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또아니이임!”
베리가 그녀의 품에 안겨서 눈물콧물 쏟아내서 도아는 아하하 웃었다.
“미안, 미안. 또 늦었네. 아이고.”
도아가 베리의 눈물 젖은 얼굴을 닦아 주며 말했다.
“어떡하지? 응?”
“무, 무짜히…… 덜아와 듀셔서…….(무, 무사히 돌아와 주셔서…….)”
“어이구, 기특해라. 그래도 미안해.”
도아가 열심히 베리를 쓰다듬고 안고 뽀뽀해 주었다.
“끼잉, 끙.”
“응, 해왕이도 미안. 네가 필요했는데. 그래도 베리랑 네가 함께 있어 줘서 다행이야.”
베리를 혼자 놔둔 게 아니라는 점에는 안심이 되었다.
나쁜 보호자지만, 그래도 최악은 면한 느낌이랄까요.
해왕이 주둥이를 열심히 베리를 안고 있는 도아의 팔 사이로 밀어 넣어서 도아는 웃음을 터트리며 베리와 해왕이를 동시에 안았다.
‘끙.’
어젯밤 명상으로 어느 정도 치료되었어도 완쾌는 아니었다.
통증이 느껴져 눈을 찌푸리자, 베리가 그걸 귀신처럼 알아채고는 몸을 홱 뒤로 뺐다.
“또아 님, 다치뎠쪄여? 다, 다치셨―(도아 님, 다치셨어요? 다, 다치셨―)”
“조금, 하루 이틀 쉬면 괜찮아질 테지만…….”
도아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오늘 그냥 떠나려고.”
“오늘이요?”
“응, 더는 소동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게다가 마검이 공격해 왔으니, 쿠낙에 대한 여론도 좋지 않을 게 뻔했다.
쿠낙을 데리고 이 도시를 재빠르게 떠나는 게 최선일 듯하다.
도아의 말에 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떠여.”
“응.”
베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입 맞춰 주는 걸 즐겼다.
해왕이도 실컷 쓸어 주고서 도아는 해방되었다.
대충 씻고서 도아는 아침 명상을 했다.
베리는 빼꼼히 도아가 명상하는 걸 보고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도아 님 옷도 정리해 드리고, 신발도 솔질해 두고. 이따가 마실 차도 타 둬야지.’
베리가 그녀의 옷을 집어 들다가 깜짝 놀랐다.
까만색 범벅이다.
어제 도아가 토해 놓은 오염 찌꺼기였다.
‘도아 님!’
베리의 꼬리가 펑 부풀었다.
‘괜찮으신 걸까? 피 냄새도 조금 나는데……. 많이 다치신 건가? 명상하시는데 깨우면 안 되긴 하겠는데.’
저절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베리는 습관처럼 목에 걸린 정화석을 만져보았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도아가 맞춰 준 동그란 로켓 안에 정화석이 들어 있었다.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거 같았다.
똑똑
정중한 노크에 베리는 얼른 양손으로 얼굴 털을 문지르고 문가로 다가갔다.
“누구세여?”
“베리 군, 저 얀입니다.”
“띨드장님!”
베리는 얼른 끄응 하고 손을 뻗어서 문을 열었다.
“또아 님, 옷에, 피가 이케, 이케여!(도아 님, 옷에, 피가 이렇게, 이렇게나!)”
베리가 그녀의 옷을 마구 흔들어 보였다.
얀도 놀라서 그녀의 옷을 바라보았다. 어제 그녀가 콜록대며 오염을 토해 내던 게 생각났다.
그의 예상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은 걸까?
“도아 양은? 아직 쉬고 있습니까?”
“됴아 님은 아딕 명상 듕이세여.(도아 님은 아직 명상 중이세요.)”
“그렇군요.”
얀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구 뎌희 오눌 뜬대여.(그리고 저희 오늘 뜬대요.)”
“떠요?”
“그랑이여.”
베리의 말에 얀이 놀라 멈칫했다.
