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도아는 지금까지 모은 세계수 포인트를 계산해 보았다.
쿠낙을 구해 주고 300, 길드장님 구하고 300, 마검 폭주 막고 500.
총 1100포인트였다.
이걸로 오두막에서 뭘 할까, 도아는 리스트를 내리며 수없이 고민했다.
그래서 일단은 방 칸수를 늘리기로 결심했다.
포치는 600포인트였는데, 방은 더 비싸서 800포인트였다.
오두막에 방을 한 칸 더 늘리자, 그 방을 제외하고도 오두막 크기가 전체적으로 커졌다.
디귿 자로 오두막이 확장되고 디귿 자 가운데 부분에 포치가 자리 잡았다.
방은 서로 마주 보는 구조가 되었다.
그리고서 남은 300포인트로 뭘 할까 고민하다가 도아는 ‘저장고 세트’라는 걸 발견했다.
잼이며 설탕절임을 해서 담아 둘 수 있는 유리용기와 함께 제공되는 벽장 패키지였다.
‘참을 수 없잖아!’
도아는 200포인트로 저장고 세트를 결제하고 남은 100포인트로 침대를 결제했다.
포인트가 커질수록 침대가 화려해지는데, 현대인인 도아의 눈에는 그 화려함이 너무 과해 보였다.
심플하게 떨어지는 침대가 차라리 나았다.
대충 모던하다고 해 두자.
‘나중에 바닥재도 업그레이드 하고 싶다. 이 격자무늬 바닥 예쁘네.’
서브 퀘스트 언제 또 주지?
하며 흐뭇하게 유리병을 바라보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체리라니!
도아는 설렜다.
물론 생 체리가 최고다.
하지만 그건 개량된 체리 한정이었다.
여기 열매도 분명히 크고 훌륭하고 냄새 역시 비할 바 없이 강렬하지만 신맛도 강했다.
그래도 잘 익은 건 먹을 만하지만.
여튼, 그녀에게는 레시피가 있다.
돌설탕이 있다.
바닥에서 체리가 발에 채이게 굴러다니다니.
“으헤헤헤.”
도아는 커다란 앞치마를 하나 꺼내 입었다. 튼튼한 소매까지 달려 있는 앞치마였다.
체리 물은 잘 빠지지 않으니, 소중한 모험가 의복은 보호해야 한다.
베리도 자신의 앞치마를 야무지게 챙겨 입었다.
‘뭐지? 미친 귀여움이다.’
도아는 손에 카메라가 없는 게 아쉬워서 몸부림쳤다.
쿠낙과 로베른은 앞치마를 입고 꺅꺅거리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따는 건가?”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쿠낙의 말에 로베른은 잠시 고민하다가 체리를 따기 시작했다.
체리를 따지 않으면 분명히 도아는 제 요리를 나눠주지 않을 터였다.
그건 그의 인생에 큰 손해임이 틀림없다.
도아는 열심히 체리를 따다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화려한 예장을 입은 황제가 체리를 따고 있다.
반대쪽에는 마검을 찬 새까만 모험가가 체리를 따고 있다.
‘와, 이상해.’
그 생각도 잠시 도아의 집중력은 다시 체리에게로 돌아갔다.
손에 닿는 것만 따도 한가득이었다. 베리는 날쌔게 나무 위로 올라가서 높은 곳에 달린 체리들을 전부 털어왔다.
내려온 베리의 입가가 체리 물로 붉어져 있어서 도아는 깔깔 웃었다.
이 체리도 계속 먹다 보니 먹을 만하다.
그러는 도아의 입술도 혀도 다 체리로 붉은 색이다.
“B급도 애군.”
로베른이 그렇게 말하며 덧붙였다.
“그렇게 많이 먹으면 배탈 날걸?”
“체리 많이 먹어서 배탈 나는 거면 호사스러운 거야.”
“도아 양의 호사스러움은 도무지 기준을 종잡을 수 없군요.”
