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진짜 취했나 봐요. 앉아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일어나니까 어지러워요. 엄청 엄청.”
“그래 보입니다.”
“그래요?”
되묻고 다시 실없이 도아가 웃는다.
쿠낙의 시선이 힐끗 도아 옆에 놓인 플라스크를 향했다가 다시 도아에게로 돌아갔다.
“저걸 혼자 다 마시셨습니까?”
“음, 니알이랑 엔도 한 잔씩?”
쿠낙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가 그녀에게서 베리를 받아들었다.
“일단 베리를 안으로 옮기죠.”
“같이 가요. 저도 잠시 쉬어야 할 거 같아요.”
“혼자서 걸을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요.”
중얼거리고 도아가 걷다가 말했다.
“쿠낙을 붙잡아도 되나요?”
“기꺼이요.”
쿠낙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으, 진짜. 토할 거 같아요.”
“토하세요.”
“싫어요. 길에서 안 토해요. 인간의…… 존엄…….”
“그런 말을 할 정신이 있는 걸 보니 완전히 취한 건 아니군요.”
“그래도 취했어요.”
도아가 웅얼거려서 쿠낙이 “압니다.” 하고 대답했다.
도아는 마을회관까지 걸어가 테이블에 주저앉았다.
쿠낙이 베리를 대신 침대에 눕혀 주고 나왔다.
‘앉아 있으니까 좀 나은 거 같은데…….’
이렇게 어지러울 일인가?
퀭한 눈으로 의자에 앉아 있자 쿠낙이 잔을 내밀었다.
“마시기 싫어요.”
“마시면 나을 겁니다.”
“으으.”
신음을 흘리고 도아는 잔을 받아서 마셨다.
강렬한 약초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마시니 속이 훨씬 더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회관 밖은 여전히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문밖에서 들리는 그 소음이 묘하게 회관의 조용함을 강조했다.
‘축제 내내 쿠낙은 어디에 있었던 걸까?’
도아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 고요 안에서 축제를 바라보는 건 뭐랄까…….
‘쓸쓸하네.’
쿠낙은 계속 이 속에 있었던 건가. 좀 찾아서 말을 붙여 볼걸.
그러고 보니 로베른도 자리에 없었지.
이런 자리 좋아할 사람 같았는데.
“쿠낙.”
도아는 헛기침을 하고 몸을 바로 세웠다.
“네, 도아 양.”
부드러운 목소리가 돌아오는 것에 힘입어서 도아가 말했다.
“술에 취해서 할 이야기는 아닌 거 같지만, 어쩐지 지금 하고 싶어져서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쿠낙과 마검 사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 같아요.”
서브 퀘스트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쿠낙이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도아가 이어 말했다.
“우리 같이 힘내 봐요.”
도아는 그가 놀라거나, 캐묻거나, 아니면 기뻐하거나.
뭔가 반응할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똑같았다.
옅은 미소를 띠고 그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게 의외라서 도아는 눈을 깜박였다.
허를 푹 찔린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로 끝이야?’
아까 낮에 쿠낙에게 상황을 설명했을 때에도 이런 느낌을 받았다.
‘내 말이 헛도는 느낌?’
그에게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고 그대로 퉁겨져 나온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지금 엄청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한 거 아냐?
“음, 어떻게 하냐든가. 안 물어봐요?”
쿠낙이 도아의 말에 작게 웃고 말했다.
“다른 걸 물어봐도 될까요?”
“네? 네. 얼마든지요.”
쿠낙이 부드럽게 물었다.
“만약 안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네?”
“만약 계약을 풀 수 없거나, 아니면 정화 시킬 수 없다면요.”
“어…….”
“만약 그 모든 게 소용없다면요.”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쿠낙의 검은색 눈동자가 이쪽을 직시한다.
“그럼 어떻게 해 주실 겁니까?”
속삭이는 듯 부드럽게 그가 말을 이었다.
“제가 더 이상 제어를 할 수 없게 된다면. 마검이 절 지배하게 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도아는 당혹했다.
“그럼, 만약, 그러면…….”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나왔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빨려 들어갈 만큼 아름답고.
바닥없는,
바닥없는 절망이.
목구멍 안쪽이 꾸욱 막혀 왔다.
도아는 제 얄팍함을 여실히 깨달았다.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지만, 말을 해야 했다.
그가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 지는 명확했다. 너무나도 선명해서 도아는 속수무책이 되었다.
도아는 결국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쿠낙을 죽여 줄게요.”
순간 쿠낙은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검은 눈동자 안에 황홀감이 고여 반짝였다.
“약속한 겁니다, 도아 양.”
사랑 고백보다 더 달콤한 목소리다.
그녀가 영원을 약속했어도 이런 목소리로 답하지는 않을 거 같다.
