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82)화 (82/90)

<제82화>

“아…….”

유성우가 방독면 속에서 눈을 휘었다.

아하. 이렇게 나올 수도 있군.

유성우의 ‘눈’은 여러모로 정확하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눈’과 관련된 능력이 많다.

그중 하나가 거짓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눈이었으나.

‘됐어.’

거기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반인 상대로 뭘. 게다가 ‘판별안’을 사사로운 데에다가 쓰면 부작용이 컸다.

유성우가 악수했던 손을 놓고 농담처럼 물었다.

“원래 제가 얼굴이랑 이름을 드러내선 안 되는데. 입 무거우시죠?”

“아, 네, 네. 그럼요. 얼굴은 이제 기억도 안 나요.”

그건…… 기분이 좀 그런데?

자신은 어딜 가나 사람들 뇌리에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이름도 특이한 편이었고 뭣보다 외모가…….

유성우는 터질 것 같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아, 정말 흥미로운 사람이네.

“그럼 검사받으러 가볼까요. 듣기로는 보호 센터 입소 대신 관리국에서 매일 같은 시간에 와 검사받게 되셨다던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유성우는 이하늘을 검사실에 들여보냈다.

흐음.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자신이 흥미를 가진 사람을 다른 데도 아닌 미용실에서 마주한 건.

들어보니 단골 같은데 왜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을까.

유성우도 해당 미용실에 자주 다니는 편이었다. 주기적으로 머리 색을 바꾸기 위해서.

방독면은 아쉽게도 머리카락을 가리지 못했고, 각성하면서 변한 유성우의 금발은 매번 눈에 띄었다.

즉, 사람들이 딱 기억할 수 있다는 의미.

그리하여 유성우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염색하면서 이미지를 바꿨다. 갈색, 붉은색, 파란색…….

그가 헌터가 되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은 ‘머리 색을 자주 바꾸는 사람’으로 기억되어 이젠 소용이 없는 듯하지만.

아무튼 우연이었다.

그 보우가 신경 쓰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어디선가 ‘본’ 듯한데 기억이 안 나는 사람을 만난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니. 이쯤 되면 제 문제였다.

자신에게 자상한 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니 정말 보우가 말한 대로 첫눈에 반한 거 아닌가 의심할 때쯤.

유성우는 뭔가 말하려다가 멈추었던 이하늘의 반응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아하. 뭔가 있긴 있나 본데.

더 파고들고 싶지만 남자친구인 듯한 남자가 알게 모르게 하도 사납게 굴어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결국 유성우는 후퇴를 선택했고, 월요일에 이하늘을 또 만났다.

으음.

보호 센터에 안 가고 특진과가 맡아서 검사한다는 사람이 저 사람이었나…….

인질극 때 한 번.

미용실에서 한 번.

오늘 한 번.

우연이 세 번 겹쳤는데, 이 정도면…….

유성우는 그대로 욜로인생을 찾아갔다.

‘내일도 욜 씨가 이하늘 씨 맡아요?’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토요일에 그…….’

시몬 헌터랑 사라진 한국 헌터가 문제라서요. 과장님이 바쁘시네요.

‘아하.’

‘근데 어떻게 이름을 아시는 겁니까? 아는 사이입니까?’

‘네, 뭐. 그래서 말인데.’

‘……?’

‘내일 제가 이하늘 씨 검사할게요.’

그렇게 오늘은 그가 이하늘을 담당하게 된 것.

그 김에 한번 훅 떠봤는데 잘 빠져나간 이하늘이었다.

‘흐음…….’

그때 이하늘이 검사실에서 나왔다. 검사 가짓수가 꽤 많으니 피곤할 텐데 그런 기색이 전혀 없다.

저보다 한참 작은, 저번부터 흥미를 자극시키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유성우는 생각했다.

‘떠보는 거 관둘까.’

“하늘 씨.”

“네?”

“몇 살이시죠?”

“어, 24살이요……?”

“아하. 누나였네요.”

그건 왜 묻지.

이하늘이 의아함을 품고 눈을 깜박인 순간이었다.

“누나.”

동생 이공을 제외하고 누나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이하늘이 눈과 입을 벌렸다.

이 사람 지금 뭐라는 거야?

반응이 웃긴 걸까, 유성우가 버릇인 양 눈을 휘었다. 안타깝게도 방독면에 가려져 이하늘은 볼 수 없었다.

아무도 못 보는 예쁘장한 미소.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건.

“우리 게이트에서 만난 적 있는데.”

“…….”

“기억나요?”

이하늘이 느끼기엔 별로 안 예뻤다.

º º º

Q. 비상, 비상. 혹시 채널 접속한 시스템 운영자를 헌터가 볼 수 있나요?

A. 놉.

Q. 단 한 번도 그런 전례가 없었나요?

A. ㅇㅇ

Q. 근데 유성우 헌터가 절 게이트에서 봤다는데요? 근데 제가 게이트에 휘말린 게 총 두 번이고 채접한 게 하나인데…….

A. 진정해, 진정. 잘못 본 거 아닐까?

그렇네?

머릿속에서 여러 이하늘이 서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다. 그녀는 곧 깨달음을 얻었다.

