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 여행사 : S급 먹방대모험 패키지-4화 (37/100)

⊹ 4화 ⊹

훈련은 힘들지만, 세 사람은 도아를 살뜰하게 보살펴 주었다.

쳇바퀴 같은 삶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즐거웠다.

환경을 결정하는 요소의 대부분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도아는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해진다는 걸 여기 와서 알았다.

훈련이 힘들어서 우울해져도, 엘리바스가 차린 마법 같은 음식을 먹으면 행복해졌다.

아픔이 꼭 수치과 분노를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도 조세핀을 통해서 알았다.

그녀의 훈련은 고통스러웠지만, 조세핀이 무섭지는 않았다.

사실 도아를 가장 많이 끌어안고, ‘귀엽네, 사랑스럽네’ 소리를 하며 뽀뽀를 하는 건 조세핀이었다.

백 년쯤 그 소리를 들으니 이제 도아는 자기가 진짜 진짜 귀엽고 사랑스러운 거 같았다.

‘뭐 어때? 아니라고 생각되면 조세핀에게 따져.’

도아는 이제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뻔뻔히 굴 수도 있었다.

라크샤샤는 그날 이후로도 도아가 힘들어할 때마다 자신을 쓰다듬거나 안게 해 줬는데 또 그게 최고였다.

동그란 뒤통수와 말랑말랑한 귀를 만지고 그 털에 얼굴을 푹 박으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솔직히 도아는 마음속으로

엘리바스, 엄마.

조세핀, 아빠.

라크샤샤, 할머니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엄마와 할머니의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오늘이 마지막.

조세핀의 시험이다.

‘어떻게 사부를 이겨.’

도아는 그러며 힐끗 조세핀을 보았지만, 조세핀은 싱글싱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냐, 나도 열심히 했잖아.’

도아는 전투적으로 식사를 했고, 도아가 먹는 모습을 엘리바스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엘리바스가 그런 도아의 머리에 살짝 손을 얹었다가 떼었다.

“마나도 이 정도면 많이 쌓였는걸? 게다가 이곳의 마나는 정순하니 마나관 품질도 좋고. 마나코어도 튼튼하네.”

“우리 셋의 제자인걸. S급이 되어 주지 않으면 곤란해.”

조세핀이 히죽 웃었다.

검술만큼 중요한 게 바로 몸에 마나를 쌓는 일이었다.

렌시아는 마나로 가득해서, 그냥 숨만 쉬어도 어느 정도 몸에 마나가 쌓인다고 했다.

조세핀의 말에 의하면 평범한 70세 노인도 한 손으로 사과 부수기가 가능하다나.

‘하긴, 그런 세계가 아니면 던전을 깨거나 마수랑 싸우기 힘들겠지.’

도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 괴물이랑 싸우는 사람들도 규격 외고 말이야.’

도아도 이제 맨손으로 강철 구부리기가 가능했다.

굉장히 신기해서 그 뒤로 자꾸만 스푼이랑 포크를 구부려서 엘리바스에게 혼났던 기억이 있었다.

조세핀이 고개를 저었다.

“꼭 나를 이겨야 한다는 건 아냐. 하지만 이기겠다는 투지조차 없으면 곤란해. 난 네가 졸업시험을 통과할 만큼 됐는지 보고 싶은 거니까.”

그녀의 표정과 어조는 진지했다.

엘리바스도 첨언하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들었다.

도아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도아가 수프를 전부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조세핀이 말했다.

“한 시간 후에 시험 시작이야.”

도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식사가 끝나고 도아는 자리에 앉았지만 제대로 된 명상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자꾸만 조세핀에게 죽는 광경만 떠올랐다.

‘안 돼. 이런 식으로는 못 이겨.’

도아는 어떻게든 그녀를 이기는 상상을 하려 애썼다.

‘그냥은 이길 수 없어.’

살을 내주고 뼈를 치는 게 아니라 뼈를 내주고 살도 베이는 게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도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전투준비를 했다.

훈련은 늘 실전형이었기 때문에 목검 같은 건 쓰지 않았다.

무기를 챙기고, 보조도구들을 챙긴다.

준비를 모두 끝내고서 도아는 연무장으로 나갔다.

집 뒤편에 있는 넓은 연무장은 부서져도 버튼 하나를 누르면 다시 원상 복귀되곤 했다.

게다가 지형지물도 마음대로 설정할 수 있어서 여기서 정말―

‘많이 죽었지.’

도아는 허허 웃었다.

오늘도 여기저기 네모난 지형지물이 설치되어 있다.

“왔어?”

이미 나와 있던 조세핀이 씩 웃었다.

그녀의 등에는 검이, 손에는 사슬낫이 들려 있었다.

붕붕

사슬을 돌리며 조세핀이 턱을 까닥했다.

“시작하지?”

도아는 후 하고 숨을 내쉬고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작할게요.”

쿵!

조세핀이 발을 한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도아는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어설프게 방어하거나 피하는 것보다는 같이 공격을 해서 상대의 방향을 트는 게 낫다는 걸 몸으로 익혔다.

