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81)화 (81/90)

<제81화>

이공은 반사적으로 제 뺨을 만졌다. 당연히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유성우는 자신의 얼굴을 모른다. 기껏해야 마스크와 모자 쓴 모습이나 헬멧 쓴 모습만 알 것.

‘중요한 건 목소리…….’

이공이 목소리를 내지 않겠다 다짐한 순간.

“영아. 너 펌한다고?”

“응.”

등신같이 목소리를 냈다. 이하늘의 말에 대답하는 건 제 의지가 아닌 무조건반사여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고작 한 글자에 알아봤을까?

사실 이공은 제 얼굴이 알려지든 말든 신경 안 쓴다. 기피하듯 숨기고 다닌 이유는 당연히 이하늘 때문.

한마디로 유성우가 자신이 ‘무궁’인 걸 알아도 별상관 없긴 했다. 시초야와 같다.

하지만 무궁의 누나가 이하늘인 걸 알면, 유성우가 이하늘을 가만히 둘까?

‘짜증 나네…….’

자신이 무궁이란 걸 유성우가 알아차렸는지 확인하려고 그를 흘깃 쳐다본 차였다.

이공이 멈칫했다.

“지금 손님이 많아서 기다리셔야 하는데.”

대기석에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안내에 따라 두 남매는 자리에 앉았다. 빈자리가 딱 두 개였다. 유성우 왼편에 두 자리.

그렇게 이하늘은 유성우 왼편에, 이공은 이하늘 왼편에 착석했고.

유성우의 시선은…….

이하늘에게 박혀 있다.

그것도 아까부터.

아, 이건 또 뭐지?

시초야도 모자라 유성우까지 왜 우리 누나한테 관심을 갖나.

이공의 심기가 뒤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º º º

‘뭐지?’

“우와, 진짜 하늘 씨는 무슨 강철 머리카락인가 봐. 이번에도 하나도 안 녹았네. 무슨 관리하는 거 아니랬죠?”

“아, 네. 네…….”

“머리카락도 되게 얇은데 어떻게 이러지? 솔직히 탈색도 되게 잘 먹어요. 한 번 한다고 이런 색깔 나오기 쉽지 않은데.”

‘뭐냐고.’

단골 미용실에 이공과 함께 온 이하늘은 매번 감탄하는 미용사 언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속으론 ‘뭐냐고’를 연발하면서.

그도 그럴 게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오른편에 앉은 남자에게서.

결국 이하늘은 용기를 내서 고개를 틀었다. 제가 보면 시선을 거두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많이 잘생긴 금발의 남자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은 것이다.

‘뭐냐고…….’

저 아세요? 알아서 이렇게 쳐다보는 거세요?

그녀의 간절한 속마음을 들은 걸까. 눈 마주친 남자가 이하늘을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손에 든 책자를 내민다.

“저기. 제가 염색을 할 건데 추천 좀 해주실래요?”

갑자기……?

덜컹.

그때 왼편에서 거친 소리가 들렸다. 이공이 긴 다리로 테이블을 걷어찬 것이다.

‘영이는 왜 빡친 거지.’

미용실을 오기 전까진 괜찮았는데 프런트 앞에서부터 기세가 이상하더니 지금은 표정 관리도 안 한다.

“염색이니까 신중하게 하시는 게…….”

“신중하게 하는 거예요, 지금.”

남한테 색깔 추천받는 게요?

“성우 씨. 블랙은 어떠세요.”

지금 손님들 머리를 터치할 때가 아닌지 대기석에 온 미용사가 재차 권한다.

성우?

남자가 눈을 휜다.

“아, 제가 각성 전에 검은색이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색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랬구나. 그럼 뭐가 나으려나.”

각성?

이하늘의 머릿속에서 여러 단어가 조합됐다. 금발, 성우, 각성.

‘금발, 성우, 각성…….’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던 이하늘이 다시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다시 눈을 휘며 웃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즈니스가 밴 것 같은 남자.

‘어디 다치신 데는 없죠? 제 대처가 미흡했던 건 아닌지 걱정이네요. 죄송합니다.’

특진과 유성우가 떠오른다면 과한 생각일까…….

‘아니, 그 사람이라고 해도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불현듯 불안감이 맴돌았다.

특진과에 소문이 돌았나?

이하늘이라고 금발의 이십 대 여성이 있는데 (사진 내밀며) 이렇게 생겼다. 근데 보호 센터 가기 싫어하더라. 그래서 어제부터 관리국에서 어쩌고저쩌고…….

말이 안 된다. 특진과는 자신의 신상을 감추기 위해서 애를 쓰는 집단. 툭하면 방독면을 쓰는 게 바로 그 증거가 아닌가.

고깃집에 왔던 사람들은 방독면을 쓰지 않았었지만 게이트가 열리는 바람에 최가영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이 특진과인 줄도 영원히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 특진과 사이에 자기 얘기가 돌았어도 얼굴을 깐 유성우가 이렇게 아는 체해 올 리가 없었다.

‘그럼 그냥 성격이 이런 건가…….’

