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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수 여행사 : S급 먹방대모험 패키지-34화 (67/100)

⊹ 34화 ⊹

도아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서 편지를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글자 사이에 무슨 다른 뜻이 있을까 눈을 부릅뜨고 읽어 내렸다.

흘림체로 적힌 글자는 우아하고 깨끗했다. 동판으로 찍어낸 듯한 글자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다.

도아가 계속해서 편지만 붙잡고 있자, 로베른이 물었다.

“B급, 안 좋은 내용이라도 적혀 있나?”

도아는 그제야 편지에서 시선을 뗐다.

그녀의 초록 눈이 잠시 모닥불 불티를 따라 흔들렸다.

이리저리 일렁이는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도아가 물었다.

“엘몬드 공작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어?”

흐음, 하고 로베른이 꼰 다리에 깍지 낀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엘몬드 공작가는 최근 이삼 대 사이에 크게 강해지기 시작했지. 공작령 자체는 척박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돌에서 아름다운 염료를 뽑아내기 시작했거든.”

의외로 술술 나오는 이야기에 도아는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일곱 나라 사이에서 펄럭이며 염색 천이 팔려나가고, 초상화나 그림에도 앞다투어 쓰였지. 상업에 재능이 있다고 할까? 그래서 알겠지만.”

로베른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귀족들은 제 손으로 일하면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 그러니 공작가에서 영지 진흥에 나서는 걸 격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자들도 있었지. 하여간 지금 엘몬드 공작가는 대륙에서 가장 부유한 공작가야. 무엇보다…….”

로베른이 도아의 초록 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전대 공작의 연애 스캔들이 유명하지.”

“연애 스캔들.”

도아가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무슨 연애 스캔들인데?”

“그 편지 내용이 뭔지 짐에게 고하면, 그다음을 이야기하지.”

“쳇.”

도아가 작게 투덜거리고 물었다.

“그런데 폐하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짐은 황제니까.”

로베른의 대답에 도아가 피식 웃고 편지를 도로 접었다.

쿠낙이 물었다.

“안 좋은 이야기라도 적혀 있습니까?”

“안 좋은 이야기라고 할까. 그냥 황당한 이야기라고 할까.”

도아가 편지를 부채 삼아 흔들며 말했다.

“엘몬드 공작이 나보고 ‘누나’래.”

❖ ❖ ❖

냉혈한.

잘린 머리 수집광.

엘몬드 공작을 부르는 말에는 분명히 비난이 실려 있었다.

젊은 나이에 공작 위에 오른 엘몬드는 부가 넘치는 공작가를 꿀꺽하려는 수많은 위협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의 주군인 왕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가 냉혹하고 단단한 모습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가신들과 백성들은 젊은 주군을 옹호했다.

공작가는 여전히 부유했고, 또한 강해졌다.

선대가 아무리 잘 만들어 놓아도 후대가 어지럽히면 소용없다, 라는 법칙을 엘몬드 공작은 반대로 보여줬다.

그런 주군이 드물게도 들뜬 모습인 건 측근 기사인 아칸에게는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한 일이기도 했다.

“주군,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있어.”

싱글싱글 웃는 엘몬드 공작을 보자 아칸의 마음도 들떴다.

뭐든지 주군이 기뻐하시면 자신도 기쁜 일인, 젊고 충성심 깊은 기사는 인사를 올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경하 드립니다.”

엘몬드가 빙긋 웃었다.

“아직 이른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칸 너에게는 말해 둬야지. 도아 누나를 찾은 거 같아.”

누나.

귀족이라면 좀 더 점잖은 말투로 손위 형제를 부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엘몬드 공작의 ‘누나’에는 참을 수 없는 친밀감이 듬뿍 묻어나 있었다.

마치 십 대 소년 같은 말투였다.

아칸 역시 얼굴이 밝아졌다. 엘몬드 공작가에서 오래 일한 그가 공작가의 잃어버린 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도아 님을 찾으신 겁니까?”

“응.”

엘몬드는 그렇게 말하며 정보 길드에서 추가로 보내준 내용을 다시 눈으로 훑었다.

사실 그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부모님께서…….”

그가 시선을 들어 벽에 걸린 가족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에 아름다운 초록 눈을 가진 여성이 미소를 띠고 앉아 있다.

그 옆에 당당히 서 있는 꼬마가 바로 자신이었다. 뒤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가 앉은 의자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단란한 가족의 초상이다.

솜씨 좋은 화가는 부모님의 미소에 밴 희미한 슬픔까지 잡아냈다.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누나를 낳으셨지. 어머니는 그사이에 누나를 잃어버렸고.”

어머니는 그 어린 딸을 혼자 두고 왔다고 무척 괴로워했다. 한때는 몽유병까지 걸려서 저택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곤 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찾겠다, 찾아주겠다, 하고 약속했지만, 어머니는 그저 고개만 흔들 뿐이었다.

