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도아가 중얼거렸다.
“내가 쿠낙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하하 실적을 올렸군. 그럴 거라고 쿠낙이 생각한다고?”
“뭐어, 그대가 울어 준다면, 그건 그저 마검에게 보너스겠지. 아주르 나자크는 마검에게 특별한 존재니까.”
도아가 제 잔을 내밀었다.
“나도 술이 필요한 거 같아.”
“한 잔 더 마시면 토할 거 같은데, 토해 버리기에는 아까운 술이라네. 물이나 마시게.”
“치사하네, 폐하.”
도아가 투덜거리며 다시 냉수를 마셨다.
“어쩐지 물에서도 술맛이 나.”
“취했군.”
“취했다니까.”
도아가 눈을 찡그렸다.
“…… 스쳐 지나간다고 해서 진심이 아닌 건 아닌데…….”
그녀도 그녀 자신이 여행자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겪는 모든 게 게임 속 이야기도 아니고, 현실인데.
어떻게 괴롭지 않겠어?
어떻게 기쁘지 않겠어?
도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했다.
로베른의 술잔에서 얼음이 녹아 무너져내리며 짤그락 작은 소리를 냈다.
“좋아.”
도아가 “흥.” 하고 말했다.
“쿠낙의 생각은 잘 알았어. 그리고 말했다시피 거기에 동조할 생각도, 협조할 생각도 없어.”
“그렇다면?”
“내 방식대로 할 거야. 일단 맛있는 걸 잔뜩 먹이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로베른은 눈을 깜박였다.
“먼저 먹을 걸로 잡는 게 중요하다고 그랬거든. 맛있는 걸 먹으면 행복하잖아. 그럼 역시 죽기보다는 살아서 맛있는 걸 더 먹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
“간단하군.”
“그렇지? 내일 도아 양이 저녁 메뉴로 감자 그라탕을 할 텐데, 그건 먹고 죽어야 하니까 오늘은 못 죽겠습니다. 그러는 거지.”
“흐음.”
“천일야화라고 알아?”
“모르겠는데.”
“그거랑 똑같은 거야. 내일 메뉴가 궁금해서 죽지 못하겠다!”
도아가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갑자기 내가 짜잔, 하고 쿠낙 마검를 처리했어요. 하는 거야.”
“완벽해 보이는 계획이군.”
“그치?”
도아가 배시시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해도 좋아. 나는 내 방식으로 할 테니까. 쿠낙이나, 아니면 로베른이 날 얄팍하다고 생각하면, 뭐 좋아. 내가 둘의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녀가 뺨을 긁적였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싶은 방식대로 할 뿐이지. 쿠낙의 말도 내 멋대로 해석할 거야.”
“예를 들면?”
“쿠낙이 나에게 목숨을 맡길 정도로 나를 신뢰하고 있구나, 하고.”
“하하하.”
로베른이 웃음을 터트렸다.
“왜? 사실이잖아? 맞잖아?”
“확실히, 그렇지.”
웃음을 참으며 말하느라 그의 말이 끊겼다.
“B급은 긍정적이군.”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으니까.”
도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고아로 사는 건 녹록지 않으니까, 긍정적으로 살지 않으면 날 긍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 적어도 거울 속의 날 보고 웃으면, 웃음이 돌아오잖아?”
괜찮아, 김도아.
김도아, 멋지다.
김도아, 잘한다.
우리 도아 최고다.
일단 나 자신을 격려해서 일으킨다.
그다음, 상대방의 반응을 내 것으로 받지 않는 건 조세핀에게 배웠다.
조세핀은 엘리바스나 라크샤샤가 뭐라고 해도 일절 상관하지 않으니까.
로베른이 미소를 지어서 도아가 물었다.
“왜 웃어?”
“아니, B급이 의외로 귀엽구나. 하고.”
“헉, 뭐야. 아까 낮에 날 땅바닥에 처박은 사람이 할 소린가?”
“낮에는 안 귀여웠거든.”
“너무하네.”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조금씩 잠기기 시작했다.
도아는 급격하게 졸음이 몰려오는 걸 느꼈다. 눈을 비비며 도아가 작게 하품했다.
“그런데, 폐하.”
“고하게.”
도아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폐하도 그럼 그렇게 생각해?”
“뭘?”
“내가 얄팍하다고.”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조금씩 뭉그러지기 시작했다.
‘어라, 진짜 졸린데?’
순간 꾸벅 졸았다가 도아는 정신을 차렸다.
이렇게 갑자기 졸릴 수가 있는 건가?
너무 졸려서 뇌가 강제로 셧다운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짐은 그대의 얄팍함을 좋아한다네.”
“뭐야, 결국은…….”
로베른은 뭔가 중얼거리는 도아를 바라보았다.
고개가 앞으로 끄덕거리더니 결국 앞으로 툭 상체가 숙여진다.
그녀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기 전에 다른 손이 그녀의 이마를 받쳤다.
로베른이 말했다.
“엿듣는 건 악취미 아닌가?”
“엿듣지 않았습니다.”
쿠낙이 대답했다.
