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그 한마디에 레하의 붉은 갈색 눈동자가 다시 번득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묻는 어투도 은밀해졌다.
도아가 설명했다.
“이 벌레가 이렇게까지 자라려면 꾸준히 먹이를 줘야 하거든요. 그러니까 디아르가 먹는 음식이나 마시는 물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꾸준히 먹이를 준 거죠.”
레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설마 그래서 아까 디아르의 식사를…….”
“네, 다시 벌레를 활성화시키는 약을 탈까 봐 돌설탕으로 제한한 거예요.”
도아가 팔짱을 꼈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이쪽도 최대한 조심하는 게 좋지요. 약초사의 판단이라고 하면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요.”
물론 배고프게 돌설탕을 쪽쪽 빨고 있을 디아르에게는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레하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벌레가 저렇게 자라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말씀이시지요.”
“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다고 했죠? 저 벌레 때문이었을 거예요.”
레하가 뿌드득 이를 갈았다.
“감히, 산―다르크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지나가는 모험가로서 가문의 일에 참견하는 건 안 될 일이니―”
“아닙니다.”
레하가 덥석 도아의 양팔을 잡았다.
“도아 님이야말로 저희 가문의 큰 은인이십니다. 신뢰할 만한 외부인이 필요하니, 꼭 고견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도아는 당황했다.
“아니, 하지만 저는 처음 보는 사람이고―”
레하가 껄껄 웃고 말했다.
“세계수에 오랜 시간 기도해 온 신자로서 아주르 나자크님을 처음 본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디아르를 잃을 뻔한 순간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해결책을 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도아 님을 외부인으로만 대하겠습니까.”
도아는 다른 것에 깜짝 놀라 물었다.
“세계수 신자들이 아직 남아 있어요? 세계수는 베어졌잖아요?”
레하가 그 말에 싱긋 웃었다.
“눈에 보이는 게 사라졌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사라진 건 아니지요. 세계수가 단순히 물리적인 세계의 나무일 리 없으니까요.”
“그건, 그러네요.”
도아는 신기하게 레하를 바라보았다.
그녀야 세계수 여행사를 통해서 여기 온 데다가, 품에 세계수 가지도 들고 있다.
세계수의 존재를 믿는 게 당연하지만, 여기는 세계수가 베어 없어졌다는데도 세계수를 믿는 사람이 있다.
‘내가 세계수면 엄청 뿌듯할 듯.’
도아가 헛기침을 가볍게 했다.
“큼, 그러면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요.”
도아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서브 퀘스트에는 ‘범인을 찾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수사 과정(?)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은 거 아니겠나.
도아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도아 님.”
레하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게다가 중요한 이야기가 또 있어요.”
“뭡니까?”
“병을 완전히 고치려면 특수한 약재가 필요한데, 현재 저에게는 없거든요.”
“뭐든 말씀만 하시면 제가 구하겠습니다.”
“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백백소나무 송진이에요.”
백백소나무는 말 그대로 나뭇가지부터 잎사귀까지 전부 새하얀 소나무였다.
몸이 전부 흰색이다 보니 광합성을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다른 생물에 뿌리를 내려서 자라는데 자연형 던전에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였다.
한마디로 무척 희귀하다.
“구해 보겠습니다.”
레하의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그는 밝게 말했다.
‘역시 돈이 없나?’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백백소나무 송진이 구해지는 대로 약을 만들겠습니다.”
“네, 도아 님.”
답하고 잠시 뭔가 말하려는 듯했다가 그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제가 오자마자 손님을 너무 붙잡고 있었군요.”
“그러고 보니 용건도 이야기 못 했네요.”
도아가 중얼거렸다.
레하가 후후 웃었다.
곰이 웃는 건 울림통이 좋아서인지 낮고 따뜻한 소리가 난다.
“냐냑세세를 만나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가문에서 오랫동안 냐냑세세와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지만, 반드시 만나러 오신다는 장담은 할 수 없군요.”
“위치를 알려주시거나, 아니면 소개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도아의 말에 레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냐냑세세께도 전갈을 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단 급한 용무를 해결하자 도아의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레하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자마자 도아는 값비싸고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완전 피곤해!”
해왕이를 타고 몇 시간이나 비행을 했는데 거기다가 착륙하자마자 일에 시달리지 않나.
도아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와, 감촉 좋다.”
현대에서는 합성섬유로 가벼운 가격에 만들어낼 수 있는 감촉이겠지만, 이곳은 전부 천연이다.
이런 매끈한 감촉을 만들어내려면 엄청난 공이 들어간다.
“저두 디텼어요.(저도 지쳤어요.)”
