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사실 약을 만드는 데는 백백소나무 송진이라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걸 구하는 게 어려워서요.”
도아가 턱을 문질렀다.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입니다.”
“…… 그렇군요. 얼른 구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제가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했군요. 산―다르크께서 수완이 좋으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럼.”
도아가 인사하니 틸다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무릎절하며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극진한 인사였다.
도아는 혀끝에 쓴맛이 맴도는 거 같았다.
마주 인사하고 도아는 자리를 떴다.
‘내 추리가 틀렸으면 좋겠는데.’
망신을 당하더라도, 그냥 틀린 거면 좋겠는데.
하지만 퀘스트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도아는 시종의 안내를 받아 레하의 집무실로 향했다.
똑똑
문이 열리고 집무실 책상에서 열심히 일하던 산―다르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습니까? 디아르는.”
“안정적인 상태로 보여요. 일단 식사도 지시해 뒀고. 산책도 괜찮아요.”
레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디아르가 밖에 나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릅니다.”
“백백소나무 송진은 어떤가요?”
“일단 사방에 연락을 해 뒀습니다.”
도아가 찬찬히 그를 살피고 물었다.
“파드 경에게 이야기는 들으셨나요?”
레하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아버지의 얼굴에서 일족의 영주로 얼굴이 변한다.
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둘기에 대한 보고라면 받았습니다.”
“파드 경이 절 엄청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던가요.”
“하지요.”
레하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럼 일단 제가 모아온 정보를 공유할게요.”
도아는 쪽지와 꼭 맞는 종이, 종이의 찢긴 결.
왼손잡이.
그러니 범인은 바로!
까지 함께 공유했다.
레하는 한순간 멍청한 얼굴을 했다.
그의 입에서 부정이 먼저 튀어나왔다.
“틸다가, 틸다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디아르가 아프면 가장 고생하던 게 틸다입니다.”
밤새 토하는 걸 받아내고, 열을 잰다.
며칠 동안 밤새 간병하는 걸 억지로 뜯어내기도 했다.
누구도 그렇게 헌신적이지는 못할 거였다.
“틸다는 제 아내의 젖자매입니다. 디아르를 부탁받았지요. 틸다는, 틸다는…….”
그의 말끝이 흐려지고, 초점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도아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어떤 위로가, 사실이 그에게 위안이 되겠는가?
도아는 최대한 사무적인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제 생각에는 아픈 사람을 간호하면서 받는 관심을 원하는 질환이 있는 거 같습니다.”
“…… 질환이라고요?”
“네, 그런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있더군요.”
도아가 천천히 레하를 바라보았다.
곰은 이번에는 비틀거리며 앉지 않았다.
그는 꼿꼿이 서서 도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택의 모든 사람들은 디아르가 아플 때마다 틸다에게 관심을 주었겠지요?”
위로하고, 걱정하고, 그녀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워 주고.
그야말로 달콤하고 맛 좋은 상찬.
그 상찬을 먹기 위해서는, 디아르가 절망적으로 꾸준히 아파야 한다.
“그렇지만.”
말을 더 하려다가 레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도아도 싱긋 웃으며 한발 뒤로 뺐다.
“일단 미끼는 던져 놨으니 한번 지켜볼까요.”
“미끼를요?”
“네.”
도아는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일단 디아르가 무리하면 안 된다는 사실도 말해 뒀고, 백백소나무 송진이 치료에 필요하다는 것도 말해 뒀어요. 식사도 시작했고요.”
도아가 레하를 바라보았다.
“틸다는 디아르가 완치되면 곤란하잖아요? 일단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면서 무슨 행동을 하나 보죠. 비둘기장도 감시해야 하고.”
어차피 백백소나무 송진을 구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레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파드는 믿을 수 있겠습니까?”
비둘기장에서 파드를 마주친 걸 책망하는 말일까.
도아는 최대한 느긋한 목소리를 냈다.
“그것도 지켜보면 알겠지요.”
레하는 가만히 도아를 바라보았다.
이 먼 남대륙, 세상 밖에서 온 아주르 나자크는 가벼운 목소리로 배신을 입에 올린다.
그는 화가 나기도 했고, 허탈해서 웃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칠채칠색(七彩七色)의 녹색 눈동자는 지독하게 고요하고,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깊은 숲 같은 침묵을 선사한다.
레하는 그 눈동자에 드리운 그림자를, 염려를 발견했다.
레하는 그제야 그녀에게 감사할 때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하지 못한 일을 기꺼이 도맡아 해 주고 있는 그녀가 아닌가.
“감사합니다. 도아 님.”
커다란 곰이 거체를 굽혀 인사하자, 도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직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걸요.”
그러나 확신의 밤은 곧 다가왔다.
❖ ❖ ❖
틸다는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옥상으로 올라왔다.
잠시 바람을 쐬는 듯 숲을 바라보며 어깨의 숄을 다듬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한참 후에 틸다는 비둘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부상 표시가 된 비둘기를 들고 나온 틸다를 파드가 덥석 붙잡았다.
