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85)화 (85/90)

<제85화>

“그러게요. 탑 기록 세계 1위는 우리나라잖아요. 안전하지 않을까요.”

시초야 뒤에 서 있던 청년이 거들었다.

대표적으로 길드 ‘3절’과 ‘시발’ 덕분에 레바브탑 기록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대한민국.

아무리 날고 기는 미등록자라 해도 1층부터 세계 1위 기록 층까지 깨기는 어려울 거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그에 최가영이 드물게 실소했다.

“누가 그럽니까? 아닙니다.”

“예? 뭐……가 아니죠? 안전할 거라는 게?”

“그것도 그렇고. 세계 1위라는 것도 그렇고.”

그 무심한 어투에 반응한 건 이공과 시초야였다.

“뭔 소립니까.”

“뭔 개소리야?”

“뭐, 사실 무리 당신 말대로 저번에 모이자고 한 이유는 그냥 경각심만 주려고 했던 건데 말이지.”

미등록자 헌터들이 개나대고 있으니 혹여 우리나라에도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재경신’하게 준비해 둬라, 따위의 경각심을.

그러나 지금은.

“며칠 전에 일본에서 극비 전언이 왔습니다. 현재 일본 레바브탑 기록이 99층이라 합니다.”

“……뭐?”

“더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 소행인지 다들 아시겠지만, 그 미등록자 나부랭이 짓이랍니다.”

스타트 존에 싸한 침묵이 돈다. 순식간에 무거워진 분위기에 흐음, 콧소리를 내던 무리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사실 의아한 게 있는데 말이죠. 미등록자들이 기록 경신하고 있을 때 해당 나라는 왜 가만히 있었을까요?”

“좋은 지적입니다. 미등록자들 사이에 정확히는 몰라도 숨기고 은폐하는 능력자가 있을 거라고 본답니다.”

“아하. 남들 눈을 속였다.”

“지금 그게 중요해?”

쾅. 한쪽에서 테이블을 쪼갤 것처럼 발꿈치로 내려찍는 이가 있다.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린 시초야였다.

“아니, ×발. 99층? 우리가 지금 80층도 안 올랐는데 99층?”

“이거…… 문젠데요? 만약에 미등록자들이 우리나라에서도 기록 경신하면…….”

“아, 김도운! 재수 없는 말하지 마, 이 새끼야.”

하지만 시초야의 뒤에 선 청년, 김도운의 말대로 가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미등록자들이 우리나라에서도 99층까지 오르면…… 초기화 말곤 답이 없네요.”

무리가 싸늘하게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고는 묻는다.

“일본은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말해 주던가요?”

“뭐, 말이 많지만 어쩔 수 있나. 레바브가 게이트 위치를 안 알려주는 게 더 커다란 인명 피해를 부르니 초기화를 할 수밖에. 아직…….”

최가영이 대답하며 시계를 확인했다.

“세계가 조용한 거 보니 실행은 안 한 모양입니다만.”

“으으음.”

로맨티스트가 난데없이 난제를 발견한 사람처럼 콧소리를 낸다.

“근데…… 왜 99층까지만 올랐는지 궁금한 건 저뿐인가 보네요.”

“…….”

“이레귤러가 몇 층까지 존재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만…… 저희끼리는 아마 100층일 거라 가정했잖아요. 근데 왜 99층까지 올랐을까.”

나 같으면 100층까지 올라가 보고 더 위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봤을 텐데.

시초야가 비웃었다.

“100층에 ×나게 빡센 거 나와서 걍 포기했나 보지, 무슨 이유가 있겠어?”

“쌤아, 욕 좀 그만해……!”

김도운이 시초야의 입을 막아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고개를 거세게 내저어 입을 막으려는 손을 피한 시초야가 저를 끌어안은 남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고서 이를 갈았다.

“그래서 뭔데? 미등록자들이 오면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거고, 초기화할 거니까 알아두고 있어라?”

“못난 소리만 할래, 너?”

“그럼 뭐 하자는 건데! 뭐 할 말이 있으니까 모이라고 한 거 아니야!”

“그렇지. 그래.”

최가영이 대충 긍정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짧은 침묵 끝에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국장님이 하신 말은 단 하나.”

“…….”

“‘등록자가 미등록자보다 더 대단한 걸 보여줍시다.’”

그게 뭔.

“개소리야…….”

시초야가 얼 빠진 어조로 중얼거릴 때, 이공이 입을 열었다.

“미등록자보다 선수를 치라는 거네요.”

“오. 쌤, 분발 좀 해야겠는데. 궁이는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야?”

“아, 아니. 썅. 나도 바로 알아들었어! 꼰대 네가 말을 뭐같이 하니까……!”

“인원 추려서 등반하겠다고 전해요, 국장님께.”

“야! 너 당분간 등반 안 한다며! 어디서 상도덕 없게 새치기를 해?”

후후. 개판이네.

