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거참.”
얀은 피식피식 웃었다.
그랑을 이끄는 건 모두 셋.
시장, 평의회, 모험가 길드장이다.
최근에는 시장과 평의회에게 밀려서 피곤하기 짝이 없었는데, 양쪽에서 그에게 이렇게나 부탁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도아 양에게 무척 감사해야겠군.’
얀은 편지를 툭 나무쟁반 위에 던졌다.
쟁반 위에는 편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도아에게 보내는 팬레터들도 벌써 가득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랑은 일곱 왕국에 있는 도시 중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았기에 이런 것들이 무척 활발했다.
거리에서 사슴족 음유시인들이 현을 퉁기며 도아의 업적을 노래했다.
도아가 본드래곤을 쓰러트렸다는 사실은 이미 모두에게 크게 알려졌다.
진짜로 눈으로 본 것처럼 도아의 사투를 노래하는 음유시인 앞으로 동전이 분수처럼 쏟아졌다.
음유시인 중에서는 어떻게든 도아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자택 담을 넘으려다가 쿠낙에게 걸려서 쫓겨난 사람도 있었다.
물론 그런 도아를 시기하는 치들도 생겨났다.
특히 같은 모험가들 사이에서 더 했다.
“아니, B급이 어떻게 A급 던전을 공략해? 말도 안 되지.”
“던전 코어 크기가 오류난 거 아냐? 그런 경우가 종종 있잖아.”
“남대륙에서 넘어왔다는 것도 거짓말일 거야. 어디 뒷골목에서 구르다가 온 거 아닐까?”
“사기꾼일 가능성도 높지.”
“눈동자 색도 무슨 마법을 쓴 건 아닌지 마법사 링에 감정의뢰를 해야 해.”
“아니면 누가 도와준 거 아냐? S급이랑 가깝다며?”
찬사와 악담이 동시에 넘쳐났다.
어쨌든 화제는 엄청난 화제였다.
물론, 이야기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잠깐, 그럼 혼자서 A급 던전을 공략한 거지?”
“그렇다니까, 이 사람이.”
“그럼 대체 얼마를 번 거야?”
“어……. 보자…….”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도아가 번 돈을 계산해 보았다.
그리고 한 신문사에서 그 특종을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동굴형 던전인 점과 주요 아이템이 뭐가 얼마나 나왔는지, 단독으로 보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에 대략 계산까지 해서 땅땅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 화제의 주인공 역시 입을 떡 벌리고 명세서를 받아들었다.
“큰 금화 이천 개요??”
얀이 헛기침을 했다.
“조금 낮게 책정된 감도 없지 않습니다만, A급 던전이 공략되면 물량이 한 번에 풀리거든요. 그리고 경매에 올라간 물건들이 따로 팔리면 아마 금액이 더 올라갈 겁니다.”
큰 금화 이천 개.
큰 금화 하나가 대략 500만 원꼴이니까.
“백억이네?”
“네?”
얀이 되물어서 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백억.
백억이다.
그녀의 손에 백억이 데구르르 굴러들어 왔다.
그것도 낮게 책정된 금액이라고 한다.
경매를 하면 금액이 더 오른다고.
‘와…….’
도아는 눈을 껌벅였다.
왜 그렇게 모험가 용품이 비싼지 알겠다.
던전 아이템이 이렇게 비싸게 팔리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벌려면, 그만큼 능력이 필요했다.
‘음……. 그럼 보통 4명이 파티를 이루니까. A급 던전을 한 파티가 공략하면 인당 큰 금화 500개가 떨어지는구나.’
사실 A급 중에서도 넷이서 A급 던전을 공략하는 팀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보통 8명부터 공략을 시작하지만 도아는 그 정보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럼 얼마야?’
25억.
그럼 1억짜리 소모품 텐트 살 만하네.
도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명세표를 빤히 바라보았다.
게다가 여기 물가가 10분의 1 수준이라고 이야기했나?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체감상 0이 하나 더 붙은…….
‘미쳤다. 미쳤다.’
얀이 걱정스럽게 그런 도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도아 양, 몸은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좀 더 쉬시는 게 어떠신지…….”
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팔다리가 잘려 나가거나, 내장이 녹아내린 것도 아니다.
회복통도 첫 날만 그렇게 심했지, 둘째 날은 괜찮았다.
명상을 하고 나니 몸 상태는 더욱 좋아졌다.
결국 베리의 성화에 누워 있었던 시간까지 합치면 나흘간 침대에 누워 있었던 셈이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하디만, 됴아 님…….”
베리의 글썽이는 눈동자 때문에 침대를 벗어나서도 격한 훈련 대신 스트레칭과 가벼운 수련 정도로 나머지 시간을 보냈다.
이제 몸이 상쾌하다 못해 굳기 시작한 거 같았다.
그런데 베리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얀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몇 번이나 괜찮은지 되묻는다.
