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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멸망을 굳이 막아야 하나요 (86)화 (86/90)

<제86화>

버스에서 인질극이 벌어진 날 유성우가 ‘바우’라고 부르는 걸 잘못 들은 것 같다고 했던 걸 떠올리며 이하늘이 눈살을 찌푸렸다.

채널에 접속하기 전에 숙지했으므로 잘못된 정보는 아니다.

근데 하, 진짜 이활이랑 많이 겹친다.

혹시나 해서 모노클로 본 그의 프로필은 지금 여섯 자리 중 한 자리를 차지한 ‘무궁’이란 헌터처럼 블라인드 처리되어 있어서 본명 따위를 볼 순 없었다.

임여명이 이런 블라인드 처리가 뭐 하는 거랬지. 힘숨찐이랬나…….

우뚝.

타이핑하던 이하늘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옆에서 곧장 뭐 하느냐고 호통이 날아왔지만 그녀는 입술만 깨물었다.

계속 어디선가 싸한 감각이 넝쿨이 몸을 감싸는 것처럼 타고 올라온다.

‘아니야. 내가 헌터가 되면 말하라 했는데.’

물론. 무울로온, 저 보우라는 헌터랑 무궁이란 헌터가 쌍둥이 동생일 경우 전부터 저를 속인 게 된다.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거라면 말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내가 숨기지 말고 말하라 했을 때 털어놓으면 되는 일 아냐?’

……그래도 무궁 헌터는 이공이랑 같은 공간에 있는 걸 봤으니까.

……하지만 헌터인데? 헌터들이 가진 능력으로 뭔들 못 할까? 물약으로 깨진 머리가 낫는 시대인데.

이하늘의 생각이 깊어져 갔을 때다.

시초야의 시원스러운 목소리가 이하늘의 귀에 꽂혔다.

“아니, 왜 이렇게 겁주는 거임? 시이이벌 새끼들, 기록 경신해 봤자 얼마나 한다고.”

잠시 움찔한 이하늘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맞아, 시초야도 5대 길드랬지.

채널 접속하기 전에 5대 길드에 대해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 놀라웠다. 더불어 저 헬멧 헌터 또한.

‘나…… 진짜 많이 엮였구나.’

헌터든 게이트든 뭐든. 특히 헌터는 거물급과 많이 엮였다.

그냥 오다가다 스친 거면 모르겠는데, 시초야와는 심지어 번호 교환도 마쳤다. 하루에 몇 통씩 ―일방적으로 시초야의 선톡으로 시작되는― 카톡도 주고받는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나름 평범한 일상을 보냈던 걸 생각하면 가히 놀라운 변화였다.

헌터와 연관되기 싫어했던 사람치곤…….

생각에 잠겼던 그녀가 정신을 차려보니 싸한 정적이 스타트 존을 맴돌고 있었다.

헌터뿐만이 아니었다. 서로 제 할 말만 하기 바빴던 성신들도 입을 싹 다 다물었다.

생각에 잠겨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듣지 못했던 이하늘만 영문을 몰라 고개를 돌렸다.

물론 얼마 안 가 침묵은 곧 깨졌다. 그러나 이하늘은 뒤에 이어지는 대화도 귀담아들을 수 없었다.

우선 임여명의 표정이 너무 좋지 않았고…….

【…….〗

〖…….〗

【…….】

【…….】

성신들이 아직도 하나같이 다 입을 다문 채였다. 슥 둘러보니 홀로그램 역시 미동도 없다.

그것들을 신경 쓰느라 헌터들의 대화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왜 그래?”

결국 이하늘이 임여명에게 넌지시 물었다. 사람 하나 죽일 것처럼 표정이 살벌했던 임여명이 짓씹듯 뱉었다.

“100층이 우리가 있는 층이니까.”

“뭐?”

“아니, 레바브는 이걸 안 알려주고 뭐 하는 거지?”

짜증이 담긴 임여명의 말에 이하늘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팟, 그가 사라졌다.

접속을 끊은 탓이다.

채널에 홀로 남은 이하늘이 허, 숨을 뱉었다.

“아니, 왜 저러지? 성신님들, 왜 그래요? 100층이라니?”

〖운영자야.〗

그때였다. ‘남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한 편에 속하는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모르게 단호해서 이하늘은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나 싶어서.

〖너는 그러고 보니 그 말을 들을 수 있었지.〗

“무슨 말이요?”

〖내 언약자에게 부디 말을 전해주렴. 머지않아 세계가 멸망한다고.〗

…….

……네?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이렇게 꺼내세요…….

