뒷말을 삼키고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보호 센터에 있지 않고 집에 왔느냐고 물을 뻔했다.

다행히 이공은 물이 쏟아지기 전에 물컵을 순발력 있게 쥐었다. 이하늘이 게이트에 휘말린 걸 모르는 상태인데 물어볼 수 없는 노릇.

그래서 그가 선택한 건 왜 늦게 왔느냐고 그녀를 탈탈 터는 거였다.

피곤하기도 했거니와 어서 씻고 자고 싶었던 이하늘은 결국 사실을 토로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부터 시작해 이하늘의 상태를 확인했던 이공은 비로소 묻고 싶은 걸 물어볼 수 있었다.

“근데 왜 보호 센터에 안 갔어?”

……설마.

이공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각성했…….”

“아냐. 최가영 헌터한테 사정사정해서 보호 센터에 안 가고 관리국에 매일 가서 검사받기로 했어. 으, 피곤해.”

그 말을 끝으로 이하늘은 씻으러 올라가 버렸다.

각성한 게 아니구나.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든다. 그게 좀 불편해 이공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나저나 관리국에서 매일 검사?

이공은 헌터 생활을 해온 이래로 제 누나와 같은 예외 케이스를 본 적 없었으나 그러려니 했다.

최가영은 이하늘을 일방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가 있는 걸 아니까 예외로 허용했나 보지.

얼마 뒤 샤워까지 했는지 수건으로 머리를 두른 이하늘이 내려왔다.

이공이 물었다.

“매일 몇 시에 관리국 가기로 했는데?”

“저녁 8시 반. 아, 주말은 시간을 바꿀걸.”

“너무 늦은 시간 아냐?”

“어쩔 수 없어. 회사가 8시에 끝나잖아. 근데 영아, 이것 봐봐.”

이하늘이 수준급으로 화제를 돌리며 수건을 주욱 뺐다. 물기에 젖은 금발이 보였다.

그녀가 자기 정수리를 가리켰다.

“뿌리 너무 많이 올라왔지.”

“보기 흉하진 않아.”

“지저분해 보이는데……. 내일 미용실 갈까.”

그 말에 이공도 무심결에 자기 머리카락을 만졌다.

파마가 풀려가고 있다.

“그럼 나도 같이 가.”

그렇게 해서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두 남매는 일요일 낮에 미용실에 왔다.

단골 미용실에 들어가자마자 이공은 표정을 굳혔다.

있으면 안 될 새끼가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무슨 색으로 염색하실지 생각해 두신 거 있으세요?”

“음, 아직 못 정해서.”

“이번은 한 번도 안 해본 블랙은 어때요?”

반짝이는 금발, 수려한 외모. 여유 있는 듯한 자세가 어디 있는 집안의 자제 같은 남자.

매일같이 최가영 뒤에 서 있는 유성우였다.

관리국 본부의 또 다른 미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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