그의 버터 빛 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오늘 그랑을 떠난다고요?”
“녜.”
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얀은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잠시 옷을 보다가 안을 보았다가 허공을 보았다.
초조하게 발을 탁탁 구르던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라고 하지요.”
“녜, 띨드장님, 또아 님……. 갠찮으실까여?”
“명상을 하고 있다고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얀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고, 베리는 귀를 축 늘어트렸다.
“녜…….”
얀이 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여 주었다.
“그럼 명상이 끝나면 바로 드실 수 있게 차와 간단한 음식을 가져다 두라고 하겠습니다.”
그 말에 베리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잠시 후 도아가 눈을 뜨고 길게 숨을 내쉬었을 때, 베리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됴아 님, 차 듀실래여?(차 드실래요?)”
“엇? 고마워.”
도아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적당히 식어서 미지근해진 차가 오히려 기분 좋았다.
‘맛은 여전히 좋진 않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됴아 님…….”
베리가 우물우물하며 양손을 맞잡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응?”
“뎡말로 갠찮으세여?”
“괜찮아. 사실 어제는 좀 아팠거든. 그런데 오늘 명상 끝나고는 훨씬 나아졌어.”
“하, 하지만, 또아 님, 피, 피가아―”
다시 와앙 우는 베리를 보고 도아는 놀라 그를 안았다.
“피라니? 응?”
“오, 오, 옷에…….”
“아―”
도아가 미소 짓고 말했다.
“그건 몸에 들어온 오염을 토해낸 거야. 다 피가 아냐. 진짜 피는 그렇게 잉크처럼 까맣지 않지.”
“뎌, 뎡말여?”
“응, 뎡말, 뎡말.”
도아가 혀 짧은 말이 귀여워 돌려주며 말하자 베리가 눈을 깜박였다.
눈물 때문에 눈 주변 털이 엉망진창이다.
‘아이고.’
도아는 쓴웃음을 삼켰다.
‘베리를 데리고 가는 게 진짜 맞는 건가? 어디에 맡겨야 하는 거 아냐?’
하지만 두고 간다고 하면 또 엉엉 울 텐데.
‘끙……. 아, 맞다!’
도아는 속으로 무릎을 쳤다.
‘다음 목적지는 비에나리에고, 거기는 툴레가 많이 산다고 하니까. 고양이족 마을도 있겠지.’
베리도 동족들을 보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른다.
또 베리를 맡아 주겠다는 친절한 고양이족 부부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은가?
베리도 인간 사이에 있는 것보다는 툴레 사이에서 사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하겠지.
‘만약 그러면 여동생은 내가 찾아보겠다고 하자.’
정보 길드에 데이지에 대해 적어서 의뢰를 해 놨으니, 어쨌든 정보가 들어오면 그녀에게 건네질 터였다.
만약의 사태에 대한 시나리오는 세워 두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도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제 오염은 다 토해냈고, 오늘은 괜찮아. 스트레칭만 하고 슬슬 나가자.”
“녜.”
베리는 멋쩍어 귀를 파닥이며 떨어져 나왔다.
이제 다 큰 아이인데, 이렇게 자꾸 울다니. 도아 님이 뭐라고 생각하실까?
쓸모없는 짐꾼이라 두고 가려고 하시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베리는 쓸모 있다는 걸 알리려고 찻잔도 치우고 열심히 먹을 것도 늘어놓았다.
도아는 천천히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몸의 여기저기가 굳어 있는 게 느껴졌다.
‘역시 전투 다음 날은 상당히 굳네.’
부러졌던 곳을 무리하게 움직일 생각은 없다. 그래도 충분히 풀어주긴 해야 했다.
훈련이 끝나고 널브러져 있으면 조세핀이 몸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주던 게 그리웠다.
베리는 도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모르지만, 저건 자신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됴아 님, 쩌, 쩌두 해더 되나여?(도아 님, 저, 저도 해도 되나요?)”
“응. 무리하지 않으면.”
옆에서 베리가 말해서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그녀의 스트레칭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귀여워!’