틸다는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파드?”
파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틸다가 웃었다.
“뭐야, 왜 그래. 비둘기 날리러 왔어? 무슨 일인데.”
“너야말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긴, 비둘기 날리러 왔지.”
태연한 대답이었다.
오히려 파드가 한풀 기세가 꺾일 정도였다.
“이거 부상 당한 비둘기야.”
“어머? 정말? 몰랐어. 내 정신 좀 봐.”
“…… 어디로 보내는데?”
“넌 몰라도 돼.”
틸다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파드가 되물었다.
“누군데?”
“몰라도 된다니까 왜 그래.”
파드와 틸다 역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파드가 엄격하게 말했다.
“산―다르크께서 비둘기장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을 검열하라고 말씀하셨어.”
“그야 알지만, 나 진짜 이거 너에게 보여주기 싫어.”
“안 돼. 보여 줘.”
“…… 그럼 안 보낼래.”
“뭐?”
“안 보낸다고.”
틸다가 투덜거렸다.
“나중에 레하 님께 내가 허락받으면 되는 거잖아? 됐어. 파드, 치사하게. 나중에 디아르 님께 이를 거야.”
그러며 자리를 떠나려는 틸다를 파드가 붙잡았다.
“뭔데?”
틸다의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파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돼. 보여 줘.”
“너, 진짜 이럴 거야?!”
“맞아, 맞아. 파드, 그냥 보내시라고 해요.”
그때 문을 열고 도아가 들어오며 말했다.
파드가 당황해 도아를 보았다.
틸다 역시 놀라서 도아를 본다. 도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으니까 그냥 보내라고 해. 레하 님께서 허락하셨어. 틸다는 예외라고.”
틸다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녀가 파드를 밀쳐내고 도아에게 말했다.
“레하 님께서 그러셨다고요?”
“네.”
틸다가 미소 지었다.
달콤한 웃음이었다. 수줍은 유월 은방울꽃 같은 미소다.
“정말, 레하 님도.”
그러며 태연히 편지를 비둘기 발목에 묶고는 날려 보냈다.
도아가 픽 웃었다.
“방금 그거 부상 당한 비둘기라고 파드가 지적한 거 기억나요?”
놀라 틸다가 흠칫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도아가 비둘기를 따라서 가볍게 달려 나가 성벽 위에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순간 굳었다가 틸다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파앗!
다음 순간 커다란 그리핀이 날개를 치며 날아올랐다.
파드는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하늘을 나는 기수는 지극히 드물다.
깜짝 놀란 전서구가 날개를 파닥이며 비틀거리다가 속도를 높였다.
그리핀은 훨씬 더 높이 날아올라 유유자적 비둘기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틸다의 표정이 굳었다.
누가 봐도 그녀가 날린 비둘기를 쫓는 모습이었다.
틸다가 파드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파드가 낮게 말했다.
“안보와 관련된 일이니까 너와는 상관없어.”
“파드!”
파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믿고 싶지 않다.
틸다가 범인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건지, 믿고 싶지 않은 건지 자신도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는 기도하듯 멀어지는 그리핀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기도하는지 그도 알 수 없었다.
❖ ❖ ❖
태양이 산 너머로 낙하하고 있었다.
천천히 느릿하게 하루의 종말을 고하고 있다.
집무실에 서 있는 사람들은 카펫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레하와 도아 그리고 틸다였다.
툴레들은 인간과 다르게 피부색이 변하지 않는다.
태연자약하게 앉아 있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 있는 걸로 긴장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제가 디아르님을 아프게 했다고요?”
틸다의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도아가 물었다.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말도 안 돼. 이건 모함이에요. 레하 님!”
틸다가 소리 지르며 레하를 바라보았다.
도아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말했다.
“그럼 증거에 대해서 설명해 보세요.”
“그 종이는 누구든 쓸 수 있는 거예요. 게다가 오늘 보낸 편지는 정말 아무 내용도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아닌 게 아니에요. 백백소나무에 대해서 적고 있잖아요? 이 정도 암구호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서 쉽게 풀 수 있어요.
도아가 틸다를 바라보았다.
“게다가 그 비둘기는 산―다르크에서 길들인 비둘기도 아니고요.”
“제가 그런 비둘기인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럼 왜 그 비둘기를 비둘기장에서 꺼냈나요?”
“아무 비둘기나 꺼낸 거예요!”
“그럼 이 내용은요?”
“그 암구호는 당신이 적당히 짜 맞춘 거겠죠.”
틸다가 목덜미 털을 곤두세우며 도아를 노려보았다.
도아는 ‘우와.’ 하고 감탄했다.
“죽은 마법사에게서 나온 필체와 당신이 보낸 쪽지의 필체도 일치해요.”
“그것도 당신 말이죠!”
도아는 이 뻔뻔함에 기가 찼다.
어떻게 할까, 하는데 알림을 알리는 빛이 반짝였다.
도아가 퀘스트 창을 열었다.
최후의 일격을 가하자!
―틸다의 목걸이를 조사하자.
‘오.’