“약속했어요.”
그녀가 다시 한번 다짐하자 쿠낙이 작게 웃었다.
손을 뻗어 살며시 도아의 이마를 짚고 쓸어 올렸다.
다정한 동작.
“아직 회복이 덜 됐는데, 너무 마신 거 같습니다. 들어가 쉬십시오.”
“으응…….”
도아는 어색하게 대답했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양손을 뻗어서 쿠낙의 멱살을 휙 잡아당겼다.
“도아 양?!”
놀란 얼굴에 도아는 쏘아붙였다.
“그래도 절대로 안 죽일 거예요!”
“도아 양, 방금―”
“약속했지만 그런 일 없게 할 거예요! 알았어요?”
“…….”
“나 절대로 그렇게 끝내지 않을 거예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
순간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주 찰나였지만, 그는 흔들렸다.
만족스러워 도아는 손을 놓아주었다.
지금은 그거면 됐다.
“하지만…….”
그의 말에 도아는 눈을 찌푸리고 답했다.
“약속했어요.”
그런 일이 없게 하겠지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약속했다.
쿠낙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도아의 표정을 보다가 쿠낙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회관을 빠져나갔다.
도아는 홀로 남아서 테이블 위를 노려보았다.
밖에서 와하하 하고 웃음소리가 들리고서야 도아는 속박에서 풀린 거 같았다.
“으아아아아―”
결국 큰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이게 뭐야.”
‘아, 진짜. 김도아. 아, 정말.’
쿵쿵 테이블에 머리를 박다가 다시 토할 거 같아서 참았다.
“역시 B급은 자해가 취미였나?”
웃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 잔이 놓이는 게 느껴졌다.
“폐하.”
도아가 고개를 들자 로베른이 그녀에게 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차가운 냉수였다.
도아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켜 냉수를 마셨다.
“자해하는 거 아녔어.”
“그럼?”
“내 얄팍함을 반성했다고 해야 하나.”
“당연한 걸 반성할 필요가 있나?”
로베른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손에는 유리잔이 들려 있었는데, 어디서 가져왔는지 호박색 독주가 희미한 빛에 찰랑였다.
저런 비싼 술은 어디서 났지?
도아의 시선을 눈치챈 듯 로베른이 잔을 돌리며 말했다.
“B급에게는 아까운 술이지.”
“이제 술은 한 방울도 더 필요 없어.”
도아가 입을 내밀며 말했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니 심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거 같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 발끝을 까닥였다.
“아니다. 지금 좀 마시고 싶은가.”
도아가 중얼거리자 로베른이 물었다.
“마검을 죽여 주겠다고 한 것 때문에?”
도아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듣고 있었어?”
“다 들으라고 한 이야기 아니었나? 짐은 지붕 위에 있었다만.”
“몰랐어.”
취해서 전혀 몰랐다.
도아가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가 놓았다.
“방심했네.”
“B급은 이상한 곳에서 무방비하더군.”
“응?”
“전투와 전투 외 전환이 너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아, 스위치가 있다는 말이지?”
“스위치?”
“응. 전투할 때랑 안 할 때가 완전히 다르다는 말이잖아.”
“그래. 전투에 들어가 있지 않을 때는 경계심도 너무 낮아. 훈련만 너무 많이 받아와서 그런가?”
“그럴지도.”
순순히 대답하고 도아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후에 말했다.
“쿠낙은 폐하가 있는 걸 알았을까?”
“알았겠지.”
“아니, 남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아니지 않……. 어?”
도아는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처음에 로베른을 만났을 때 그가 쿠낙에게 뭐라고 했었지?
[나에게 연락도 없이 오다니]
뭐 그런 비슷한 이야기 아니었나.
그럼 쿠낙은 보통 로베른에게 연락을 하고 그랑에 간다는 말이다.
왜일까?
도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나 전에는, 폐하였어?”
죽여 주겠다고 약속한 게.
로베른이 빙긋 웃었다.
“그런 약속을 한 건 그대밖에 없다네, B급. 안심해도 좋아.”
“지금 전혀 그런 ‘앗, 나만 특별?’ 따위의 느낌 아니었거든요.”
“죽여 준다기보다는 처리하겠지. 그랑에서 폭주라도 하게 되면 큰일 아닌가?”
‘처리.’
도아가 한숨을 내쉬고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몸이 아래로 미끄러지는 기분이다.
“나 쿠낙이 좋아할 줄 알았어.”
도아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쿠낙은 그녀의 이야기를 조금도 믿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도아가 ‘같이 힘내자’라든가 ‘정화할 수 있을 거 같아.’라든가 식으로 확실하지 않은 말로 지껄이는 건 전혀 그에게 영향을 줄 수가 없었다.
그가 기뻐한 건 단 한 가지뿐이다.