혼자서 생각을 마친 이하늘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마음을 왜 졸여.

옜다. 어쨌든 안 그렇게 생겼는데 성격이 수더분해 보이니 색깔 추천해 주마.

게다가 유성우가 아닐 수도 있잖아.

이하늘이 막 입을 열 때.

“여기서 만난 것도 우연인데. 통성명할래요?”

“예?”

“제 이름은 유성우입니다.”

오……. 기껏 아닐 거라고 생각해 줬더니 빼박 자기가 유성우인 것을 가르쳐준다.

“아, 네에. 저는 이하늘이에요.”

통성명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쪽에서 먼저 이름을 밝히는데 무시하기도 그랬다.

앞으로 몇 시간은 미용실에 있어야 하는데 그 시간을 어색함으로 버틸 깜냥도 없었고.

“하…….”

근처에서 이공의 한숨 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이공은 대체 왜 저러고 유성우는 왜 이러는가.

“그렇구나. 저, 근데 하늘 씨.”

바로 성까지 떼며 이하늘을 부른 유성우가 드디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책자를 보았다.

팔락팔락,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넘어가던 책장이 곧 멈춘다. 그 페이지엔 푸른 계열의 인조모가 잔뜩 붙어 있었다.

기다랗고 마디가 두드러지지 않아 유려한 손가락이 페이지 표면을 문지르며 내리다가 어딘가에 멈춘다.

통상적으로 ‘하늘색’이라고 부르는 색깔.

이하늘이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니 그 광경을 보았을 때였다. 유성우가 입을 벌렸다.

“저희 어디서 만난 적 있죠?”

……예?

아리송하니 묻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확신에 찬 말투였다.

좀 전에 불현듯 느꼈던 불안감이 다시 엄습했다.

이게 무슨. 뭐지?

당연히 유성우는 게이트에서 채널 접속한 자신을 보지 못했을 터. 손도 통과하지 않았나.

이하늘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디서 봤나? 어디서 봤지? 채널 접속 때 서로 쭈그려 앉아 본 게 아니면 언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웬 괴한 헌터에게 붙잡혀 죽을 뻔했을 때. 이활이랑 닮은 헌터가 다 수습하고 난 뒤에 왔던 금발의 남자.

아. 그때! 그때 보고 이러는 거구나.

“아, 그 삼―”

―성역.

이하늘은 말하다가 느닷없이 입을 콱 다물었다. 그러면서 실수로 혀를 깨물어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말을 도중에 멈춘 게 더 중요했고, 다행이었다.

그때 유성우는 ‘엄친아’로서 방독면 쓰고 있었잖아.

그날 보지 않았느냐고 아는 체하면 유성우가 ‘엄친아’인 걸 알고 있다고 대놓고 광고하는 게 돼.

‘와, 씨…….’

이 사람 지금 나 떠본 거야? 떠본 거라면 왜? 왜 그런 거지?

× 될 뻔한 이하늘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처음 봐요. 하하…….”

“아, 그러시구나.”

하하.

멋쩍은 웃음과 낭랑한 미소가 오갔다.

그렇게 서로 보면서 웃다가 유성우가 갑자기 시계를 확인하더니 내일 오후에 다시 오겠다며 미용사에게 말하고 떠났다.

그리고 월요일.

토요일에 게이트에 휘말린 줄 몰랐다며, 레바브가 알려주지 않았다고 괜찮으냐고 여러 질문 폭격을 맞은 이하늘은 무사히 빠져나와 퇴근하자마자 관리국에 도착했다.

‘내일 보자’고 한 최가영을 일요일에는 만나지 못했다. 그를 대신해서 온 부담당 역할의 특진과 헌터가 과장님은 원체 바빠서 어쩌고저쩌고 설명했다.

오늘도 그렇겠지 싶어 부담당 헌터를 기다리던 중, 관리국 문이 열려 로비에 있던 이하늘은 무심코 시선을 들었다.

솜사탕처럼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늘색과…….’

그 머리카락 아래에 위치한 방독면.

설마 저 사람.

정면을 보며 걷던 하늘색의 남자가 휙 고개를 돌렸다. 방독면에 가려져서 눈이 안 보였지만 이하늘은 느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을.

채널 접속 때도 이런 느낌이었지…….

멍하니 생각했다. 어차피 특진과일 때의 유성우는 저를 아는 체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며 넘어가고,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최가영 헌터를 대신해서 온 부담당과 검사를 마쳤다.

그렇게 화요일인 오늘로 돌아오면.

“우리 어디서 본 듯한데. 그쵸?”

이런 말을 듣고 앉았다.

‘이 사람, 나한테 뭐 원하는 게 있나?’

유성우일 때도 엄친아일 때도 왜 어디서 보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는 거야.

‘혹시 유성우랑 엄친아가 동일인물인 게 알려져 있나?’

뭐가 됐든 이렇게 떠보는 건 더는 사절이었다. 이하늘은 고민하는 것처럼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일요일에 미용실에서 만났던……? 특진과 헌터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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