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모험가가 전부 짐 같이 좋은 사람만 있지는 않다네.”
로베른의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우리는 파티인데. 보통 파티 단위로 의뢰가 오는 거 아냐?”
쿠낙이 빙그레 웃었다.
“아직 등록된 정식 파티는 아니니까요. 파티로 등록되려면 4인이 되어야 합니다. 2인 파티나, 3인 파티는 정식 파티는 아니랍니다.”
“그랬구나. 한 명 더 필요하구나.”
“B급 파티에서 더 격이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로베른의 말에 도아가 답했다.
“S급 파티를 노리고 있습니다.”
쿠낙은 걱정이 되어 도아에게 연신 가는 길과 지리를 다시금 설명했다.
“아시겠나요?”
“네, 걱정하지 말아요.”
도아가 제 가슴을 툭툭 쳤다. 쿠낙은 그런 도아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도아 양은 경계심이 없으니 말입니다.”
“아닌데요? 경계하면 김경계, 김도아인데요?”
“그런 사람은 부상자를 둘러메고 와서 치료해 주지 않습니다.”
그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서브 퀘스트라고 아실지는 모르겠는데 말입죠.
“모험가들이라고 다 좋은 사람은 아닙니다.”
아, 또 이 이야기다.
어쩐지 자신을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생각하는 거 같아서 도아가 되물었다.
“쿠낙도요?”
“네, 그럼요.”
쿠낙이 상쾌하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도아를 끌어안았다.
“?!”
“약속할 때까지 안 놓아 드릴 거예요.”
“잠깐, 쿠낙.”
당황하는데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조세핀 류 끌어안기에 내가 당할 줄이야. 그런데 이렇게까지 근력 차가 나도 되는 건가.’
물론 쿠낙은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몸무게도 그만큼 더 나가겠지만.
그래도 이쪽은 백 년 수련했는데.
물론 저쪽은 마검 소유자지만.
‘정말로 못 움직이겠네.’
끙끙거리던 도아가 억울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쿠낙이 그런 도아의 표정을 바라보고 하아 한숨을 내쉬며 몸을 숙였다.
“정말, 도아 양…….”
쿵쿵
얼마나 꽉 끌어안았는지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도아가 결국 항복 선언을 했다.
“약속할게요. 조심할게요.”
쿠낙이 한 번 더 도아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좋습니다.”
“쿠낙도 참 걱정이 많꾸악.”
뒤에 이상한 소리는 갑자기 로베른이 도아의 배를 꽉 눌렀기에 나온 소리였다.
사실 꽉 눌렀다기보다는 그쪽으로 끌어당겼다, 라는 표현이 옳겠지만 도아는 눌렸다. 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도아가 그의 팔을 붙잡고 밀어내려 했지만, 역시나 꿈쩍도 안 한다.
롤러코스터 안전 바에 끼인 기분이었다.
S급들은 다 이런 식인가?
“잠깐. 폐하, 너무 조이는데?”
“손 내밀어 보게.”
한 손으로는 배를 당겨 조르면서 손은 내밀라고?
뒤에 서 있어서 로베른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도아는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브로치가 떨어졌다.
“B급에게 특별히 내화 속성 브로치를 하사하지.”
“나 줘도 돼? 폐하는?”
“B급 같은 가난뱅이는 물건을 하나씩 가지고 다닐지 모르지만, 짐은 아니라네.”
“그럼 감사히 받지요.”
로베른이 그녀를 풀어주었다.
배가 눌린 건 브로치로 퉁치자.
쿠낙의 시선이 로베른을 향했다. 푸른 눈동자가 ‘그래서 뭐?’ 하는 식으로 그를 바라본다.
쿠낙은 밀려오는 제 감정을 빠르게 덮어 버렸다. 뚜껑을 열어 감정을 밀어 넣는 건 그의 특기였다.
이제 그는 열 살 소년이 아니고, 눈앞의 도아도 그때 그 소녀가 아니다.