도아가 의아해져서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은데……. 보통 안 괜찮나요?”
다들 쉬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하니,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도아의 물음에 얀이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능숙한 A급 모험가라도 A급 던전 공략은 일 년에 한 번 정도가 한계일 겁니다. 일단 공략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회복통에서 회복하는 데에도 오래 걸리니까요.”
“그래요…….”
도아는 만약 오두막이 없었으면, 댄버스 부인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보았다.
‘아니, 공략 못 했을 거야.’
아무리 도아가 철인이라도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다행히도 해왕이가 있어 줬지만, 그래도 쪽잠을 자면서 경계했어야 할 터였다.
마음껏 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 오두막만 있으면, S급들 데리고 S급 던전 공략할 수 있는 거 아냐?’
도아는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보스몹이 본드래곤인 점도 사실 플러스 점수였지.’
일반적 드래곤보다 등급이 낮다고 해도 드래곤이라는 점에서 무릎이 꺾였을 터였다.
하지만 도아에게는 그 점이 오히려 유리한 점으로 작용했다.
‘세계수 가지가 있으니까.’
일반 마수들이야 세계수 가지를 휘두르면 단계가 두 단계 하락하는 정도로 끝난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다르다.
오염이 정화되면 그들은 안식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 그녀도 세계수 가지가 있어서 공략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지 멀쩡하게 공략을 끝낸 건 끝낸 거고, 단독 성공은 성공이다.
세계수 가지도 그녀의 아이템인 걸 어쩌겠는가?
‘아, 제 템이 쩔어 주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어쨌든 그녀의 힘과 능력으로 당당히 번 돈이다.
‘백억. 와, 미쳤다. 백억이래, 백억.’
도아는 흐뭇하게 웃으며 명세표를 바라보았다.
자꾸만 얼굴 근육이 풀리고 웃음이 슬슬 흘러나왔다.
“큰 금화 2000개라니, 꿈같아요. 이렇게 많은 돈을 벌지는 몰랐는데요.”
“일단 금화는 도아 양의 카드에 넣어 두었습니다. 현물로 빼기 원하시면 카드를 지참해서 길드은행으로 가주세요.”
“카드가 그런 역할도 하는군요.”
“네, 그랑에서는 굳이 금화로 들고 다니지 않으시고 카드로 결제하셔도 됩니다.”
“하긴, 금화는 무거우니까요.”
“하하, 그렇죠.”
얀이 그런 도아 앞에 바구니를 올려놓았다.
“이건 뭔가요?”
“도아 양에게 온 팬레터입니다.”
“팬레터요?!”
“네, 도아는 지금 그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시장과 평의원들에게도 만나자는 초대장이 잔뜩 와 있습니다.”
도아는 다시 한번 물었다.
“세상에……. 팬레터요?”
“네.”
도아는 슬그머니 하나를 꺼내어 열어보았다.
‘헉.’
낯 뜨거울 정도로 열렬한 문장이 정말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이거 다른 사람도 받나요?”
“예, 네임드 모험가들은 거의 받습니다. 다들 렌시아 대륙을 돌아다니는 중이라 거취를 모르니 보통 모험가 길드로 보내거든요.”
“어……. 이거 답장해 줘야 하는 건가요?”
“도아 양이 내키면요.”
“이게 다 팬레터라고요?”
“이것도 일부고 앞으로 더 밀려들어 올 겁니다.”
도아가 히죽 웃었다.
“그럼 저 네임드가 된 거 맞나요?”
“맞습니다.”
“얀의 작전이 성공했네요.”
얀이 고개를 저었다.
“성공하신 도아 양이 굉장하신 거지요. 모험가 길드에서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우셨으니까요.”
“에헤헤.”
멋쩍게 도아가 웃고 명세표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이제 여행자금은 충분하네요.”
“네, 도아 양.”
얀이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빨리 그랑을 떠나고 싶어 지실지도 모릅니다.”
“네? 왜요?”
“도아 양, 정말로 유명해지셨으니까요.”
상당히 시달릴 것, 하고 얀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며칠 뒤에야 도아는 그 의미심장한 미소의 정체를 알았다.
유명세.
도아는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야 명성은 높아지겠다고 여겼다.
B급 모험가의 A급 던전 단독 공략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세웠고, 본업에서 특출나다는 걸 증명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건 아니잖아!’
“도아 님, 아직 파티가 없으시죠? 저희와 함께 파티를 짜는 건 어떠세요?”
“아주르 나자크로서의 인생은 어떠신가요? 꼭 저희 신문사에서 인터뷰 요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남대륙의 새로운 소식은 없나요? 렌시아 대륙의 발전을 위해서 새로운 소식을 공유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던전 보스몹이 본드래곤이라고 들었는데요! 어떻게 공략하셨나요!”
“도아 님!”
“잠시만요!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지금 잘난 척하시는 건가요?!”