몸집이 작으니 팔다리도 짤막해서 스트레칭 하는 게 귀여웠다.
고양이라 그런가 유연해서 동작들을 제법 따라 했다.
도아가 스트레칭을 다 끝내고 일어서자, 베리도 ‘휴’ 하고는 일어났다.
도아가 빙긋 웃고는 말했다.
“그럼 모험가의 도시를 떠나자.”
❖ ❖ ❖
베리에게 이미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얀은 야무지게 마무리를 했다.
“여기 제가 따로 정리한 유물에 대한 자료입니다.”
“고마워요.”
“이건 추천장이고요. 냐냑세세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에나리에에 가시면 산―다르크를 만나 보십시오.”
“감사합니다.”
“국경을 넘을 때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랑시에서 보증하는 시민증입니다.”
“아니, 이런 것까지 준비하셨어요?”
“나중에 도아 양께서 돌아오시면 식사를 같이 해 주신다고 전했지요.”
“하겠어요.”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랑 1급 시민 김도아>
‘1급이면 2급이나 3급도 있다는 말인가.’
의아했지만 도아는 일단 감사히 시민증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제 아래서 살던 도아는 신분증이 없다는 게 은근히 신경 쓰였었다.
이제 그녀의 신분을 확실히 보증해 줄 무언가가 생겼으니 가뿐하다.
로베른이 코웃음을 쳤다.
“그 시민증보다 B급 길드패가 더 신용 있을 거다.”
도아가 얀에게 “그래요?” 하고 묻자 얀이 빙긋 웃었다.
“모험가 길드 지점 어디서든 진짜임을 증명하니까요.”
“아하.”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신분패는 위조가 가능하지만 모험가 길드패는 진위 여부를 증명 가능한 곳이 도처에 깔려 있으니 위조가 어렵다는 이야기리라.
“하여간 고마워요.”
도아는 다시금 얀에게 인사했다.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나 많은 행정적 준비를 해 준 게 고마웠다.
얀이 이어 말했다.
“마검에 대해서는 각 나라 모험가 길드 본부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쿠낙, 타국에 들어가면 널 만나고자 할지도 몰라.”
쿠낙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마검이 원래 많아요?”
도아의 물음에 얀이 고개를 흔들었다.
“한 번에 두 자루가 나타난 건 처음입니다. 알려지기로 마검은 총 세 자루라고 하지요.”
“그렇군요.”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쿠낙에게 물어봐야겠다. 본인이 가장 잘 알겠지.’
도아가 쿠낙과 로베른을 돌아보았다가, 로베른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폐하, 정말로 그렇게 입고 도시 떠날 거야? 우리 몰래 떠나는 거 아녔어?”
로베른은 여느 때처럼 화려한 예장을 입고 있었다.
저런 차림으로 노숙하고 다 하는 건가.
로베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짐이 도둑새끼처럼 떠나야 하지?”
“꼭 비유를 해도…….”
“뭐 잘못한 게 있나?”
“없지.”
“그렇다면 숨듯이 떠날 필요가 없지. 어깨를 펴도 좋아. 짐이 인정한 B급은 그대뿐이니.”
도아는 영혼 없는 목소리로 “와아.” 하고 중얼거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쿠낙도 괜찮아요?”
“네.”
쿠낙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모험가 길드를 나섰다.
이 셋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었다.
도아는 해왕이의 고삐를 잡고, 안장에 연결된 바구니를 흔들어 보았다.
이번에 그랑에서 머물면서 새로 주문한 바구니였다.
“어때, 베리야? 편해?”
베리가 귀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네, 엄텅 폭딘폭딘하구 됴아여.(엄청 폭신폭신하고 좋아요.)”
“다행이다.”
날이 갈수록 베리의 발음이 좋아지는 것도 흐뭇했다.
도아는 그래도 혹시나 하며 바구니를 살폈다.
기존의 바구니는 바닥이 평평했는데, 이번에는 베리의 의견을 따라서 둥그스름한 바구니로 했다.
