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라크샤샤가 나오라고 손짓하자 두 사람이 머뭇거리며 포치로 나왔다.
라크샤샤가 우아하게 말했다.
“자, 이 멍청이 둘은 네가 도망가 버릴까 봐 걱정한 거란다.”
엘리바스가 발끈했다.
“라크샤샤!”
“아닌가?”
“당연히 아니지!”
조세핀은 쪼르르 달려와 불안한 눈동자로 도아를 바라보았다.
“너무 훈련이 심했어? 좀 줄일까? 나도 모르게 오늘 좀 훈련 강도를 높인 거 같아서.”
“조세핀은 언제나 훈련을 무리하게 시키니까.”
“맞아, 다 내 잘못이야…….”
순식간에 시무룩해지는 조세핀을 보고 도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내가 못 따라가서…….”
엘리바스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어쩜 애 기를 이렇게까지 꺾어놔? 도아야, 도아는 잘하고 있어.”
엘리바스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오늘 베이킹 수업을 해서인지 그에게서는 버터와 설탕 냄새가 났다.
“아니……. 나는 그래도 많이 배우면 좋으니까…….”
조세핀이 당황해서 말끝을 흐렸다.
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녀요. 조세핀. 오늘 수업 좋았어요.”
그 말에 조세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그렇지? 아니다. 오늘은 네 수업이 문제였던 거 아냐? 엘리바스?”
“아, 제발. 말 한마디 한마디를 곧이곧대로 듣는 버릇을 고쳐.”
“뭐야? 그럼 도아가 나에게 거짓말했다는 거야?”
라크샤샤가 탄식했다.
“세상에, 정말로 둘 다 멍청이가 되어 버린 거냐?”
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서면 용기가 샘솟는다.
도아는 힘을 내서 말했다.
“나는 다들 나에게 실망했을까 봐……. 수업을 못 따라가서…….”
작게 제 문제를 이야기하자 엘리바스와 조세핀, 둘 다 눈을 크게 떴다.
“아냐!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
“맞아, 도아가 노력하고 있는 거 다 알아.”
번갈아서 열심히 칭찬을 해 준다.
몸에서 긴장이 풀려나갔다.
“매일 똑같은 것만 하는 거 같고…….”
다시 말을 덧붙이자 조세핀이 눈을 부릅떴다.
“인생은 끝없는 싸움이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있다 해도 그건 제자리에 있는 게 아냐.”
조세핀이 도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건 걸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야. 휩쓸려서 가지만 않으면 돼. 쳇바퀴 같은 삶인 거 같아? 좋아. 잘 버티고 있어.”
“조세핀치고는 괜찮은 말이네요…….”
엘리바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하자 조세핀이 씩 웃었다.
“칭찬할 거면 더 해.”
❖ ❖ ❖
고비를 하나 넘기자 사부들과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마음가짐도 완전히 새로워졌다.
도아는 엄마에 대해서도 세 사람에게 털어놓았다.
세 사람은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라크샤샤가 도아의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눈은 ‘아주르 나자크’라고 불리는 특이한 눈이니, 계보를 찾다 보면 가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래요?”
“그래, 위대한 세 가문이 아주르 나자크라고 불리는 눈을 가지고 있다만……. 시간 선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니 알 수가 없구나.”
라크샤샤의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어쩌면 엄마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힘이 났다.
그렇게 계속 훈련은 이어졌다.
도아에게는 이제 단순한 훈련이 아니었다.
조세핀에게, 라크샤샤에게, 엘리바스에게.
그들이 평생 갈고 닦아온 기예를 배우는 건 그저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인생 역시 같이 받는 거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세핀이 그 이야기를 듣고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내 검술은 내가 죽으면서 끝났거든. 여기 와서 열심히 연구했지만 역시 가르쳐서 이어지게 하지 않으면 소용없잖아? 도아가 배워서 나도 좋아.”
엘리바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에게서 요리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대체 대마법사에게 누가 요리를 배우냐.”
조세핀이 옆에서 투덜거렸다.
라크샤샤는 생전에도 제자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도아는 셋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거웠다.
모험담은 무궁무진했고, 심지어 당사자가 직접 해 주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면서 각자 살았던 연대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엄마의 영웅담으로 추측해 보면, 조세핀은 1200년, 엘리바스는 600년, 라크샤샤는 300년 전 사람이다.
‘엄청난 갭…….’
하지만 또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1200년이나 검술을 갈고 닦은 사람은 어떻게 이기겠는가?
겸허하게 배우면 그만이지.
엘리바스는 요리와 동시에 틈틈이 마법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도아는 마법까지 배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법을 사용하려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는데 그 언어를 발음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틈틈이 공부로 기초 정도는 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크샤샤가 말했다.
“이제 슬슬 졸업시험을 치러도 되겠구나.”
도아는 깜짝 놀라 라크샤샤를 바라보았다.
라크샤샤가 미소 지었다.
“자, 졸업시험 내용은 신약 개발이다. 그동안 배운 걸 토대로 해서 새로운 약을 개발해 봐라. 기간은 성공할 때까지로 해 두마.”