형태 있는 물건을 선물해 주고 싶지만, 줄 수 없었다.
첫째로 저런 물건에는 오염이 잘 고인다. 그가 크리스털을 가지고 있으면 오염되어서 못 쓰게 망가지곤 했다.
그래서 아예 크리스털이 들어간 물건은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로 오염이 불러오는 불행이 전염될 거 같다, 하는 걱정.
쿠낙은 로베른에게서 시선을 내려 도아에게 향했다.
“나중에 그런 마법 아이템을 만드는 장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쿠낙.”
도아가 활짝 웃었다.
아주르 나자크가 아름답게 반짝인다.
쿠낙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 ❖ ❖
‘어쩐지 조금 쓸쓸한걸.’
솔로캠핑을 포기한 걸 아쉬워했는데, 막상 두 사람이 떠나가니 적막한 기분이었다.
힐끗 바구니 속의 베리를 바라보니 베리는 열심히 글자 공부 중이었다.
흔들리는 와중에도 어지럽지도 않은 듯 보였다.
‘공부하는 걸 방해할 수는 없지.’
도아는 해왕이를 쓰다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척이나 높고 쾌청한 여름 하늘이었다. 푸른 하늘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밀도 있는 뭉게구름들이 떠 있었다.
점점 북상하고 있는 와중이라 그런지 날씨는 그렇게 덥지는 않았다.
타박타박
길을 걷는 해왕이의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아, 좋네.’
오랜만의 평온함이었다.
쓸쓸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음속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좋다, 진짜.’
날씨도 완벽했다.
해왕이의 걸음도 느긋하고, 옆에서 공부에 집중하는 베리가 있는 것도 좋았다.
길은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
산을 올라가야 하니 좁고 구불구불한 길이 이어졌다.
‘며칠 쉬어 갈까?’
그러고 보니 여기 떨어져서 끊임없이 달리기만 했다.
‘죽을 고비만 몇 번이야?’
슬슬 휴식기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
베리도 그동안 고생했고.
도아는 해왕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해왕이랑도 오래 시간 못 보냈고. 그치?”
좋아, 며칠 쉬자.
냐냑세세를 언제 만날 수 있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니까.
마음을 정한 도아는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장소를 찾는 데에만 하루가 걸렸다.
베리가 수염을 움찔거리더니 ‘저쪽에 물이 있는 거 같아여.’ 하고 말해 주었다.
길을 벗어나 위쪽으로 올라가 계곡을 발견했다. 하지만 딱 마음에 드는 계곡은 아니었다.
도아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주변을 살폈다. 중간쯤에 완벽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폭포가 떨어지면서 그 아래 깊은 용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수영하기 좋은 맑고 깊은 물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다시 넓고 잔잔한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넓고 커다란 바위들이 주변에 가득했다. 정말로 훌륭한 계곡이 흐르는 게 보였다.
“와, 진짜 좋다.”
맑은 물이 시원한 소리를 내면서 콸콸 흐르고 있었다.
며칠 전에 비가 쏟아지더니 그 덕분인 듯싶었다.
“보니까 달빛조각도 건질 수 있는 거 같은데?”
“달빛조각이여?”
베리가 의아해하며 묻자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용 재료로 쓰이는 건데, 맑은 물에 달빛이 비치면 고이거든. 여기는 고일 거 같아.”
도아는 계곡 바로 근처에 오두막집을 세웠다.
‘설마 쓸려 내려가진 않겠지.’
집을 세우면서도 바위 위에서 균형을 못 잡고 미끄러지면 어쩌나 했는데, 놀랍게도 오두막 아래에서 나무로 된 지지대가 쑥 자라났다.
“우와.”
“와아.”
도아와 베리가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갇힌 마을에 들어갈 때는 제대로 살펴볼 시간도 없었는데, 이렇게 세워놓고 보니 늘어난 구조가 제대로 보였다.