“그래?”
로베른이 되물었지만, 쿠낙은 대꾸하지 않았다. 살짝 손을 늦춰서 조심스럽게 그녀를 테이블 위에 눕혔다.
도아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정하다.
자신을 죽여 주기로 약속한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다.
‘이 녀석도 제정신은 아니지.’
로베른은 차갑게 쿠낙을 바라보았다.
‘하긴, 제정신인 S급이 존재할까?’
차가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제정신으로 S급을 하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야말로 제일가는 미친놈인 게 틀림없었다.
쿠낙이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도아 양, 여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들어가서 주무세요.”
하지만 역시나 도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살 흔들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데려가서 눕혀 주지?”
로베른이 잔을 들며 덧붙였다.
“같이 눕지는 말고.”
“…… 종종 그쪽을 패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멋진 수컷을 향한 열등감 때문일까.”
“하.”
쿠낙은 경멸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도아를 안아 들고 방으로 향했다.
“…… 스쳐 지나가도 진심인가.”
로베른은 피식 웃고 제 잔을 전부 비웠다.
❖ ❖ ❖
다음 날 아침 도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왜, 다 같이 마셨는데, 나만.”
“됴아 님, 개안으세여?(괜찮으세요?)”
“어지러워. 머리 아파.”
도아가 중얼거렸다.
베리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늑대족들에게 달려갔다.
“어째서 베리도 저렇게 쌩쌩하지?”
억울한 목소리로 말하자 쿠낙이 답했다.
“베리는 어제 음료수만 마셨으니까요.”
도아는 그런 약속을 하게 해 놓고도 태평한 쿠낙을 잠시 노려보아주었다.
쿠낙은 도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쑥스럽게 웃었다.
‘와, 진짜.’
당신이랑 나랑 사랑 고백을 한 것도 아니거든요.
‘하지만, 쿠낙에게는 그 정도의 일이었다는 거지.’
좋다.
‘나는 내 일을 할 거니까.’
도아가 결심하고 마주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쿠낙은 약간 당혹한 표정이었다.
“됴아 님, 여기여.”
베리가 달려와서 컵을 내밀었다.
나무 컵 안에 알 수 없는 액체가 출렁였다. 슬그머니 프란츠 쪽을 바라보니 늑대는 씩 웃어 보였다.
“듁치 해소제래여. 쁘란쯔가 졌어여.(숙취 해소제래여, 프란츠가 줬어요.)”
“어…음…….”
고민이 되었지만, 지금 이 두통과 어지럼증을 멈춰 준다면 기꺼이 마실 수 있었다.
도아는 걸쭉한 액체를 단숨에 삼켰다.
“…….”
그대로 도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웨엑.”
한바탕 변기를 붙잡고 온갖 짓을 하고서 도아는 완전히 진이 빠졌다.
속이 위아래로 다 텅 빈 기분이었다.
늘어져 있다가 목욕을 하고 나니 약간 살아났다.
“숙취가 이렇게 끔찍한 건지 몰랐어요.”
“속을 채우시는 게 좋을 거예요.”
레―소소가 수프를 들고 다가왔다. 걱정스럽게 도아를 살피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 주변에는 전부 술을 잘 마시는 사람뿐이라. 어제 말릴 걸 그랬어요.”
“아뇨, 마실 때는 좋았거든요. 다음부터는 적당히 마셔야겠어요.”
도아가 중얼거리며 수프를 받았다.
맑은 고기 국물과 채소를 듬뿍 넣어 만든 수프였다. 수프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게 들어가자 속이 훨씬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조금씩 수프를 먹고 있는데 쿠낙이 물었다.
“이렇게 마셔 본 적이 처음입니까?”
“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로베른이 물었다.
“평소 주량이 어느 정도 되길래?”
“평소…….”
도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생각해 보니 술을 마셔 본 적이 없네.”
그 말에는 쿠낙도, 로베른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을 마신 적이 없다고? 전혀?”
쿠낙은 당황해 물었다.
“그럼 전에 저와 마셨던 포도주가 처음이었습니까?”
“네, 렌시아 와서 마신 게 처음이네요.”
도아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로베른이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앞으로는 에일이나 마시도록.”
“저도 찬성합니다.”
이어 로베른이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짐이 술도 못 마시는 애를 붙잡고 경계했다니. 진심으로 사죄하네, B급.”
두 남자의 애 취급에 도아는 투덜거렸다.
못 마신 게 아니다, 안 마신 거다.
일이 바빠 죽겠는데 돈을 내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액체를 사서 마실 필요가 있느냐.
딱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도아는 따뜻한 수프 안에 든 근채류를 스푼으로 살짝 떠서 먹었다.
감자와 연근 사이의 식감이 입 안에서 부드럽게 뭉그러진다.
“맛있다.”
“다행이에요. 도아 님께서는 요리를 무척 잘하시니까. 혹시 맛없으면 어쩌나 하고 엄청 걱정했어요."
“에이, 남이 해 준 건 다 감사히 먹어야지.”
도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저 수프를 마셨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조합이 따라붙는다.