“잘못 보신 거 같은데요?”

“아뇨. 백금발에 곱슬, 그리고 단발.”

유성우가 단호하게 말하더니 느닷없이 쭈그려 앉는다. 그러고는 손짓한다. 마치 같이 쭈그려 앉으라는 것처럼.

얼떨결에 쪼그리고 앉은 이하늘이 방독면을 쓴 유성우와 마주하자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졌다.

“사실 진짜 가물가물했거든요. 근데 누나 만난 뒤에 내가 요즘 툭하면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써요. 그래서인지 점점 선명해지는 거야.”

다리에 힘이 풀려 미로 속에 앉았던 자신. 번개로 늑대를 지지고 다가오던 유성우.

눈높이를 맞추듯 쭈그려 앉아 자신에게 얼굴을 고정했던, 방독면.

그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현실의 유성우가 손을 뻗어왔다. 이하늘이 저도 모르게 상체를 뒤로 물린 순간.

유성우의 손이 그녀의 팔에 닿기 전에 우뚝 멈춘다.

그가 중얼거렸다.

“우리 이런 자세로 게이트에서 만난 것 같아요, 누나.”

“…….”

그, 그럴 리가. 나를 봤을 리가 정말 없는데?

“저어. 근데 제가 게이트에 딱 두 번 휘말려봤거든요. 하나는 지하굴이었고 하나는 기억 더미인데…….”

“네에.”

어린애 대하듯 대답하는 유성우였으나 이하늘은 그에 이상한 점을 못 느끼고 필사적으로 네 생각이 잘못된 거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저 한 번도 유성우 헌터님을 본 적 없어요.”

“오. 본명 뒤에 헌터라는 호칭 붙여준 거 누나가 처음이에요.”

“엄……친아 헌터님.”

“내 닉네임 아시는구나아. 보통 화려한 미친개로 기억하는데. 하하.”

조롱인지 뭔지 닉네임 기억해 줘서 고맙다는 유성우의 모습에 이하늘은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진짜 답답하게 이럴래, 하늘아?

정신 차려. 제발! 말려들지 말고.

“아무튼 전 그 두 게이트 말고 휘말린 적이 없으니까요. 잘못 보신 거예요. 말이 안 되잖아요.”

맞다. 말이 안 된다.

이하늘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유성우는 욜로인생에게서 담당을 뺏어오면서 관리국에 기록된 그녀의 게이트 흡수 횟수를 살펴봤다.

총 두 번.

그마저도 제가 맡은 게 아닌 게이트였다.

말이 안 되어도 너무 안 됐다.

“그래서인지 더 궁금하고, 알고 싶고…….”

이렇게 단호하게 부정하니까 흥미가 마구 생기고.

유성우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독면을 벗었다. 하늘색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푸른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 모습이 어쩐지 천사 같았다.

“아무튼 헌터라면 뭐가 있다 싶겠는데 헌터는 또 아니라 하니.”

지이잉, 근처 책상 프린터에서 서류가 나왔다. 쭈그려 앉은 채로 유성우가 서류를 뽑았다.

푸른 눈이 빠르게 종이를 훑었다.

“미각성자네요, 오늘도.”

“아, 네…….”

“앞으로 열흘만 더 고생해요, 누나.”

“……네, 네. 근데 저기, 계속 누나라고 부르실 건지.”

“네에. 친하게 지내요, 우리. 내가 정녕 착각이나 일삼는 미친개인지 아닌지 확신이 설 때까지요.”

이하늘 입장에선 정말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º º º

“여보세요.”

업무용 휴대폰에 전화가 와 이활이 짜증스레 받았다. 상대는 헌터인 주제에 뿔테 안경을 쓰고 다니는 특진과 헌터였다.

―보우야. 옆에 과장님 계시니?

“왜요. 헌커톡으로 연락해.”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안 바쁘면 전화 바꿔줄래? 과장님 폰이 꺼져 있다네.

당연했다. 최가영은 근무 중에 휴대폰을 꺼두니까.

휘이이이잉.

옥상이라 그런지 거친 바람이 불었다. 이활은 난잡하게 흩날리는 앞머리를 넘기려다가 포기하고 최가영을 불렀다.

“전화 바꿔달래.”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최가영이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휴대폰을 받았다.

“최가영입니다.”

―과장님!

“어, 우리 안경 아냐.”

―시몬 헌터 찾으시는 중이죠?

“어. 겸사겸사 다른 새끼도.”

온몸에 검은색 도배한 새끼.

검은 정장을 입은 자신과 이활도 마찬가지였으나 최가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과장님이 말씀하신 한국인 헌터는 모르겠지만 시몬 헌터는 일단 잡히긴 했는데요.

“뭐?”

―근데 이게…… 벌써 미국으로 돌아갔다는데요?

……엥?

이건 또 뭔 개소리.

뿔테 안경의 말이 진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최가영이 꺼두었던 휴대폰을 켰다.

[미합중국 S급 각성자 시몬, ‘깜짝 내한’ 소식 sns에…….]

[말없이 한국 방문한 시몬, 그 이유는?]

[행운아 시몬, 내한했다가 게이트에 휘말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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