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원래 초록색 눈이라고요?”
“네, 고객님.”
“원래…… 초록색…….”
도아는 거울을 다시 돌아보았다.
눈이 커져서인지 눈동자 색도 더 도드라지게 잘 보였다.
“저 토종 한국인인데요? 그런데……. 덮여 있었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검은색으로 보이도록 살짝 혼돈마법이 걸려 있었다는 말이지요. 하여간 지금이 원래 색이 맞아요. 머리카락 색도 지금 색이 원래 색이랑 흡사하신데요?”
“머리카락 색도요? 저 검은 머리 아니에요?”
“아뇨, 푸른빛 강한 남색 맞으세요.”
도아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싹 얼굴을 들여다본다.
눈동자가 아름답다. 거기에 흰자도 푸르스름할 정도로 희고 깨끗했다.
빽빽한 속눈썹 위에는 성냥개비를 여러 개 쌓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얼굴도 자연스럽게 윤곽을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
스마트폰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각도로 예쁘게 찍은 사진 같았다.
누가 봐도 자신은 자신인데, 이렇게 미인이었나 싶은 자신이다.
‘원래 초록색 눈이라고?’
엄마가 말한 게 사실이란 말이야?
얼떨떨한 기분을 감출 수 없는데 직원이 오해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아니면 좀 바꿔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이대로 너무 좋아요!”
도아가 고개를 휙휙 흔들자, 직원은 안심한 듯 웃었다.
메이가 탈의실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그럼 옷을 갈아입고 나와 주세요.”
안으로 들어가 원래 옷으로 갈아입으니 얼마나 날씬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와. 헐렁해.’
바지는 헐렁해졌고, 바짓단도 짧아졌다.
그건 윗옷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유연성도 늘었을까? 하고 다리를 찢어 봤는데―
‘된다!’
다리 찢기가 됐다.
‘와, 대박!’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 안에서 이리저리 유연성을 테스트해 보았다.
뻣뻣하던 목도, 어깨 통증도 전부 사라지고 자세도 완전히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만져본 뒤통수 두상도 동그랗게 다듬어져 있었다.
‘헐…….’
사기당하는 기분이었는데, 오히려 이득을 보는 기분이었다.
들뜬 기분에 저절로 실실 웃음이 나왔다.
‘역시 이거 주마등 같은 거 아닐까.’
죽기 직전에 뇌가 미친 듯이 분비하는 도파민 덕에 꾸는 꿈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도아는 제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탈의실 밖으로 나와서 물었다.
“근데 이게 원래 제 몸인 거죠? 영혼만 여기 있는 게 아니라요.”
“네, 그렇습니다. 고객님.”
“그럼 지금 현실에서 제 몸은 그냥 사라진 건가요? 게다가 부상이 심했던 거 같은데…….”
“부상은 여기에 오셨을 때 재빠르게 고쳤지요. 그리고 시간 밖에 계시니까 소동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시간 밖이요?”
메이가 빙긋 웃었다.
“네, 여기는 시간도 공간도 초월한, 그 외부에 있는 장소랍니다. 세계수의 그늘 아래니까요.”
“진짜 세계수인가요? 그 뭔가 세계를 떠받치고 있고, 성스럽고 그런……?”
메이가 하하 웃었다.
“네, 비슷해요.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진짜 나무는 아니지요. 하여간 다시 돌아가시는 건 걱정하지 마세요. 오시기 바로 전 시간으로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요.”
메이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래야 사고가 안 나죠.”
“대충 알겠어요.”
현실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란 말이구나.
도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자 메이가 말했다.
“그럼 이제 스킬을 익히러 가겠습니다. 사전 예약 때 스킬도 미리 선택해 주셨죠?”
“네, 그랬어요.”
바로 옆방에 기술 이수 센터라고 쓰여 있었다.
센터인데, 방이라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마법진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 위로 올라가 주세요.”
도아는 이제 별다른 긴장 없이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아니, 살짝 긴장되기는 했다.
메이가 말했다.
“요리, 약초, 검술. 스킬이 모두 세 개 맞으시죠?”
“맞아요.”
“각 분야의 최고의 강사 분을 섭외해 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사요?”
예상치 못한 말에 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머릿속에 넣어 주는 거 아니었나?’
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나같이 훌륭한 일타강사 분들이세요. 스킬을 익히는 데 제공되는 시간은 무제한이니까 편하게 스킬을 익히시면 됩니다.”
“무제한이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스킬 셋을 일정 수준으로 익히시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리실 테니까요. 대충 백 년쯤 걸리지 않을까요?”
“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도아가 그런 표정으로 메이를 바라보았다.
메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희 세계수 여행사는 고객님들께 최고의 교육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완벽한 서포트를 믿어 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잠시 후에 뵈어요. 도아 고객님, 화이팅.”