졸업시험을 치른다는 말에 깜짝 놀랐지만,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라크샤샤는 논문을 감수하는 교수님처럼 굴었다.
“이런 약을 만들겠다고? 이미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쓸모가 있기는 한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이 약은 방향성이 안 맞는 거 같은데.”
몇 번이나 거절당하고서야 도아가 [흉터치료제]를 내놨고, 라크샤샤는 “흠…….” 하고 못마땅한 듯하며 허락했다.
이후로 도아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신약 연구에 몰두했다.
엘리바스는 작업실로 특식을 해서 날라주었다.
조세핀은 훈련은 그만둘 수 없지만, 강도를 줄여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대강 2년 정도 후에 약을 만들어냈고,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그러자마자 엘리바스가 또 졸업시험을 냈지만.
졸업시험은 ‘극한 상황에서 맛있는 요리하기’였다.
라크샤샤는 “너무 봐준다.” 하고 혀를 찼다. 이것도 통과하는 데에는 3개월쯤 걸렸다.
이쯤 되니 도아는 슬슬 조세핀의 졸업시험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엇을 시킬 것인가?
도아는 마지막까지 검술훈련에 최선을 다했다.
말이 검술훈련이지 사실 조세핀은 도아에게 다양한 무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맨손 박투부터 시작해서, 사슬낫까지 어지간한 무기는 다 다룰 수 있게 했다.
“무기를 제대로 조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조세핀의 입버릇이었다.
특히 조세핀은 사슬낫을 예술적으로 잘 다뤘다.
허공을 가르는 낫이 조세핀의 세 번째 팔인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제자인 도아도 열심히 했지만, 사슬낫은 난도가 너무 높았다.
도아가 가장 잘 다루는 건 한 손 검과 소형방패였다.
건실한 조합이다.
양손 검 역시 비슷한 수준으로 다룰 수 있었다.
활도 그럭저럭 쏘고.
그다음이 사슬낫일까?
‘이러다가 졸업 못 하는 거 아냐?’
도아가 걱정하며 앉아 있는데 조세핀이 말했다.
“내일 졸업시험 볼게.”
도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조세핀이 지는 해를 반쯤 등지고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불길할 정도로 환하게 빛난다.
“한 번에 통과하자. 응?”
“무, 무슨 시험인데요?”
도아의 말에 조세핀이 빙긋 웃었다.
“그건 내일의 비밀로 남겨 둘게.”
❖ ❖ ❖
명상.
검술의 기본.
명상이 어째서 검술이 기본이냐?
평온한 마음 유지뿐 아니라 이세계에는 마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명상과 호흡을 통해서 도아는 몸에 마나를 차곡차곡 쌓았다.
마나는 조금씩 조금씩 뼈에, 혈관에, 근육에, 피부에 쌓인다.
그렇게 세포를 마나로 가득 채우며 움직이면 천천히 마나관(mana vein)이 생성된다.
모세혈관이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아주 가는 마나관이 세포에 마나를 공급한다.
마나를 빠르게 회전시키면 시킬수록 가벼워져서 세포에 마나 공급이 원활해진다. 분당 회전수를 높일수록 마나 운용이 수월했다.
고출력을 견디기 위해서는 튼튼한 마나관이 필요하다.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고 계속해서 마나를 쌓으면 마나관은 점점 더 굵어진다.
심장을 둘러싸고 마나 코어까지 생기면 드디어 마나 사용자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마나가 바로, 보통 사람이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존재였다.
물론, 이것도 재능이다.
사람마다 마나가 쌓이는 속도도, 마나관이 만들어지는 속도도 다 다르다고 했다.
“도아는 평범한 편이지.”
조세핀의 평가는 냉정했다.
그녀가 하하 웃고 말했다.
“대신 남들보다 시간이 기니까. 결국은 꾸준한 게 최고야.”
그 말을 지침 삼아 도아는 게으름피우지 않고 열심히 호흡했다.
조세핀은 평소에 움직일 때도 조금씩 마나를 채우는 호흡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
“전쟁 중에는 멍때리고 명상하고 있을 수 없으니까. 그때를 노려서 꼭 암살자가 오거든. 그러다가 뒈진 기사들이 진짜 많아.”
조세핀이 히죽 웃었다.
“내가 삼백 년간 연구한 거야. 도아에게 전수하지.”
도아는 덕분에 평소에도 조금씩 마나를 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집중해서 명상한다.
도아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마지막 호흡을 내뱉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들어 올리자 세상이 명징하게 보였다.
깊은 명상에서 빠져나오면 모든 게 새롭고 아름다웠다.
잠시 멍하니 숲을 보고 있으니 엘리바스가 불렀다.
“도아야, 밥 먹어야지.”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나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돌아보니 집 포치(porch)에서 엘리바스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갈게요!”
도아는 얼른 집으로 달려갔다.
거실에는 이미 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맛있겠다.”