당황……스럽다 못해 믿기지도 않았지만 이하늘은 일단 그 말을 창에 담았다.

그러나 엔터를 누르기 전, 저번에 ‘전지전능한 절대자’를 레바브 시스템에 가입시키느라 읽었던 이용약관을 떠올려냈다.

이하늘이 멈칫했다.

“잠시만요. 이것도 하나의 미래 지식 아닌가요?”

〖응?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러면 전해드릴 수 없는데요. 미래 지식을 그렇게 자세하게 보내는 건 안 된다고 이용약관에 적혀 있었…….”

〖잠시만! 잠시만, 운영자야. 아니, 그래. 맞다. 맞는 말이다. 절대율을 어기는 짓이긴 하지만…….〗

“예? 절대율? 심지어 이거 절대율을 어기는 짓이에요?”

허, 참.

이 성신님 봐라?

“절대율 어기면 저 최소한 사망인데 지금!”

〖아니, 아니다. 아니 뭐, 물론 그렇겠지만.〗

“와! 와, 이 성신님. 이 성신님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네. 그쵸, 머장님!”

【어? 어 그렇다! 이 미친 태양 나부랭이가. 스스로 고결하다 지껄이는 새끼들은 다 저러느니라! 인간을 위하는 척하면서 결국 희생을 강요하고! 이런 쓰레기! 네가 바로 악마다!〗

【듣는 악마 기분 나쁘군요.】

“그, 그렇게까지 욕하는 걸 바라진 않았는데. 아무튼, 그건 안 돼요. 저 그렇게 죽고 싶지 않거든요.”

〖하, 하지만 운영자야. 어차피 페널티는 나와 나눌 거란다. 내가 10에서 9는 가져갈 테니…….〗

“최소 사망인 페널티 중 10에서 1을 제가 가져가도 어쨌든 죽는 건 똑같지 않나요?”

〖아니……. 그래도 최소한 환생은.〗

아니, 이 성신님 진짜,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이하늘은 정색하며 임여명에게 배운 뮤트를 시전하려 했다. ‘남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기겁했다.

〖운영자야, 운영자야. 하지만 그래도? 세계 멸망이잖니.〗

어쩌라고요.

〖세계가 멸망하면 모든 인류가 죽고 너도 결국 죽는단다. 막아야 하지 않겠니? 내 언약자에게 말해 준다면…….〗

“아니, 저기, 성신님…….”

이하늘이 한숨을 푹 쉬면서 이마를 짚었다. 주변에 있던 헌터들이 모임이 끝났는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슬슬 임여명처럼 채널 접속을 끊어야 했다.

그전에 성신님한테 이 말 좀 하고.

“세계가 멸망하면 저도 죽겠죠, 당연히. 하지만 그걸 막으려고 희생하고 싶진 않거든요.”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다. 인류를 위한 희생정신? 그렇게까지 극도로 착한 인물이 아니다. 죽지 않을 선으로만 희생하면 모를까.

“게다가 직장인이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게 뭔지 아세요?”

성신들이 조용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네 성신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알 수 있어서 이하늘이 말을 이었다.

“‘아, 내일 세계 멸망했으면 좋겠다’예요. 왜냐하면 출근하기 싫어서.”

물론 저는 아직 그 단계가 아니긴 한데요. 그렇다고요.

아무튼 그런 사람한테 무슨 세계가 멸망하니까 절대율 어기고 전해달라고 해.

이하늘의 태도가 굳건하자 ‘남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래도 운영자야. 무엇을 원하느냐? 세계가 멸망한다고 내 언약자에게 전해주면 내 무엇이든 해주마. 그리고 음, 저 위 존재들에게 결재 몇 개 받으면, 어쩌면 페널티 규모를 줄일 수도 있단다. (그게 백만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긴 한데.) 아, 아니. 이 레바브야! 혼잣말을 채팅창에 올리면 어떡하느냐. 듣, 듣고 있니, 운영자야?〗

‘남쪽에 떠오르는 태양’이 이하늘을 애타게 부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하늘은 그의 말 대부분을 듣지 못했다.

그녀의 온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나간 스타트 존.

거기에 네 사람이 있다.

특진과 최가영과 유성우.

그리고 이활을 닮은 헌터와 이공을 닮은 헌터.

그것도 방독면과 헬멧을 벗은.

두 사람의 별이 느지막이 알아차렸다.

【저런. 채널 닫겠습니다.】

【영자야. 영자야. 채널 끄자. 우리 채널 끄자.】

“아니, 잠시만요.”

이하늘이 막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차였다.

채널이 뚝 끊어졌다.

º º 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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