이제 오두막은 디귿 자 모양이었다. 가운데 빈 부분은 포치다.
포치를 두고 양쪽으로 방이 마주 보고 있었고 방 사이에 부엌이 있었다.
“하나는 베리 방이야.”
도아의 말에 베리가 폴짝 뛰었다.
“정말여?”
“정말, 정말.”
도아가 웃으며 문을 열었다.
서늘하고 기분 좋은 공기가 오두막 안에 가득했다.
“댄버스 부인, 이번에는 며칠 편안히 놀려고 왔어요.”
환영한다는 듯이 도아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도아는 짐을 내려놓고, 해왕이의 안장을 풀어주었다.
해왕이는 몸을 한 번 푸르르 털더니 신나는 얼굴로 이리저리 둘러본다.
도아가 말했다.
“뛰어놀고 와도 괜찮아.”
“컹!”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왕이가 전력 질주해서 순식간에 숲속으로 사라졌다.
움직임이 가뿐하기 짝이 없었다.
도아는 옷을 갈아입었다.
얇은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고서 근처에서 적당한 나뭇가지를 두 개 잘랐다.
포치에 앉아서 느긋하게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베리도 얼른 옷을 갈아입고 포치로 나와서 마주 앉아 글자 공부를 한다.
베리가 모르는 게 있으면 하나씩 불러주고, 또 베리가 큰소리로 글자를 읽는 걸 들으면서 도아는 나무를 깎았다.
끝을 뾰족하게 마무리하면 적당한 고기잡이용 작살 완성이다.
도로 빠지지 않게 끝부분에 쐐기를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도아는 손안에서 쥐는 맛은 어떤지 이리저리 만져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물고기 구이를 먹자. 베리 것도 만들었어.”
도아가 작은 작살을 베리에게 건네주자 베리의 얼굴이 단숨에 환하게 빛나서 도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베리가 부모님을 잃은 건 그가 아주 어릴 때였다. 고양이족은 공동으로 육아를 하기 때문에 부모님이 안 계시는 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 아빠를 부르며 달려가는 아이들이 부럽기는 했다. 그래도 그에게는 데이지가 있었다.
그런데 마을 근처인지 어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던전이 넘쳤다.
순식간에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베리는 여동생을 데리고 도망쳤다.
툴레족들은 다섯 살이 되면 한몫한다고 인정을 받을 만큼 성장 속도가 빨랐다.
인간족이 너무 느린 거라고 툴레족은 말하곤 했지만.
데이지는 아직 네 살이어서 어렸다. 베리는 맨 처음에는 피난처로 향하려고 했다.
주변 어른들이 모두 ‘이런 일이 생기면 피난처로 가는 거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피난처 근처로 갔을 때 강렬한 비린내를 느꼈다. 코가 아플 정도로 톡 쏘는 냄새와 더불어서 고양이족 특유의 감이 그를 멈추게 만들었다.
나무 위에서 멈춰 서 있을 때.
스르륵
거대한 무언가가 그들의 옆으로 지나갔다. 베리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뭇가지를 굵은 촉수들로 감싸고, 커다란 눈동자가 데룩데룩 굴러 사방을 살핀다.
온몸의 털이 부풀어 올랐다.
‘죽는다.’
죽을 거야. 이대로 들켜서―
라고 생각한 순간, 아래쪽에서 피난처를 향해 달려가는 아이들이 나타났다.
파팟
거대한 마수는 순식간에 그들을 따라서 사라졌다.
“으악!!”
“꺄아악!”
비명이 들리고, 끔찍한 소리가 났다. 이어 커다란 문어처럼 생긴 마수는 피난처도 발견했다.
좁은 동굴 안으로 촉수같이 긴 다리를 집어넣어서 안의 고양이족들을 건져 올렸다.
콰드득 아드득
뼈째 사람을 씹으면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그리고 끔찍한 비명.