슬그머니 베리가 다가와서 도아 옆에 끼어 누웠다.
곰족을 위한 소파라 그런지 둘이 누워도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발치에 해왕이가 파고들었다.
“잠깐만 쉬자…….”
도아가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조금 이따가 짐도 풀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잠시 후 방 안에는 쌔근쌔근 잠든 숨소리만 들려왔다.
❖ ❖ ❖
엘몬드 공작은 도아의 답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어 보았다.
[진짜인 걸 어떻게 알아?]
그는 거기에 대해서 수십 개의 답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답이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이쪽이 조금도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였다.
애초에 믿을 생각이 없다면 아무리 증거를 가져다 대도 믿지 않는 법이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돌릴 길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답장을 보낸 거면 희망이 있는 게 아닐까?”
주군의 중얼거림에 아칸이 고개를 들었다.
“공녀님께 받은 편지 말입니까?”
“그래, 진짜로 믿지 않았으면 이런 답장도 안 했을 거야. 그냥 던져버렸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안 믿어.’라고 했을 텐데. 질문형인 건 희망이 있다는 거지. 안 그래?”
“그래 보입니다.”
아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회색 늑대족은 주군의 말이 무조건 다 옳다는 태도였다.
에크하르드는 고민하며 편지를 노려보았다. 아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공녀님께서는 양친께서 돌아가셨다는 걸 아십니까?”
“아니……. 아직 이야기 안 했는데. 아시겠지?”
“멀리서 오셨으면 모르셨을 수도 있지요.”
아칸의 말에 에크하르드는 눈을 감았다.
사실 알리려면 알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얄팍한 끈마저 끊어질 거 같아서.’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뿐이다. 게다가 조금만 알아본다면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먼저 안 좋은 소식을 전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누나도 그걸 묻지도 않고.
눈가를 꾹꾹 누르며 공작이 말했다.
“내가 먼저 그 이야기를 하면 우리 둘이 아무런 관련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 같아서…….”
아칸은 주군의 자신 없는 말에 놀랐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 그럴까?”
아칸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피붙이 아닙니까.”
에크하르드는 그 말에 편지를 내려놓았다.
“그게 전부일 때가 있지. 그걸로 충분치 않을 때도 있고.”
도아 누나는 어느 쪽일까?
“역시 만나러 가야 하나.”
가서 내 정성을 직접 보여줘야 할까?
편지로는 아무래도 한계가 명확했다. 글자로는 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대회의를 눈앞에 두고 비에나리에로 떠난다고 하시면 쿠쿨레가 기절할 텐데요.”
서기관의 이름을 대며 아칸이 말하자 엘몬드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러게.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생각에 잠겼다.
❖ ❖ ❖
하룻밤 푹 쉬고 나니 몸이 상쾌했다.
도아는 아침 명상을 하고 스트레칭을 끝냈다.
요즘은 베리도 함께 했다.
마나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본 훈련이었다.
산―다르크에서는 따로 식당으로 부르지 않고 각자 방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듯했다.
도아도 방에서 푸짐한 아침을 받았다.
그녀가 하는 요리가 가장 맛있긴 하지만 남이 해주는 밥상은 특별하다.
감사하게 맛있는 아침을 먹고서, 도아는 베리에게 글자를 가르쳐 주었다.
석판에 베리가 삐뚤빼뚤한 글자를 받아쓰기 하는 걸 지켜보는데 레하가 직접 방으로 찾아왔다.
“도아 님, 잠시 저와 걷지 않으시겠습니까?”
말투는 정원이라도 걷겠다는 투인데, 옷차림은 외출복이었다.
“네, 알겠어요.”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리는 공부하고 있어. 해왕이도 베리랑 있어 줘.”
해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도아가 해왕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며칠간 계속 그리핀으로 하늘을 날았으니, 해왕이도 피곤할 터였다.
베리도 오늘은 얌전히 인사했다.
“다너오떼요, 됴아님.(다녀오세요, 도아님.)”
“응. 갔다 올게.”
그녀도 외출복으로 옷을 갈아입고서 레하의 뒤를 따랐다.
역시나 정원을 걸을 것처럼 말해두고 레하는 정원 뒤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등산……!’
완만했던 길은 이제 완전히 산길로 변했다.
산길이 워낙 험해서 그런지 산과 저택 정원 사이의 경계가 없었다.
‘물론 이 산을 넘어서 쳐들어오겠다는 미친놈은 없겠지. 아니다. 그런 생각하다가 한니발에게 당했던가?’
길은 한참 이어지고, 가파르고, 의외로 복잡했다.
갈림길이 계속 나타났다.