‘나라면 여기에다가 코코무 풀이랑 로프트 씨앗을 조금 넣어서……. 아, 고기도 두 종류로 해서 육수를 냈을 거야. 양파절임 올려도 맛있겠다.’
상상으로나마 여러 가지 조합을 해 보는 것도 즐겁다.
‘나중에 만들어 봐야겠다.’
속이 따끈따끈하고 든든해지자 살 것 같았다.
“어떠세여, 됴아 님?”
베리가 걱정스럽게 물어 와서 도아는 활짝 웃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다행이에요.”
베리가 휴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도아가 웃으며 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베리는 “에헤헤.” 하고 웃으며 귀를 뒤로 바싹 접었다.
이미 짐은 베리가 거의 정리를 해 둔 뒤여서 도아는 잔짐만 마저 챙기고 회관을 나섰다.
“이제 가시는군요.”
레―소소가 쪼르륵 달려왔다.
“꼭 산―모아에 들러 주세요.”
몇 번이나 반복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해서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레―소소는 언제 출발하시나요?”
“저희도 내일쯤 추가 인원이 도착한다고 하니, 내일 출발 예정이에요.”
“그럼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레―소소.”
도아가 우아하게 인사하니, 레―소소가 뺨을 물들이고 한껏 우아하게 마주 인사했다.
“저도 만나서 영광이었어요, 도아 님.”
킨즈 일행도 눈치 보지 않고 다가왔다.
“이렇게 헤어지니 아쉽네요.”
“이제 어디로 가시나옹?”
“혹시 누비 마을로 가세요?”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음은 누비 마을에 들를 거 같아요.”
모험가 길드 지점이 있는 큰 마을이었다. 거기서 소식도 듣고, 식량이나 여러 가지 소모품의 보충도 할 예정이었다.
“그럼 다시 만날 수도 있겠네요.”
헤더가 환하게 웃었다. 킨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저희에게 인사 한 번만 해 주세요. 그럼 다음 날 의뢰가 물밀듯 들어올지도 몰라요.”
“킨즈.”
“왜? 인맥이 중요하잖아.”
“그걸 노골적으로.”
“말하니까 솔직한 거지.”
킨즈와 헤더가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도아는 메이를 떠올렸다.
‘인맥! 무조건 인맥이에요!’ 하고 눈을 부릅뜨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서브 퀘스트 인맥이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은 거 같은데.’
높은 사람들은 위기에 잘 안 빠지나?
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마을 끝 쪽에서 누군가가 기수를 타고 달려왔다.
‘아, 말이다. 좀 작지만.’
몽골마처럼 작달 만한 말이었다. 말 뒤쪽에는 깃발이 꽂혀 있었다.
‘붉은색에, 길드 문장.’
“쯧.”
그때 누가 혀를 찼다. 힐끗 돌아보니 쿠낙이었다.
‘쿠낙이? 혀를 찼어?’
저 말이 대체 뭔데?
"엇, 모험가 길드 긴급 파발이네요.”
“빨간 깃발 처음 봤다옹.”
킨즈와 스팟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사이에 말이 도착해, 말 위에 올라탄 툴레족 모험가가 휙 말에서 뛰어내렸다.
“S급 모험가 쿠낙 샌델 님과 로베른 님께 긴급 의뢰입니다.”
돌돌 말려 인봉 된 두루마리를 파발이 두 사람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둘이나? 동시에 호출한다고?”
로베른의 목소리에 희미한 짜증이 섞였다. 도아는 궁금했지만 참았다.
파발은 두 사람에게 깊이 인사하고는 말했다.
“그럼 전 다음 일이 남아 있어서.”
그리고는 깃발을 파란색으로 바꿔 달고는 말을 타고 떠났다.
인봉을 떼고 두루마리 내용을 살펴본 로베른은 두루마리를 도아에게 내밀었다.
“내가 봐도 돼?”
“B급을 두고 가게 됐으니, 무슨 일인지 확인은 해 봐야지.”
도아는 두루마리를 펴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A급 던전이? 한 번에 다섯 개?”
도아는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다.
“이럴 수도 있어? 게다가 하나는 벌써 넘쳤네?”
“이렇게 뒤늦게 던전이 한 번에 등록되는 일은 드문데 말이야.”
“계층 던전일 가능성이 높겠지요.”
쿠낙 역시 같은 내용의 두루마리인 거 같았다. 로베른이 눈을 찡그렸다.
“어쨌든 의뢰가 들어왔으니 어쩔 수 없지.”
쿠낙이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아 양, 혼자서 가실 수 있겠습니까?”
도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같이 가면 안 되나요?”
로베른이 도아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B급은 B급이니까.”
‘아닛! 등급이 발목을 잡는단 말인가?’
"그래도 A급 던전 단독 공략하기도 했고…….”
“계층 던전이면 더 골치 아픈 일이 많아질 테지. 다른 파티에 혼자 들어가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고. 짐도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는데?”
“저도 도아 양이 굳이 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아는 로베른과 쿠낙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두 사람이 동시에 반대하는 일이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기는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