캉캉!

몇 번이나 파열음이 나며 공방이 이어졌다.

조세핀의 마나 속성은 바람이다.

초록빛을 띤 마나가 사슬낫을 감싸고 움직였다.

마나관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마나는 흩어진다.

자연적으로 돌아가려는 형질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몸 밖으로 마나를 발현하려면 엄청난 양의 마나를 소모해야 했고 동시에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도아는 아직 저렇게 자유자재로 마나를 다룰 수는 없었다.

“으아아!”

저절로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사슬낫을 세 번째 팔처럼 휘두르고 다가가면 단검으로 공격하고…….

인간이 아니라 거대한 마수와 싸우는 것 같았다.

공방은 길게 이어졌다.

조세핀의 보랏빛 눈동자가 밝게 빛나며 희열이 돈다.

‘웃기는!’

도아는 조세핀의 여유에 억울한 마음이 조금 올라왔다.

마나관을 타고 마나가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마나 코어를 있는 힘껏 쥐어짰다. 심장 박동 수가 쿵쿵 뛰어오른다.

한 톨 남기지 않고 전부 쥐어짜며 맞부딪친다.

검과 낫이 부딪치고, 방패로 퉁겨낸다.

둘은 아주 가까워졌다가, 엄청나게 멀어지기도 했다.

하도 같이 훈련을 하다 보니 이제 서로의 패턴을 훤히 알아서 손발의 합이 맞아 들어간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체력이 상당히 늘었는데도 시간이 지나니 고갈이 심했다. 이십여 분이나 집중상태를 유지하며 생사의 선택을 계속하다 보니 정신력도 깎여 나간다.

인간이 원래 이렇게 긴 전투를 위해서 설계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나만 힘든 건 아닐 거야. 아니겠지?’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놀리는 것도,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폭발시키는 것도 즐겁다.

즐겁지만, 이게 먹혀야 더 즐거울 거 아닌가?

‘빈틈이 없다면 만들어야지.’

도아는 일부러 발디딤을 실수한 척했다. 조세핀이 사정없이 틈을 파고든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렇다면 이쪽은 이거다!’

연막탄이 터짐과 동시에 완전히 시야가 흐려졌다.

도아가 치고 들어가 역시 사정없이 검을 휘둘렀다.

‘벴다!’

손맛이 있었다.

조세핀의 팔이 바닥에 떨어졌다.

도아는 순간 속이 쓰려서 멈칫했고, 한쪽 팔을 잃은 채로 조세핀이 반격했다.

사각은 조세핀만 있는 게 아니었다.

사슬낫이 돌아오며 등 뒤에서 도아의 가슴을 꿰뚫었다.

“컥―!”

흐릿해지는 시야에 조세핀이 쓴웃음을 짓는 게 보였다.

도아는 마지막까지 검을 휘두르려 애썼다.

‘지금……!’

도아가 검을 휘두르고 조세핀이 놀란 얼굴을 했다.

검날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도아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익숙한 방의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끙.”

신음을 내며 몸을 일으켜 저도 모르게 먼저 옷깃을 당겨 가슴을 살폈다.

상처는 깨끗하게 나아 있었다.

‘나 졌나……?’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죽었다가 깨어나면 이 멍함이 지속되는 게 싫었다.

천천히 멍한 상태가 사라지는 걸 기다렸다가 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졌나 봐…….’

어쩐지 시무룩해져서 도아는 머뭇머뭇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엘리바스가 내려오는 도아를 보고 미소 지었다.

“도아, 고생했어요.”

“진 거 같아요…….”

솔직히 말하자 엘리바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따뜻한, 언제나처럼 도아의 마음을 감싸주는 웃음소리였다.

“누구도 천년은 된 그 괴물을 이길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뱉은 말은 신랄하다.

“누가 괴물이야, 누가?”

뒤에서 조세핀이 눈에 불을 켜며 나왔다.

“조세핀…….”

도아의 목소리에 힘이 없자, 조세핀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왜 그래? 기뻐해도 좋아. 내 팔을 날려 버렸잖아?”

“졌잖아요.”

“망설여서 진 거지. 어이구. 나한테 몇 번이나 죽었으면서 내 팔 하나 날렸다고 거기서 멈칫해? 하지만 마지막은 훌륭했어.”

조세핀이 제 목을 가리켰다.

“봐.”

도아는 그녀 목에 감긴 붕대를 보았다. 조세핀이 후후 웃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나도 그 자리에서 즉사였어. 라크샤샤가 있어서 다행이야, 다행. 잘했어.”

도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말투에서 이제 어리광이 묻어난다.

“그래도…….”

“이거 봐라? 고작 백 년 수련한 꼬맹이가 바라는 게 많네?”

“백 년이나 수련했는데…….”

웅얼거리자 조세핀이 “요게? 요게? 요 귀여운 것이?” 하고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잠깐, 조세핀, 숨 막혀요.”

“이 정도면 통과야, 통과. 아니면 한 오백 년쯤 더 수련할래?”

“그건 사양할게요…….”

“그럼 만족해.”