산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왜 나타나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나무나 돌 배치도……. 아, 일부러 비슷하게 만든 거구나.’
외부인이 들어오면 길을 잃어 헤매게 만든 구조 같았다.
“레하 님.”
“네, 거의 다 왔습니다.”
“아니, 그 문제가 아니라. 산책 가자고 하고 이렇게 등산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무척 화낼지도 몰라요.”
그 말에 레하가 도아를 돌아보았다.
도아가 씩 웃고 말했다.
“혹시나 레이디에게도 그런 실례를 하실까 봐.”
레하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미 했습니다.”
“이미!”
“제 아내에게 그렇게 했지요.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요.”
“잠깐만요. 그러면 데이트하자고 하고 그 드레스 차림으로 이 길을 오르신 거예요?”
“네에…….”
“어떻게 살아계신 거죠?”
“그냥 길 시작하자마자 제가 업고 이동했거든요.”
“아하.”
뭐, 그럼 인정이지.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산길은 험하게 바뀌었다. 약초사나 걸어 들어올까 싶은 길이었다.
돌길이 가파르니 발밑의 돌들이 무너지며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런 길을 레하도 도아도 거침없이 걸었다.
레하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부터 가는 곳은 저희 일족 중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 절 데리고 가도 되나요?”
도아의 솔직한 물음에 레하가 미소 지었다.
“어제 밤새도록 생각해봤습니다. 대체 누굴까? 누가 디아르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누가, 왜, 무슨 이유로?”
그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디아르는 제 하나뿐인 ‘레’입니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다른 후계자를 들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아내가 남겨두고 간 하나뿐인 핏줄인지라.”
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언젠가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경우 디아르가 없어지면 다음 ‘레’가 될 사람이 주로 범인 아닌가요?”
정석적인 도아의 대답에 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왜 디아르를 이렇게 오래 괴롭혔을까요? 게다가 왜 지금인지.”
“레―경합 때문 아닐까요?”
그 말에 레하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레―경합을 아시다니. 훌륭하십니다. 도아님. 비에나리에의 은밀한 부분까지 아시는군요.”
도아는 겸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모험가는 여기저기서 주워듣는 게 많으니까요.”
“이런 걸 주워듣는 것도 훌륭하지요.”
레하가 툭툭 제 무릎을 손가락으로 치며 말을 이었다.
“저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게 아닙니다만……. 레―경합은 일정 나이가 되어야 참가할 수 있습니다. 아직 디아르는 그 나이가 아니지요.”
“상대방도요?”
“네.”
‘그럼 뭘까.’
정석적인 적이 아니라면, 다른 어딘가에서?
“일단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독은 아니니, 분명 재력이든 뭐든 있는 사람일 거예요.”
도아의 말에 레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올라온 만큼 다시 아래로 가파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작은 산을 하나 넘은 듯했다.
“이제 다 왔군요.”
레하가 가파른 절벽 앞에 섰다.
담쟁이덩굴인지 뭔지 모를 덩굴이 우거진 절벽이었다.
덩굴을 한쪽으로 치우니 절벽 사이의 틈이 보였다.
레하라면 아슬아슬하게, 도아라면 넉넉히 지나갈 틈 사이였다.
그가 눈짓해서 도아는 절벽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반대쪽으로 걸어 나와 도아는 깜짝 놀랐다.
엄청나게 깊은 협곡이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아주 가느다란 틈으로 빛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하지만 빛이 끝까지 닿지 않아서 협곡 안은 어두웠다.
바닥에는 발목 정도의 높이로 잔잔히 물이 흐르고 있었다.
상당히 넓은 협곡이었다.
그리고…….
도아는 돌벽을 손으로 훑으며 감탄했다.
“반짝반짝 빛나네요!”
마치 돌에 별을 뿌려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건 처음 봤어요.”
“저희는 빛모래라고 부릅니다.”
“딱 맞는 작명 같은걸요.”
사금파리처럼 작은 빛모래들이 가득했다.
덕분에 빛이 안 드는 협곡 아래라도 어둡지 않았다.
물속에도 빛모래가 섞여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도아는 물속에 손을 넣어 양손으로 돌조각을 가득 퍼 올렸다.
작은 빛모래들이 사이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계속 빛나는 건가요?”
“네, 10년 전에 계곡에서 채취한 빛모래도 여전히 빛나고 있습니다.”
“와…….”
“하지만 조명으로 쓰기에는 상당히 빛이 약한 편입니다.”
“그렇군요.”
무드 등 정도의 밝기일까.
“저희가 여러모로 빛모래를 시험한 결과, 오염을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도아가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