쿠낙 역시 그렇게 말하면서도 부지런히 체리를 모아 주었다.
도아는 체리로 배를 채우고 야생의 체리도 잔뜩 땄다.
이제부터는 인내의 시간이다.
깨끗하게 씻은 체리의 씨를 빼내는 작업이었다.
“S급 둘이서 체리 다듬기인가. 이게 대체 얼마짜리 체리일까.”
시급으로 따지자면 지상 최강일 두 사람이다.
‘금 체리도 그보다 쌀 듯.’
도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를 재촉했다.
로베른은 신음을 흘리면서도 희한할 정도로 착실하게 체리를 다듬었다.
도아가 이유를 물으니 그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B급이 체리로 요리를 해 주겠지.”
라고 답했다.
“그렇군.”
과연.
조세핀의 말이 옳았다.
맛있는 걸로 꽉 잡으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도아는 히죽 웃었다.
저장고의 유리병을 나란히 늘어놓는다.
유리병이라고 하지만 설명에 따르면 ‘세계수의 수액이 섞여 있는 수지로 만들어진 어쩌구’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염이 들어 올 일이 없었다.
지구로 치자면 100% 항균 보장이었다.
도아는 냄비에 설탕물을 팔팔 끓였다.
“설탕을 그렇게 많이 넣나여?”
“응, 이렇게 많이 넣어.”
체리를 병마다 가득 집어넣고 향신료를 넣은 뜨거운 설탕물을 삼분의 이쯤 부어 주고 나머지는 브랜디를 채워 넣었다.
베이킹 재료로 사 뒀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뚜껑을 꼭 닫아서 밀봉하면 완성.
와, 짝짝짝
도아가 앞치마를 벗을 때 베리가 물었다.
“이걸로 나중에 뭐 하나요?”
“음, ‘포레누아’라고 초콜릿 케이크도 만들 수 있고…….”
진하고 촉촉한 다크 초콜릿 시트 사이에 절인 체리와 생크림을 잔뜩 끼워 넣고, 맨 위를 체리로 장식하는 케이크다.
“체리 아이스크림도 만들 수 있지.”
차가운 바닐라 아이스크림 위에 시럽과 체리를 듬뿍 얹는 건 기본이다.
체리를 섞어서 체리 아이스크림을 만들면 정말로 맛있겠지.
냉동 주머니가 있으니 아이스크림도 어떻게 도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칵테일도 할 수 있고. 그냥 먹어도 맛있어.”
도아가 말할 때마다 베리의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얼른 완성되면 좋겠네요.”
“나도.”
둘은 마주보고 웃었다.
그리고 야생 체리를 잔뜩 먹은 대가로 두 사람은 결국 배탈이 나고 말았다.
❖ ❖ ❖
여행은 느긋했다.
쫓기는 일도 없고, 쫓는 일도 없다.
계획은 스스로 세우면 됐고, 그 계획을 좇아서 한 걸음 떼는 것도 즐거웠다.
도아는 길을 찾는 능력도 조금씩 발전하는 걸 느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지도 없이도 잘 다니는 이유를 알겠어…….’
예전에 GPS를 이용해서 길을 찾으면 길 찾는 능력이 확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렇게 현대인으로서 바닥에 떨어졌던 길 찾기 능력이 이제 슬슬 살아나기 시작했다.
일단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게 중요하다.
중간에 길이 끊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수레바퀴 자국이라도 남아 있기는 했다.
그런 흔적들을 찾아가다 보면 중간에 길이 끊겨도 ‘아, 이쪽으로 길이 이어지겠는데?’ 싶은 감이 온다.
단순하게 말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이쪽으로 다니겠구나, 하는 감이 생긴다.
그쪽으로 가면 거의 맞았다.
그리고 마을에서 출발해서 길로 올라갈 때부터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한다.
대부분의 일반인은 대륙을 가로지르는 식의 여행은 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 길의 표시를 해 두는 건 모험가라고 했다.