“히, 힉끅.”
데이지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베리는 얼른 여동생이 떨어지기 전에 붙잡았다.
‘도망쳐야 해.’
도망쳐야 한다. 여기서 멀리, 무조건 멀리 가야 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도망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로 노예상에게 팔릴 줄은 몰랐다.
인간들에게 새끼 고양이족은 관상용이든 뭐든 비싸게 팔리는 노예라고 했다.
암컷 고양이족 새끼는 더 비싸다며, 데이지가 먼저 팔려나갔다.
날뛰어도 소용없었다.
그다음은 베리였다. 모험가들은 그를 사서 던전의 좁은 곳으로 들어가 먼저 주변을 살피는 미끼로 이용했다.
무서워서 오줌을 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돌아오는 매가 너무 아파서 베리는 훌쩍이며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모험가들도 강한 마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이 전멸하는 틈을 타서 도망쳤다.
도망쳐서 숲속을 돌아다니다가 너무 배가 고파서 마을로 들어간 게 문제였다.
아니, 문제였을까?
베리는 힐끗 도아 님을 바라보았다.
도아 님이 시선을 마주치자 환하게 웃어 보였다.
베리, 예뻐. 정말 귀여워. 어쩜 이렇게 장할까?
우리 베리.
그런 말을 쏟아부을 때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간질간질해진다.
딱딱해졌던 부분이 도로 말랑말랑해지는 거 같았다.
부모님들이 항상 해 주던 아주르 나자크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사실인 게 아닐까?
‘아냐, 모든 아주르 나자크가 다 좋은 게 아냐. 난 도아 님이 좋은 거야.’
베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작살을 꼭 쥐어 보였다.
신발을 휙휙 던져 버리고 맨발이 된 도아가 말했다.
“베리는 얕은 데에 있어.”
“녜.”
돌아보는 눈이 다정하다.
베리는 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바위 위에서 도아가 물속 깊숙이 뛰어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은 깊고, 빛깔도 잉크를 푼 것처럼 새파란 색이었다. 폭포 가까이는 거의 검정에 가까운 색이었다.
깊이를 생각만 해도 오싹 소름이 돋는다.
‘으으.’
베리는 작살을 꼭 쥐고 얇은 물가를 들여다보았다.
‘고기가 있기는 한데…….’
엄지손가락만 한 물고기들이 휙휙 빠르게 움직였다.
저건 잡아도 먹을 것도 없을 거 같았다.
그때 다른 게 눈에 들어왔다.
‘아! 무늬소라다!’
베리는 얼른 손을 뻗어서 바위 위에서 이끼를 만끽하던 무늬소라를 떼어냈다.
그러고 보니 여기저기 제법 큰 무늬소라들이 있었다.
껍데기에 다양한 무늬를 띠고 있어서 무늬소라라고 부른다고 했다.
쫄깃한 소라살을 생각하니 입 안에 군침이 고였다.
베리는 고개를 들었다.
얼른 도아 님께도 이 소라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도아 님이 뛰어든 바위 위로 올라가 물속을 살폈다.
잠시 후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온다 싶더니 작살을 들고 도아가 푸핫 하고 올라왔다.
작살에 팔뚝만큼 커다란 물고기가 꽂혀 있었다.
“됴아 님!!”
베리는 흥분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도아가 물고기를 바위 위로 던지고 위로 올라왔다.
“어머? 베리, 예쁜 거 주웠네?”
“떠기, 떠기 마나여!(저기, 저기 많아여!)”
흥분해서인지 제대로 말도 못 하는 베리를 보고 도아가 웃으며 머리카락을 가볍게 짰다.
“그래? 많이 있어? 같이 주울까?”
“녜, 녜!”
양동이를 들고 무늬소라를 잔뜩 주웠다.
‘먹을 만큼만 먹고 나머지는 풀어줘야겠다.’
도아는 신이 나서 소라를 채집하는 베리를 보고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