무리가 돌아가는 판국을 보며 일어났다. 지금까지 말이 전혀 없던 수행비서가 팔뚝에 걸쳤던 옷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무궁 씨. 저희 길드에서 필요한 인원이 있으면 말해요. 차출해서 지원 넣어줄 테니까.”

“저희는 전부 생산계라 도움이 될 만한 건 없겠지만 포션 필요하시면 언제든 요청하시길.”

로맨티스트 역시 일어난다. 베일 아래에서 찰랑이는 귀걸이가 반짝였다.

그야말로 파하는 분위기.

그 속에서 최가영은 의문을 가졌다.

평균 연령이 얼마나 될까?

한 번 모이기도 어렵고, 모여도 금방 큰 소리가 오가며, 마무리도 이런 식으로 매번 얼렁뚱땅.

“이 모습을 우리만 보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최가영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º º º

어떡하죠, 최가영 헌터님.

‘그 모습, 저도 보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가영이 보는 광경을 가상공간에서 그대로 보고 있던 이하늘이 생각했다.

º º º

5대 길드.

3년 전까지만 해도 4대 길드라 불렸으나 시초야가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5대 길드로 자리 잡았다.

그 5대 길드가 매년 두 번 정도 모인다.

5대 길드 모임.

정확히는 5대 길드+α 모임.

더 정확히는 매번 한 길드가 참여를 안 해서 4/5대 길드+α 모임이다.

본래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아무 VIP룸 따위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누군가 엿듣는 일이 전혀 없게끔 간혹 극단적으로 오늘처럼 던전에서 모이기도 한단다.

‘그런데 무슨 소용이지? 내가 듣고 있잖아…….’

A급 던전에 입장하라는 게 채널 접속을 말한 것이란 걸 깨닫고 안도했던 이하늘. 그녀는 두 번째 채널 접속을 겁내지 않았다.

먼젓번에 이미 했으니까. 편한 마음을 가졌다고 보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지쳐서 어서 집에 가고 싶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런 방종한 꼬마 계집을 봐라! 내 언약자에게 까부는 것도 정도가 있거늘! 망할 운영자! 당장 내 언약자에게…….〗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니. 저 애는 아직 10대고…….〗

【운영자 씨. 내 언약자에게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나라고 전해주시죠.】

【영자야, 나도 전해줘. 그냥 여기서 나가자고.】

아, 이거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닌가.

5대 길드 모임에 하필이면 그녀가 담당하는 성신의 언약자들이 죄 모였다. 덕분에 네 성신의 단체 채널에 입장해야 했고…….

이렇게나 시달리게 된 것이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원래 목소리를 듣기만 했을 때도 시끄러워서 정신 사나웠는데…….

이하늘이 키보드에 손을 올리지 않자 ‘머리’가 그녀의 손을 잡고 키보드에 올렸다. 바른대로 쓰라며 말이다.

그러면 ‘남쪽 태양’이 강압하지 말라며 ‘머리’를 스을쩍 민다. 그 틈을 타고 ‘쓸데없는’ 성신이랑 ‘사냥’이 와서…….

“제발 다들 입 좀 닥쳐요…….”

막 중얼거린 이하늘의 눈에 마침 임여명이 보였다. 그가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저랬다.

“넌 왜 그래.”

“기어이 채널 접속한 게 멍청해서.”

“아.”

그런 거였군.

사실 임여명은 이하늘이 이번 길드 모임 때 채널에 접속하는 걸 반대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데 왜 비효율적으로 하냐면서.

그러나 채널 접속에 이제 익숙해져야 한다며 하이레가 고개를 저었고, 끝내 이하늘도 덩달아 채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게 아직도 불만이었구나, 여명아.

이하늘이 한숨을 삼켰다. 그런 임여명을 달래고 얼러봤자 돌아오는 반응은 더 까칠하다는 걸 이제 안다.

그녀도 이젠 어느 말을 걸러도 되고 어느 말을 보내야 하는지 나름 기준이 생겨 성신의 말만 언약자들에게 능숙하게 보냈다.

물론 무시하면 어느 성신―‘머리로 장난치는 자’ 같은―이 속된 말로 짖어댔지만 이젠 그 또한 그러려니 하며 넘길 수 있게 된, 숙련된 시스템 운영자였다.

‘으음.’

이하늘은 타이핑을 하면서도 슬쩍 최가영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보았다.

엄친아.

사실 이하늘은 채널 접속하기 전에 엄친아, 그러니까 유성우가 또 저를 볼까 봐 걱정되어서 하이레와 면담까지 나눴다.

유성우가 채널 접속한 저를 본 것같이 굴고 기억한다며.

심각하게 받아들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의아하게도 하이레는 평이한 반응을 보였다.

‘레바브와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세요. 유성우 헌터가 볼 수 있었다면 이미…….’

그래. 세계가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란 소리.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다행인 것은 오늘은 저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쳐다보지 않는다는 거였다.

대신 이하늘은 그 옆에 장승처럼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이활을 닮은 헌터.

닉네임은.

‘보우 맞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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