모험가들이 모험가들을 위해서 표시를 하는 거다.
산을 올라갈 때 등산 모임 사람들이 길을 표시해 두는 것처럼 길 방향마다 나뭇가지에 끈을 묶어 둔 것도 발견되곤 했다.
더불어서 재미있게도 표지판에 새겨진 건 대부분 그림이었다.
“그림이네.”
도아가 표지를 보며 하는 말에 쿠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맹자도 알아볼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림만 봐도 ‘이쪽이 작은 마을’, ‘이쪽은 큰 마을’ 같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초보 모험가들이 첫 의뢰로 많이 시작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도의 표지판을 고치거나, 오래된 끈을 새로 다는 의뢰가 주어지지요.”
“아하.”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익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쉽고 간편하면서도 무척 중요한 의뢰였다.
“그러고 보니.”
도아가 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베리 글 공부는 어때?”
“저 열띰이 하고 있떠여!(저 열심히 하고 있어요!)”
“맞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글자 쭉 다 쓸 수 있게 됐지? 장하네.”
“짐꾼이 받기에는 고급 교육이지.”
로베른의 말에 도아는 코웃음 쳤다.
“내 짐꾼에게는 아냐.”
“훌륭하군.”
비꼬는 건가 싶어 로베른을 휙 돌아보았는데 비꼬는 건 아닌 듯했다.
도아는 눈을 깜박이고 말했다.
“고마워?”
“칭찬이었으니 좀 더 솔직하게 감읍해도 되네만.”
“사양하지.”
감격해 목메어 울 필요까지 있나.
도아의 말에 로베른은 픽 웃었다.
그녀는 베리에게 그림책을 사 주겠다고 약속하며 걸음을 옮겼다.
❖ ❖ ❖
밖에서는 비가 미친 듯이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워낙 굵어서 맞고 나면 아플 정도로 강한 빗줄기였다.
비에나리에에는 이런 비가 제법 온다고 쿠낙이 말해 주었다.
도아는 오두막을 꺼낼까 했지만, 쿠낙이 말렸다.
순식간에 구름이 몰려왔기 때문에 일행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서 비를 막아줄 커다란 타프를 치고, 배수로를 팠다.
그리고 원터치 텐트를 치고서 이제 타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느긋하게 듣고 있었다.
로베른은 망토를 벗었지만, 여전히 새하얀 예장이었다.
그게 이 캠핑과 굉장히 이질적이면서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게 신기했다.
비 때문에 공기가 끈적끈적해지고 있어서 도아도 겉옷을 벗고 가벼운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느긋하게 캠핑 의자에 기대앉아서 만돌린을 쳤다.
만돌린을 가르쳐 준 건 뜻밖에도 조세핀이었다.
조세핀이 만돌린을 연주하면 엘리바스는 ‘저 성질머리랑은 전혀 다른 소리지요.’ 하고 생글생글 웃곤 했다.
조세핀은 만돌린은 모험가의 로망이라며 도아에게도 만돌린을 가르쳐 주었다.
취미생활도 할 겸, 100년간 틈틈이 만돌린을 쳤으니, 그녀의 만돌린 실력은 제법이었다.
로베른은 큰 게 좋다면서 모닥불을 만들 때는 늘 크게 만들었다.
불티가 화르륵 튀어 오르는 걸 보며 도아는 의미 없는 가락을 연주했다.
“불티 때문에 타프에 구멍 나는 거 아닐까?”
도아가 중얼거리자 로베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횃불에 그을러도 멀쩡할걸.”
“그렇군.”
현실에서는 다들 불티 때문에 불빵 난다고 슬퍼했는데, 이세계는 다르구먼.
“다행이네.”
딩딩
도아의 만돌린도 그렇다는 듯 소리를 냈다.
이곳의 만돌린은 현을 금속이나 실로 만들지 않았고 던전에서 나오는 재료를 사용해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소리가 가야금 비슷한, 그러나 조금 더 금속성이 나는 소리가 났다.