그가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무렵부터 어머니는 도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형제가 없었던 그로서는 상상 속의 누나가 너무나도 친근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몇 번이나 누나를 만나고 싶다고 조르다가 어머니를 울리곤 했다.

누나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누나에 대한 상상을 더욱 부풀렸다.

‘나도 누나만 있으면.’

형제가 있는 다른 아이들을 보면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부루퉁함에 뺨을 부풀리곤 했다.

그리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누나가 불쌍해졌다.

‘고생하고 있겠지.’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혼자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초록 눈이라고 했으니 어디서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쉬쉬하며 누나를 찾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어머니의 본가 때문이다.

만약 누나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그것만은 에크하르드(ekhard)도 잘 알 수 있었다.

초록 눈에 ‘김도아’라는 독특한 남대륙식 이름, 여성.

그의 미들네임은 어머니가 붙였는데 ‘도운’이라는 남대륙식 이름이었다.

그는 미들네임을 전부 말하는 대신 이니셜으로만 썼기 때문에 이제 그의 미들네임이 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에크하르드 디 엘몬드.

그게 사람들이 아는 그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에크하르드는 다시금 서류를 바라보았다.

‘지금 와서, 나타나다니.’

어머니가, 아니 아버지라도 살아계셨을 때였다면 좋았을걸.

그의 누나는 모험가로서 맹활약 중이었다.

슈퍼루키로 이름을 알리는 중인 B급 모험가면서 단신으로 A급 던전을 공략, 성공했다고 한다.

‘역시 내 누나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을 쭉 펴고, ‘이 사람이 제 누나입니다.’ 하고.

참을 수가 없어서 에크하르드는 충성심 깊은 측근 기사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칸은 늑대족으로 회색 털이 점잖고 아름답다.

그윽한 호박색 눈동자로 주군의 누님 자랑을 들으며 “그렇군요, 그렇군요.” 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풍성한 꼬리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린다.

“처음에는 편지를 읽어 보지 않겠다고 했지만 말이야. ‘바로 답변을 할 수 없는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라고 했다는 게. 우리 누나지만. 참 똑똑하지 않아?”

이쯤 되면 팔불출이라고 해도 되련만 아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몬드 공작가의 편지를 앞에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배짱이 과연 주군의 누님이시기는 하다.

그가 쓴웃음을 지으며 힘을 뺐다.

“사실 알 수 없지. 나에 대해서 원망하고 계실 수도 있고.”

이제 와 알고 보니, 자신을 떠난 엄마는 호사스러운 공작가 생활을 했고, 도아가 유명해지니 공작가에서 그녀를 찾는다―

그렇게 생각할 여지도 충분했다.

“아닙니다. 주군의 누님이시라면 분명히 알아주실 것입니다.”

아칸이 단호하게 말했다.

불안한 가운데서도 그게 위로가 되어 에크하르드는 “그럴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편지를 더 쓰셔서 사정을 알리심이 어떤지요? 누님께서도 이쪽 사정은 전혀 모르고 계실 테니까요.”

“그게 좋겠다.”

에크하르드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사실 몇 번이나 펜을 들기는 했었지만, 너무 몰아붙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서 펜을 내려놨었다.

무슨 말을 하든 사람이 한번 꼬아 듣기 시작하면 다 나쁘게 들리는 법이다.

아칸이 등을 슬쩍 밀어주니 다시 펜을 들 용기가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엘몬드 공작가가 잘산다는 사실이었다.

돈이나 명성 때문에 그녀를 찾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면 좋으련만.

에크하르트, 엘몬드 공작―도운은 그렇게 생각하며 가장 비싼 종이를 꺼냈다.

❖ ❖ ❖

도아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두 사람을 데리고 다니면서 조용히 여행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쿠낙과 로베른, 이 두 사람과 여행을 하는 건 양손에 등신대를 들고 여행하는 거랑 똑같았다.

어딜 가든 시선을 끈다.

그러니 마을에 들러서 조용히 여관에서 마음을 정리한다― 따위가 불가능했다.

어딜 가나 “헉, 흑룡 쿠낙!”, “세상에 황제 로베른!”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간혹 소문이 빠른 큰 도심에 들어서면

“앗, 슈퍼루키 도아다!”

라는 소리마저 들어야 했다.

비에나리에는 그랑과 달리 전체인구의 80%쯤이 툴레인 거 같았다.

폭신폭신한 털에 둘러싸이는 게 싫지 않지만…….

결국 도아는 마을에 최대한 들르지 않는 걸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일행은 산길을 부지런히 걸으며 노숙을 하곤 했다.

이렇게 조용히 걸을 때면 도아의 마음속은 엘몬드 공작의 편지로 소용돌이치기도 했다.