등나무로 꼼꼼하게 짠 아름다운 바구니 안쪽에는 안감을 촘촘히 대서 푹신했다.
뚜껑도 안에서 열고 닫기 편하게 안쪽에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베리는 무척 만족스러워하며 느긋하게 바구니에 기대 누워서 꼬리를 빗질했다.
도아 일행이 출발하려는데 헐레벌떡 누군가가 달려왔다.
“자, 잠깐만요! 기다려 주세요!”
머리에는 귀여운 모자를 쓰고 있고, 허리에는 보란 듯 작은 나팔이 달려 있다.
쿠낙이 설명하듯 도아에게 속삭였다.
“우편 길드입니다.”
도아가 헉 하고 쿠낙을 돌아보았다.
“우편 길드가 있어요?”
“아니면 편지를 어떻게 주고받지?”
로베른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물어 와서 도아는 할 말을 잃었다.
“금 나팔이군요. 개인 파발입니다.”
도아는 그 말도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눈을 굴렸다.
달려온 우편원이 싱긋 웃고 허리에서 나팔을 빼들어 가볍게 입가에 가져다 대고 부는 시늉만 해 보였다.
‘진짜 연주는 안 하는구나. 다행.’
“김도아 님 맞으시죠?”
“네, 맞아요.”
“신분증이 있으신가요?”
“여기요.”
도아는 순순히 시민증을 내보였다. 확인하고 우편원이 정중히 편지를 내밀었다.
“엘몬드 공작가에서 보내는 우편입니다.”
무겁고 매끄러운 편지는 고급스러웠다.
도아에게 오는 팬레터 중에서 이런 종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시장이나 평의회에서 왔던 초대장도 고급스럽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푸른색 인장에 금분이 발려져 반짝인다.
도아는 잠시 앞뒤로 종이를 보고 우편원을 보았다.
“고마워요.”
“아, 죄송하지만 답변까지 받아 가는 게 제 일이라.”
도아는 편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안 읽을래요.”
“네?”
놀라 우편원이 되물었다.
“지금 저 복잡한 일 많아서, 이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바로 답변 줄 수 없거든요.”
도아가 편지를 도로 우편부에게 내밀었다.
“도로 반송할게요.”
“아니, 그게.”
우편부는 끙하고 편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고객님, 괜찮으시면 편지를 읽고서 마음 편하실 때 저희 우편 길드 지점으로 찾아오셔서 답변을 주실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난다.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 좋아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여기 인계 서명 부탁드려요.”
도아의 서명을 받고 우편원은 인사한 후에 사라졌다.
도아는 편지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안 읽어 보십니까?”
얀이 ‘나는 궁금하다.’라는 얼굴로 물었다.
도아가 웃었다.
“나중에요.”
“하지만 엘몬드 공작가에서, 도아 양을. 으음. 무슨 일일까요?”
“마수 퇴치라도 의뢰하려는 걸까요?”
“모든 퇴치는 모험가 길드를 통하는 게 정석이기는 합니다만.”
도아는 처음 결심처럼 편지를 나중에 뜯어볼 생각이었다.
“그럼 갈게요. 잘 있어요, 길드장님. 다음에 또 봬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도아 양.”
다녀와라, 라는 말에 도아는 ‘엇’ 했다가 웃었다.
“네, 다녀올게요.”
비에나리에는 그랑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 중 하나여서, 어려움 없이 넷은 비에나리에로 입국할 수 있었다.
섬이나 다름없는 반도국가에서 자란 도아에게는 이런 점도 신선했다.
국경을 그냥 넘는다니.
국경 지대는 그랑이나 비에나리에나 큰 차이가 없이 느껴졌다.
그러나 국경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풍경이 순식간에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다.
저녁에 갓길에서 노숙을 위해 텐트를 치고 포장해 온 음식으로 저녁을 먹은 도아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느긋하게 커피대를 물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던 도아는 몸을 홱 일으켰다.
“?!”
아니, 시방 이게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