도아의 손가락이 무의식으로 이런저런 곡을 연주하는데 저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순간, 베리까지 포함해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도아가 조금 더 만돌린 연주 소리를 크게 하고 물었다.
“손님이신가요?”
노골적으로 걸어오는 소리가 난 후에 일행 두 사람이 나타났다.
빗줄기가 워낙 거세서 인영이 흐릿했다.
두 사람 다 겉에 후드 같은 모양의 우비를 입고 있었다.
도아는 만돌린 연주를 멈추지 않고 둘을 돌아보았다.
베리까지 인기척을 눈치챘으니, 당연히 저쪽에서 기척을 내며 다가온 거였다.
적이 아니라고 노골적으로 알린 것이다.
“지나가는 나그네인데, 잠시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어딘지 연극적인 목소리였다. 도아가 권했다.
“일단 비는 피하세요.”
그 말에 두 사람이 타프 아래로 들어왔다. 물이 바닥으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하얀 손이 후드를 뒤로 넘긴다.
“안녕하세요, 혹시 모닥불을 얻어 쓸 수 있을까요?”
후드를 벗으며 인사한 건 인간족 여성이었고, 그 옆에는 키가 큰 늑대족 남성이 서 있었다.
도아는 제 일행을 돌아본 후에 말했다.
“편하게 앉으세요.”
여성이 활짝 웃으며 다시 인사를 하려는데 늑대족이 가로막으며 물었다.
“혹시 흑룡 쿠낙이십니까?”
“맞습니다.”
“그럼 그쪽은 혹시…….”
“짐 말인가?”
“맞군요.”
신음처럼 말을 내뱉고 늑대족은 잠시 망설였다.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와아―”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S급 모험가님들이시군요! 저 처음 봤어요! 두 분께서 비에나리에에는 무슨 일이신가요? 커다란 던전이라도 생겼나요? 아, 아니면 툴루앙의―”
“레―도나.”
늑대족의 목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뚝 막았다.
레―도나라고 불린 여성은 “아.” 하고 제 입을 한 번 막았다가 웃었다.
“제가 수다스럽기는 하지요. 하여간 유명한 분들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저는 레―도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도아라고 해요.”
아무래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건 자신뿐인 듯해서 도아도 만돌린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어머나, 저랑 이름이 한 글자 차이네요.”
“두 글자 차이죠?”
도아가 정정하자 레―도나가 웃으며 후드를 벗었다.
“아니에요. ‘레’는 저의 신분을 말하는 거니까요. 도나가 제 이름이랍니다.”
한 글자 차이죠? 하고 레―도나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녀가 안에 입은 옷은 고급스러운 소재의 사랑스러운 여행 복장이었다.
자잘한 꽃무늬들이 수놓아져 있어서 눈에 확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후드를 옆에 서 있는 늑대에게 건네는 게 귀한 집 아가씨라는 느낌이 났다.
늑대 호위는 무척 불편해 보였다.
지금 이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기분인 게 느껴졌지만, 이 아가씨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성싶었다.
“레―도나, 잠깐만 비를 피하고 가죠.”
결국 호위가 말을 꺼냈지만, 그녀는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하지만 비가 이렇게 오잖아요. 하룻밤 쉬었다 간다고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라이, 이 일행의 대표는 누구죠?”
고개를 치켜올리며 하는 말에 라이라고 불린 늑대족은 한숨을 이 사이로 내쉬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레―도나이십니다.”
“그죠? 난 완전히 지쳤다고요. 비는 오지, 바닥은 질퍽거리지. 새로 산 여행복이 벌써 더러워지겠어요.”
그녀가 그러며 휙 도아 일행을 둘러보았다.
“게다가 다리도 엄청 아프고요.”
누군가가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기는 바라는 시선으로 주변을 지그시 보다가 마지막으로 베리에게 시선이 향했다.
빤히 베리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