발밑의 마법진이 빛나자 도아는 주변 풍경이 일그러지는 걸 느꼈다.
“자, 잠깐―!”
백 년이요?!!
하는 말은 중간에 끊어졌다.
세상이 희미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
뼛속까지 도시인인 도아는 이런 숲은 티브이에서만 보았다.
저도 모르게 양팔로 스스로 끌어안으며 손으로 팔을 문지르는데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 학생은 이런 어린애인가?”
“어머, 귀엽네.”
“얼마나 버틸까.”
도아는 놀라 휙 뒤를 돌아보았다.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니, 두 사람과 한 마리가 서 있다.
경악하는 도아를 보고 밝은 금발의 여성이 히죽 웃었다.
“강의장에 온 걸 환영한다. 살아 돌아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 말에 옆의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애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살려 보내는 게 임무 아니었나?”
마지막 말은 고양이.
이족보행 고양이의 입에서 나왔다.
멍하니 셋을 바라보는 도아에게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졸업시험에 합격할 때까지는 함께 있게 될 거야. 잘 부탁해.”
❖ ❖ ❖
세 명의 스승은 어머니가 해 줬던 이야기에 나오는 영웅들이었다.
처음에 이름을 듣고서 너무 깜짝 놀라서 그 사람이 맞냐고 확인을 해야 했다.
전설 속 마물 베히모스를 물리친 기사 조세핀.
평원전투에서 평원에 협곡을 만든 대마법사 엘리바스.
약초학으로 붉은 역병에서 수많은 사람을 구한 현자 라크샤샤.
‘뭐, 라크샤샤가 고양이인 건 몰랐지만.’
그래서 도아는 정말로, 정말로 이상하지만.
‘진짜 엄마는 렌시아 대륙 사람이었나?’
하고 고민했다.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자신은 그냥 죽어가는 중에 머릿속에서 짜 맞춰진 환상을 보는 것일까.
그런데 이런 환상은 아무래도 없을 거 같았다.
도아의 영웅담을 듣고 라크샤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궁정식 영웅담이군, 귀족이었나?”
그 질문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귀족이라니.
귀족이라니.
반지하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돈을 아끼기 위해서 애를 쓰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엄마의 망상도.
‘그럼 엄마도 렌시아 대륙에 계시는 걸까?’
가면 만날 수 있는 건가?
엄마도 이렇게 세계수 여행사를 만나서 넘어왔다가 다시 렌시아 대륙으로 돌아간 걸까?
그런 의문들은 파도 거품처럼 일정하게 밀려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영웅들에게서 받는 일대일 과외는 처음에는 신기했고, 그다음에는 힘들었다.
여기에서는 시간 감각도 없어져서 시간이 흐르는 게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척 빠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히 매일매일 엄청난 분량을 소화하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 온 지 삼십 년은 더 지난 거 같은데…….’
여전히 훈련은 더디고 힘들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심지어 도아는 이 셋이 점점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 무척 좋아한다.
도아의 삶에서 엄마를 빼고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워진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더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그날은 더욱 훈련이 더뎠다.
도아는 지쳐서 해변에 밀려온 해파리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도아야, 바닥 말고 소파에 눕든가. 아니면 먼저 씻지 그러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엘리바스가 권했다.
갈색 머리에 버터 빛 눈동자.
다정남의 표본을 뜨면 이런 모양일까 싶은 엘리바스였다.
그의 권유에 도아는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낑낑거렸지만, 진짜로 힘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지.’
걱정하는데 엘리바스가 웃으며 다가와 바닥에서 도아를 안아 올렸다.
“미안, 조세핀이 훈련에서 힘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짜냈다는 걸 깜박했네.”
대마법사, 마법사 링의 링 리더. 협곡 생성자.
그런 엘리바스가 가르치는 건 요리였다. 엘리바스는 어느 때에도 화내지 않았다.
나긋나긋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엘리바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맛있는 요리가 나오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도아의 방까지 엘리바스가 안아다 주자 씻을 힘이 나는 듯했다.
“고마워요, 엘리바스.”
“별말씀을.”
엘리바스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도아는 욕실에 들어가서 씻었다.
이상하게 씻고 나면 힘이 난다.
“다 씻었어?”
씩씩한 목소리로 조세핀이 나타나 묻더니 도아를 꽉 끌어안았다.
“조세핀?!”
“어휴, 귀여워. 따끈따끈하네. 볼따구가 사과 같네. 왜 이렇게 귀여워? 응? 세상에서 누가 가장 귀여워? 우리 도아가 제일 귀엽지.”
“조세핀!”
도아는 웃음을 터트리며 조세핀을 밀어냈다. 훈련할 때는 사정없으면서 평소에는 이렇게 여과 없이 그녀를 귀여워하곤 했다.