도아는 돕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괜찮아. 오늘은 중요한 날이잖아. 쉬어.”
엘리바스가 부드럽게 거절했다.
아침은 제철 채소와 고기가 듬뿍 들어간 수프였다.
엘리바스가 씩 웃었다.
“아침은 속이 편할 만한 걸로 했어. 졸업시험 끝내고 돌아오면 그때는 잔뜩 차려줄게.”
이미 앉아 있는 조세핀이 웃으며 도아의 의자를 빼 주었다.
“여기.”
엘리바스가 도아 앞에 그릇을 내려놓았다. 채소 수프는 따로 육수를 낸 것이다.
살짝 한입 떠서 맛을 보니 온갖 응축된 맛이 입 안에서 춤을 춘다.
“진짜 맛있어요.”
도아는 다시 감탄했다.
맛있는 건 계속 먹어도 맛있었다.
“한 백 년째 먹는 거 같은데도 맛있네요.”
조세핀이 히죽 웃었다.
“적당히 먹어 둬. 나중에 다 토하게 되지 않으려면.”
오늘은 조세핀과 졸업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그녀와 훈련하며 먹은 걸 다 토한 경험이 여럿인지라 도아는 눈을 찌푸렸다.
“으……. 조세핀은 뭘 시키려고 그래요?”
조세핀이 헛기침을 하고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야, 당연히 스승인 나를 꺾는 거지.”
그 말에 엘리바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널? 도아가? 왜? 졸업 안 시키려고?”
“무슨 말이야. 졸업할 때가 됐으니까 시험을 치르는 거지. 그렇지, 도아야?”
조세핀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손속도 날카로워서 도아는 몇 번이나 그녀에게 죽었다.
그때마다 엘리바스는,
“아니, 때려눕히면 되지! 왜 죽이는 거야? 네 몫의 저녁은 없어.”
하고 화를 냈다.
도아는 ‘때려눕히는 건 괜찮은 건가?’ 싶긴 했지만 죽었다가 깨는 게 불편하긴 했다.
그럴 때마다 조세핀은 그에게 절절매곤 했다.
나중에 조세핀이 도아에게 속삭였다.
“도아야, 맛있는 거 만들어 주는 사람이 진짜 강자야. 절대로 이길 수 없거든.”
엘리바스 들으라는 속삭임이어서, 엘리바스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당연하지. 요리만이 유일하게 타인이 채워줄 수 있는 기본욕구니까. 식사는 생명을 나누는 행위야.”
도아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욕, 수면욕, 배설욕.
살기 위한 3가지 욕구 중에서 식욕만이 남이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욕구가 맞다.
“그러니까 도아는 걱정 안 해도 돼. 도아의 요리를 먹으면, 다들 도아의 포로가 될 테니까.”
엘리바스가 웃으며 말했다.
조세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맞아. 나를 봐.”
엘리바스는 그럴 때마다 조세핀의 발을 밟곤 했지만, 조세핀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면 엘리바스가 더 화를 낼 테니 아픈 척을 하곤 했다.
도아가 조세핀에게 그가 다정한 게 좋다고 속삭이자 조세핀이 미친 듯이 웃은 적 있었다.
“하, 네 앞에서는 내숭이지.”
그런 말을 해도, 어쨌든 도아에게는 다정한 엘리바스였다.
그의 수업 시간도 늘 즐거웠다.
맛있는 걸 만들고 나눠 먹는 시간이 즐겁지 않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것보다 더 즐거운 거 같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약초학 사부인 라크샤샤가 나왔다.
로브를 걸치고 나온 라크샤샤 싱긋 웃었다.
“조세핀의 시험 따위는 금방 통과할 거다. 내 시험도 통과했으니까.”
꿀처럼 달콤하고 우아한 목소리였다.
고양이족 특유의 가르릉 하는 목소리가 섞여서 더욱 그렇게 들렸다.
그러나 만만히 보면 안 된다.
라크샤샤는 셋 중에서 가장 혀가 날카로웠다.
약초학을 가르쳐 주면서 그녀는 가장 많은 지식을 도아에게 채워 넣었다.
그리고 돈에 대해서 무척 확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공짜로 사람을 치료해 주면 안 돼. 위폐나 가짜로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으면 혼쭐을 내 줘라.”
“그렇게 ‘돈, 돈’ 하니까 고양이족이 미움받는 거야.”
이런 식으로 거침없이 말하는 건 조세핀이다.
옆에서 수업을 듣던 조세핀이 그리 말하자 라크샤샤는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돈 때문에 살아남았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돈도, 검술도 그저 힘이야. 힘을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게 중요한 거지. 뭐, 이걸 모르니 네가 그렇게 뒈졌겠지만.”
"뭐야? 내가 뭐? 내가 어떻게 죽었는데? 뭐? 뭐?”
처음에는 이런 상황에 어쩔 줄 몰랐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도아는 수프를 마저 마셨다.
두 사람도 금방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서 식사를 시작했다.
엘리바스의 밥상 앞에서 화를 내봐야 나중에 후회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맛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