도아가 폭탄 발언―엘몬드 공작이 나 누나라고 부름―을 한 후에 로베른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럴 리가? 엘몬드 공작이 그대보다 다섯 살은 더 많을 텐데?”

“그쪽이 문제인 거야?”

도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고, 쿠낙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몬드 공작은 도아 양이 누나이기에는 나이가 맞지 않는 걸 모르는 걸까요?”

“아니. 나이가 안 맞는 게 문제냐고.”

로베른이 피식 웃었다.

“그대의 모친이 시간이라도 뛰어넘지 않은 이상 누나는 무리니 말이야.”

앗, 그거 정답.

로베른 딴에는 농담으로 한 말인데 정확하게 답을 내놓았다.

쿠낙이 갸웃하고 말했다.

“위대한 마법사도 시간을 뛰어넘는 건 불가능하지요.”

이야기가 딴 데로 샌다. 하지만…….

‘무섭다. S급. 농담인데 정답이야.’

세계수 여행사를 통하면, 시간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선이 앞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이게 바로 시간 여행자와 결혼하면 곤란한 점 아닐까.’

엄마 입장에서는 나를 먼저 낳았으니 당연히 날 누나라고 인지했을 거고, 다른 사람도 그럴 터다.

하지만 시간선이 꼬였다.

‘하지만 이걸 누구에게 뭐라고 설명하냐고.’

“하긴 그러고 보니 현 엘몬드 공작도 아주르 나자크지.”

로베른의 말에 도아가 “정말?” 하고 되물었다.

“그래, B급처럼 진짜는 아니고. 그저 초록색 눈일 뿐이지만.”

“그런가.”

초록 눈인가.

엄마의 아들인가.

내 딸이니까 도아도 분명 초록 눈이야. 라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역시 여기로 돌아왔던 건가.

날 버리고.

그리고 재혼한 건가.

날 버리고.

공작님이랑 결혼해서 잘 살았던 건가.

난 가난했고, 배고팠고, 외로웠고, 괴로웠는데.

그런데, 그런데.

어쩐지 공작의 편지는 해맑았다.행복하게 자라나 고등 교육을 받은 태가 났다.

배알이 꼴린다.

그녀는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수돗물을 마시는 괴로움. 생리대가 없는 괴로움.

내 것 없는 공동체 생활의 괴로움.

고급스러운 편지지마저 얄밉기 짝이 없었다.

이 사람은 굶어본 적도 없겠지.

엄마의 사랑 속에서.

‘아.’

도아는 생각을 끊어내려고 애썼다.

그만하자.

도아는 이를 악물었다.

조세핀이 있다면 안겨서 울었을 텐데, 라크샤샤가 있다면 그 푹신한 털을 안게 해 줬을 텐데.

‘엘리바스가 있다면.’

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편지를 배낭에 쑤셔 넣었다.

“고기를 먹어야겠어요.”

도아의 말에 쿠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끝이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그 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았다.

엘몬드 공작과의 관계를 더 궁금해하거나, 남대륙에서 왔다고 했으면서 이게 무슨 일이냐, 라는 추궁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좋은 사람이야.’

도아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뭔가가 도아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아얏. 아, 뭐야.”

도아가 머리를 문지르며 바닥을 내려다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빨간 열매다.

크다.

크고 새빨간 열매다.

“체리잖아?!”

놀라 고개를 드니 주변이 온통 야생 체리 나무투성이였다.

가지마다 빨간 체리들이 가득 열려 있었다.

새들이 잔치를 벌이고 있다.

“우와아―!”

도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체리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체리는 비싼 과일이다.

물릴 때까지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도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먹어도 되나? 농장인 거 아니지?”

쿠낙이 손을 뻗어 잘 익은 체리를 하나 따서 도아의 손에 올려 주었다.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야생나무라면 아주르 나자크가 주인인 거나 다름없죠.”

“이유는 모르지만 아주르 나자크 만세 할래.”

도아는 그렇게 말하고 입 안에 체리를 넣었다.

아삭함과 동시에…….

“셔!”

도아는 비명을 내질렀다.

야생 체리는 신맛이었다. 물론 체리의 풍미는 어마어마했지만 셨다.

‘이게 야생의 맛인가. 개량된 과일만 소비한 현대인을 비웃는 건가?’

하지만 좀 더 잘 익은 걸 먹자 먹을 만했다.

씨앗을 뱉어내고 도아는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다들 체리 따자!”

“짐을 체리 따기 같은 천박한 일에 동원하겠다는 건가?”

“노동은 신성한 거야.”

“방금 시다고 하지 않았나? 다 먹지도 못할 텐데?”

도아가 히죽 웃었다.

“체리 브랜디 설탕 절임이란 거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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