확실하게 손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
그녀가 그에게 반드시 지킬 수 있는 약속.
죽여 주겠다.
그것뿐이었다.
“마검이랑 계약을 해소할 수 있어. 라고 하면 희망에 찰 줄 알았거든.”
로베른은 말없이 잔을 흔들었다. 도아의 눈이 흔들리는 술을 따라간다.
호박빛 액체가 일렁일렁.
‘마검에서 가장 도망치고 싶은 건 쿠낙이겠지.’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사람은 죽어 나간다.
소중한 사람과 멀리 떨어지는 게 그가 줄 수 있는 전부다.
완벽한 고립.
거기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을까?
쳤겠지!
누구보다 더 많이, 열심히 쳤을 터였다.
몇 번이나 희망을 봤겠고, 몇 번이나 절망을 맛봤겠지.
켜켜이 쌓여온 어둠 속에 도아가 던지는 말 따위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어떤 기뻐하는 반응을 기대했다는 게―심지어 말 말고 다른 증거도 없으면서―너무.
“자나?”
로베른의 질문에 도아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자신의 오만과 기타 등등 팔랑팔랑 날아갈 거 같이 얄팍한 자의식 등등을 반성하는 중이야.”
“B급.”
부르는 말에 웃음이 섞인다.
로베른이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는데 도아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꾸욱!
양손으로 제 양 뺨을 꽉 눌렀다가 손을 떼어냈다.
“좋아, 반성 끝.”
“벌써 끝났나?”
로베른이 아쉬워하자 도아가 피식 웃었다.
“응. 하지만 쿠낙의 절망은 쿠낙의 것인걸. 난 절망하지 않을 거야.”
도아가 이어 로베른에게 물었다.
“그보다 폐하. 아까 ‘얄팍한 게 당연하지.’ 했던 거 뭐야?”
똑바로 노려보는 눈동자가 일렁일렁.
“취했나?”
로베른이 묻자 도아가 “조금?”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로베른이 짧게 답했다.
“그대는 여행자니까.”
“좀 더 긴 버전으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언젠가 돌아갈 테지. 여기로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고. 모든 게 스쳐 지나가는 일일 뿐.”
로베른의 이야기를 들으며 도아는 “음…….” 하고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면도 있긴 하지만.’
“그러니 관계가 얄팍하지.”
“하지만.”
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하지 않아?”
“뭐가?”
“죽여 달라고 하는 게 말이야. 이쪽의 심정도 생각을 좀 해 봐.”
도아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설마 쿠낙도 그렇게 생각했나? 우리 사이 얄팍하니까 죽여도 아무렇지 않겠지? 막 그렇게?”
“글쎄…….”
“와, 너무하네. 그런 거면 진짜 너무 하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그래도 죽여 주겠다고 약속한 건 그쪽 아닌가?”
“쿠낙이…….”
도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 심정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까?
도아는 말을 고르다가 결국 완벽한 말을 고르는 걸 포기한 채로 말했다.
“그렇게 말해 주지 않으면 쿠낙이 무너질 거 같았어…….”
도아는 턱을 괴었다.
“왜 나일까?”
“그대가 아주르 나자크니까.”
“마검 처형자라서?”
“그래.”
“나는, 내가.”
도아가 눈을 내리깔았다.
“쿠낙에게 약속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게 고작 그거라는 사실이 짜증 나.”
“그대가 있기 전까지는 누구도 약속할 수 없었던 죽음이지.”
“?”
“폭주하는 마검을 저지하려면, 상대도 죽음을 피할 수 없으니까. 동사가 최선이거든. 하지만 그대는 아주르 나자크니까. 오염에 당할 염려가 없지.”
“그렇군…….”
“그렇다고 자살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점은 건전하다고 해 둬야겠네.”
뚱한 얼굴로 도아가 하는 말에 로베른이 물었다.
“죽일 건가?”
도아가 로베른을 노려보았다.
“안 죽여.”
“그럼 어떻게 하려고?”
“말했잖아. 마검을 어떻게든 하겠다고. 난 절대로 포기 안 해. 쿠낙에게도 말했듯이.”
“그건 아쉽군.”
“뭐가?”
“마검을 처치했다는 아주르 나자크다운 타이틀을 날려버리게 돼서.”
“아, 세상에.”
도아는 반쯤 일어나며 상체를 불쑥 앞으로 내밀었다.
“진심이야? 진짜 지금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거야? 폐하?”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도 로베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화가 난 도아의 눈동자는 밤의 숲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희미한 달그림자가 숲 안에서 일렁인다.
그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며 로베른이 답했다.
“마검의 머릿속이 그럴 거라는 말이지.”
도아는 맥이 탁 풀렸다.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그녀 머리띠가 그의 뺨을 스쳤다.
그만큼 거리가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