‘아니, 진짜!’
도아가 휙 돌아서서 쫓아오는 사람들 무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노려보는 건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멈춘 틈을 타서 그녀를 둘러싼다.
“와, 진짜 아주르 나자크야!”
“만지면 정화되나?”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는 너무 잘 들린다.
이제 슬슬 인성 파탄이라고 욕을 먹어도 되지 않을까?
소리 한 번 칠까?
근데 친다고 얘네들이 쫓아질까?
도아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주춤거리며 사람들이 물러난다.
도아의 얼굴은 반대로 단숨에 환해졌다.
“쿠낙!”
돌아보니 마검을 보란 듯 품에 안은 쿠낙이 서 있었다.
“도아 양, 마중 나왔습니다.”
쿠낙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죄송하지만 도아 양은 저에게 양보해 주시지요.”
마검을 안은 그에게 접근할 사람도, 말을 걸 사람도 없었다.
도아는 동아줄을 붙잡듯 냉큼 쿠낙의 옆에 붙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쿠낙의 목소리는 일정하고 다정해서, 오히려 좀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구석이 있었다.
도아가 그의 곁에 바싹 붙어서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말했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 미친 거 아녀요? 쿠낙이랑 로베른에게는 안 이러잖아요??”
“도아 양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없으니까요. 다들 몸이 달아 있지요.”
그가 이어 말했다.
“얀에게 들으니, 시장과 평의회에서도 초대장이 왔다면서요.”
“설마 가야 하는 걸까요?”
도아가 웅얼거렸다.
“도아 양에게 달렸지요.”
도아가 물었다.
“쿠낙은 S급 됐을 때 어땠어요? 이랬어요?”
“비슷했습니다.”
“하.”
마검 소유자인 쿠낙에게도 그랬다면, 그녀에게는 더 하면 더하겠지.
“로베른은요?”
“그는 즐기는 쪽이죠.”
“아.”
확실히.
로베른은 이런 상황을 무척이나 즐길 거 같았다.
모험가 길드에 들어서니 시선이 쏟아졌다.
‘와.’
“위대한 B급이 납셨군.”
언제 왔는지, 로베른이 위풍당당하게 걸어오며 말했다.
저 망토 자락은 절대로 더러워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마법이 걸려 있는 게 틀림없다.
“짐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되어 기쁘네.”
“어, 잘 봐줘서 고마워.”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명성은 충분히 얻은 거 같은데. 그다음은 역시 마검 물리치기인가?”
노골적인 도발 어조였지만, 쿠낙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런 거에 일일이 반응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일단 정보 길드에 정보 수집을 부탁하려고.”
도아의 말에 쿠낙이 덧붙였다.
“얀에게도 말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모험가를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도 상당하니까요.”
“그러네요. 고마워요. 그리고 마법사 링에 가 볼 생각이에요.”
그 순간 쿠낙과 로베른이 둘 다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마법사 링에? 꼭 가야 하나?”
“뭐, 도아 양의 목적을 생각하면 가기는 해야겠지만……. 마지막으로 미루면 안 될까요?”
둘의 반응에 도아는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왜요? 멀리 있어요?”
“그건 아닙니다. 그랑이랑 그렇게 멀지는 않지요. 그저 거기 링 리더가 제정신이 아닐 뿐입니다.”
“짐은 이제 그 자의 미친 짓거리가 지겨운데.”
로베른이 중얼거려서 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폐하가 학을 뗄 정도면 어떤 사람인 거야?”
“오염이 골수까지 스며든 게 아닐까요?”
“엥? 그러면 큰일 난 거 아녀요? 근데 링 리더예요?”
“오염이 스며들지 않은 채로 미쳤으니, 차라리 스며들면 멀쩡해질 수도 있지.”
“아니, 말이 심하시네.”
“B급은 아까부터 짐에게만 점수가 짜지 않나?”
“폐하께 거는 기대치가 높아서 그런 게 아닐까요.”
도아가 웃으며 말하자 로베른이 쿠낙을 돌아보고 말했다.
“짐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군.”
“무척 기쁘시겠습니다.”
쿠낙이 매끄럽게 대답하고 도아에게 말했다.
“일단 그럼 정보 길드에 의뢰는 제가 넣겠습니다. 도아 양은 먼저 길드장님을 만나시죠.”
“고마워요!”
다시 길에서 그 사람들에게 시달리지 않을 걸 생각하니 기뻤다.
“짐도 한번 알아보지.”
로베른이 그렇게 말하고 슬쩍 도아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
도아가 놀라 그를 보자 그가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여간 유명해진 걸 축하하네, B급.”
도아는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고마워, 폐하.”
로베른은 손을 흔들고 사라졌고, 쿠낙도 떠났다. 혼자 남겨진 도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길드장실 앞에서도 호위에게 정중한 눈인사를 받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얀이 반짝반짝해진 얼굴로 도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