도아는 틸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에는 로켓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도아가 말했다.
“그럼 그 목걸이를 한 번 줘 보시겠어요?”
틸다가 크게 흠칫했다.
“왜요?”
목소리가 날카롭게 흔들린다.
“거기에 뭔가가 있는 거 같아서요.”
“싫어요. 어머님이 저에게 주신 목걸이예요.”
도아가 레하를 바라보자, 레하가 말했다.
“틸다, 목걸이를.”
“싫어요! 왜 저 사람 말을 듣는 거예요, 레하 님! 싫어, 싫어요. 싫어. 차라리 죽어 버리겠어요!”
창문으로 달려가는 틸다를 레하가 붙잡았다. 거칠게 그가 목걸이를 잡아당겼다.
툭
은 목걸이는 쉽게 끊어졌다.
도아에게 레하가 목걸이를 던졌다. 도아는 로켓을 열어보았다.
안에는 유리로 만든 둥글납작한 아주 작은 병이 들어 있었다.
병 안에는 반쯤 남은 투명한 액체가 찰랑였다.
“이게 뭐죠?”
“…….”
틸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레하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로 도아를 쏘아보았다.
“틸다 님. 이게 뭔가요?”
도아가 다시 묻는다.
“틸다.”
레하가 그녀를 부르자 틸다가 비명처럼 입을 열고 소리쳤다.
“너 때문이야!”
도아가 놀라 ‘나?’ 하고 입모양만 내며 자신을 가리켰다.
틸다는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레하를 돌아보았다.
틸다의 눈동자가 타올랐다.
“너야, 다 너 때문이야! 레하!”
도아도 깜짝 놀라는 그다음 순간 빛이 반짝였다.
‘범인은 이 안에 있어’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도아는 순식간에 몰입이 깨지는 걸 느꼈다.
이 상황에서 그녀만 떨어져 나온 듯한 괴리감이 확 느껴졌다.
‘이놈의 퀘스트 창이 있는 이상, 난 절대로 제삼자를 벗어나지 못할 거 같네.’
마음속 한구석이 차갑게 식는다.
도아가 그러건 말건, 사태는 흘러갔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란 듯 레하가 틸다를 잡은 손을 놓았다.
오히려 틸다가 달려들어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왜! 왜! 왜 딜랑카를 선택했어! 왜!!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레하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틸다. 난 한 번도 그런 말을 한 적 없어.”
“거짓말!”
틸다가 소리쳤다.
“난 알아! 네가 날 계속 사랑했다는걸! 신분 때문에 딜랑카를 선택했지만―”
그녀의 말을 끊고 레하도 마주 소리쳤다.
“난 딜랑카를 사랑해!”
“거짓말!”
“열두 살 때부터 딜랑카가 내 인생의 중심이었어! 난 그녀에게 완전히 푹 빠져버렸으니까!”
“거짓말! 그럼 왜 나에게 잘해 줬어!”
“딜랑카가 널 소중히 여겼으니까.”
“아니야. 하지만 나에게 꽃도 가져다주고. 나를 배려해서 선물도 줬었잖아. 외부에 다녀올 때마다 늘―”
“딜랑카가 부탁했으니까.”
틸다가 입을 벌렸다. 몸이 파르르 떨린다.
레하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난 딜랑카를 사랑했고, 사랑하고 있어.”
“거짓말이야……. 왜, 왜 그렇게 말해. 레하. 왜 스스로까지 속이는 거야…….”
레하는 차가운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틸다를 바라보았다.
도아는 ‘우와.’ 하고 침을 삼켰다.
이건 치정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그럼 레하에게 실례지.’
레하가 낮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날 공격하지 그랬어. 왜 날 공격하지 않았어. 왜?”
틸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친다.
“내가 널 어떻게……. 어떻게 그러겠어, 레하.”
“그래서 5년이나 내 딸을 고문했나? 옆에서 지켜보면서? 빛모래에 대해 자료를 넘기고, 산―다르크가 무너지는 걸 보기 위해?”
레하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침착했다.
도아는 소름이 돋았다.
틸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에 눈이 번들거린다.
“그래, 산―다르크가 아니라면, 나와 함께 할 수 있잖아? 이런 가문, 레하에게는 짐만 될 뿐이야.”
도아는 그가 그녀의 목을 쥐는 순간 매달렸다.
“레하 님!”
“그래, 죽여. 네 손에 죽는다면 만족하겠어. 죽여 줘, 레하.”
“안 됩니다.”
도아가 붙잡은 그의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틸다는 제 목을 잡은 손에 매달리듯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까지 넘어갔는지, 무슨 자료가 넘어갔는지 틸다에게 물어봐야―”
쾅! 쾅! 쾅!!
그때 밖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창문이 파르르 떨며 비명을 내지른다.
도아는 창가로 뛰어갔다.
‘맙소사.’
푸른 불꽃이 환한 빛을 내뿜는다.
반 토막 난 빗자루를 타고 선회하는 좁쌀만 한 마법사가, 도아의 좋은 눈에 잡혔다.
산맥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