조세핀이 미소 지으며 도아를 놓아주었다.

“이제 모든 졸업시험이 끝났어.”

도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이제 떠날 순간이 다가왔다.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는 도아를 보고 조세핀이 “어휴, 귀여운 못난이.” 하고 놀리는데 엘리바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야기 다 끝났으면 얼른 와요. 음식 다 식겠어요.”

도아가 놀라 그를 바라보자 엘리바스가 후후 웃었다.

“졸업시험 통과 기념으로 좋아하는 것만 잔뜩 차렸답니다. 아까 약속했잖아요.”

거실로 나가니 테이블 위에 도아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라크샤샤도 미소 지었다.

“어서 와라, 털 없는 꼬맹아.”

“인간은 다 털 없어.”

“툴레는 언제나 인간의 그 점을 안타깝게 여긴단다.”

라크샤샤가 자리를 권했다.

음식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맛있었다.

넷은 웃고 떠들고 먹고 마셨다.

엘리바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도아는 가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맞아, 이 조세핀에게 한 방 먹인 사람은 처음이야.”

“훌륭했어.”

라크샤샤도 칭찬해 주어서 도아는 에헤헤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웃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놀란 조세핀이 “도아야?” 하고 물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몸을 감쌌다.

태연하고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나, 나아, 잘 할 수 있을까요……?”

아주 작게 말했지만, 셋 모두 아주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의 소유자였다.

조세핀이 웃었다.

“잘할 수 있어. 걱정하지 마. 도아가 이렇게 귀여운걸?”

“맞아.”

엘리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아는 조세핀의 품에서 실컷 울었다. 엘리바스가 다가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라크샤샤가 “이런, 이런.” 하고 웃는 소리가 났다.

졸업의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 ❖ ❖

다음 날 조세핀이 뭉그적거리는 도아의 엉덩이를 찰싹 때려서 도아를 일어나게 했다.

포치에는 예전에 본 적 없는 마법진이 생겨나서 빛나고 있었다.

세 사람이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행동해서 도아도 평온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간밤에 너무 많이 먹어서 아침을 먹기 거북스러울 정도였다.

우유를 넣은 차와 가벼운 비스킷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엘리바스의 차도 마지막이겠지.”

“차 끓이는 법은 확실히 전수했잖아.”

차를 다 마시고 나서는 포치에 나가서 커피를 한다.

라크샤샤가 습관처럼 커피를 달고 살아서 도아도 저절로 배우게 되었다.

‘모닝커피가 들어가야 힘이 나지 않아?’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차도 좋지만 어쨌든 직방인 카페인이 필요했다.

라크샤샤의 털에서는 커피 향이 날 때가 많았고, 그녀의 작업실도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라크샤샤는 직접 커피 태우는 법을 알려주었고, 도아도 옆에서 따라 했다.

“몸에 해롭지는 않아. 그냥 카페인의 중독성이 좀 있을 뿐이지.”

라크샤샤는 그렇게 말했다.

“그 카페인이 문제 아닌가요.”

엘리바스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현대 한국인들이 카페인을 밤낮으로 달고 산다는 걸 알면, 이세계 사람들은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조세핀이 마지막으로 이런저런 주의를 잔뜩 줬다.

“던전 입구에 들어가서 방심하지 마. 알았어? 너 정도면 어디 가서 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방심이 큰 문제야. 그리고 여럿이서 전투할 때는―”

엘리바스도 주의를 줬다.

“자기 전에 이 꼭 닦고, 배 내놓고 자면 안 돼요. 이거 내가 도시락 싼 거니까 가지고 가렴. 그리고 여름에는 음식이 잘 상하니까, 요리하고 남겨둘 때는―”

라크샤샤가 기가 차서 말했다.

“얘가 애도 아니고. 둘 다 적당히 해라.”

조세핀과 엘리바스가 “그래도.”, “하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려서 도아는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데 어쩐지 눈물이 고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도아에게 라크샤샤가 웃으며 말했다.

“자, 이건 내 구급약 세트다. 그만 울렴. 여행이 기대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그, 그래도…….”

엘리바스가 밀크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속삭였다.

“어딜 가든 넌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제자란다.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조세핀은 씩 웃고 그녀를 있는 힘껏 안아 주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안아 준 후에 품에서 귀여운 머리띠를 꺼냈다.

“자, 선물.”

도아의 머리에 조세핀이 머리띠를 씌워 주었다.

“어지간한 투구보다 방어력이 높은 아이템이야. 역시나 잘 어울리네. 우리 셋이서 만든 거야.”

빨간색 머리띠는 가운데에 리본이 마치 토끼 귀처럼 쫑긋 서 있는 디자인이었다.

만져보니 벨벳처럼 도톰하고 부드러웠다.

“라크샤샤의 털로 짜서, 내가 염색하고, 엘리바스가 마법을 새긴 거야.”

도아는 “고마워요.” 하고 작게 말했다.

“이제 가야지.”

웃으며 하는 말에, 도아는 웃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 모르게 짧게 웃고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세 사람이 손을 흔든다.

마법진이 빛나고 모든 게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