조세핀은 금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어마어마한 미인이어서, 그런 미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니 얼떨떨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엄청나게 어색했는데, 이게 하도 계속되다 보니까 ‘나 진짜 귀여운가?!’ 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셋과 함께 하는 생활은 즐거웠다.
누군가와 한집에서 함께 살면서 같이 따뜻한 식사를 하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이구나.
도아는 몇 번이나 깨달았다.
종종 너무 즐거워서, 이렇게까지 즐거워도 되나 싶었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도아는 세 사람을 좋아했기에 어떻게든 훈련을 따라가고 성과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그녀의 실력은 쭉쭉 늘지 않았다.
매일 같은 걸 반복하고만 있었다.
‘어떻게 하지?’
도아는 이제 세 사람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데, 실력이 늘지 않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왜 안 될까?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난 원래 안 되는 건가.’
그때도 그랬다.
엄마랑 살 때도, 열심히 했는데.
정말 열심히 했는데.
결국 엄마는…….
‘아, 잠이 안 와.’
도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무로 만든 반듯한 2층짜리 저택의 2층은 세 사람의 방이었고, 1층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라크샤샤의 작업실로 이뤄져 있었다.
도아는 슬그머니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삐걱거리는 목제계단을 숨죽여 내려와 부엌으로 가서 물 한 잔을 따랐다.
거실로 나와 문을 열고 포치로 나선다.
주변은 온통 침엽수림.
차가운 밤공기가 숲의 향기와 함께 사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도아는 의자를 하나 골라 앉았다.
멍하니 어둠을 바라본다.
얼마나 응시하고 있었을까.
“추운데 뭐 하고 있니?”
놀라 돌아보니 라크샤샤였다.
이족 보행하는 고양이.
인간족이 아닌 툴레족인 라크샤샤는 그중에서도 고양이 부족이었다.
렌시아에서는 인간과 툴레 모두를 ‘사람’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도아가 보기에 라크샤샤는 커다란 페르시안 고양이다. 새하얀 털이 풍성하고 푸른색 눈동자는 아름답다.
소리도 없이 움직이는 건 역시 발바닥 젤리 때문일까?
“그냥요…….”
얼버무리니 라크샤샤가 곁으로 바싹 다가와서는 커피대를 꺼내 들었다.
이곳의 커피는 마시는 게 아니라 담배처럼 피우는 거다.
곧 불꽃이 반짝이고 부드러운 커피 향이 퍼져나갔다.
“그래, 무슨 일이니?”
도아는 눈을 깜박였다.
새벽이고, 초승달은 아주 가늘다.
멀리서 숲의 동물들이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토해낸 비밀은 밤의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했다.
“오늘 훈련을 제대로 못 해서…….”
조세핀이 그렇게 열심히 알려줬는데, 제대로 못 했다.
라크샤샤는 대꾸하지 않았다. 연기가 흘러가고 다시 짙은 커피 향이 난다.
라크샤샤 향기다.
“나, 버림받으면 어쩌지?”
목구멍 안에서 진심을 내뱉고 나니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엄마도 날 버리고 갔으니까.
난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어야 해.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다 날 버리고 떠날 거야.
그래서 늘 필사적이었다.
모든 일을 잘하려고 애썼다.
인정받고 싶었다.
인정해 주세요.
사랑해 주세요.
곁에 머물러 주세요.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고,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던 마음이 응어리져 올라왔다.
울음을 참으려 애쓰고 있으려니 라크샤샤가 말했다.
“이리 와서 날 끌어안아 보렴.”
“?”
도아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었고, 라크샤샤가 바싹 붙어 섰다.
“자, 어서.”
도아는 머뭇머뭇 두 팔을 뻗어서 라크샤샤를 안았다.
라크샤샤의 털은 엄청나게 풍성했다. 부드럽고 폭신폭신했다.
게다가 그녀의 키는 130c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서 안기에도 딱 좋았다.
따뜻하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나고 말랑말랑하고…….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소리 없는 눈물을 라크샤샤 털 안에 떨구며 도아는 그녀의 온기에 매달렸다.
“아무도 널 버리지 않아. 떠나지 않을 거야. 도아야. 네가 우리를 떠날 때까지, 우리는 계속 너를 가르치고 포기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을 거다.”
평소라면 바보 같은 걱정하지 말라며 신랄하게 말했을 텐데.
라크샤샤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달래듯 부드러운 음색도 아니었고 그저 사실을 이야기하는 담담한 목소리였다.
도아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큰 소리로 운다.
격렬하게 토해내고 나니, 이제 안도감과 부드러운 평온이 내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라크샤샤가 그녀의 머리를 도닥이며 물었다.
“다 울었니?”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샤샤의 털이 눈물 콧물투성이다. 라크샤샤가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저 안에서 초조하게 얼쩡거리는 녀석들을 부르자꾸나.”
놀라 고개를 돌리니 안쪽에서 엘리바스와 조세핀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