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쿠낙은 묘하게 들뜬 표정이었다.
도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가 제 뺨을 다른 손으로 쓸어내리고 말했다.
“화난 표정인 거 같은데요.”
“네.”
쿠낙이 빙긋 웃는다.
도아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쿠낙을 보다가 슬쩍 손을 놓았다.
쿠낙도 잡은 손을 순순히 놓는다.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원래 쿠낙은 잘 웃는 것 같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으음…….
‘대체 무슨 생각인지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도아가 슬금슬금 해왕이의 고삐를 잡고 말했다.
“그럼 갈까요?”
❖ ❖ ❖
도아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 모험가 길드 지점에 이야기를 넣었다.
지점장은 이런 곳에 S급 모험가가 둘이나 왔다는 점에 뒤집어지고, 셋이서 ‘떨어지는 태양의 도시’를 공략한다는 것에 두 번째로 뒤집어졌다.
파드도 아직 영지로 돌아가지 않고 있어서, 도아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얼른 돌아가라고 이야기했다.
파드는 펄쩍펄쩍 뛰었지만, S급 둘의 기세에 밀려 몸조심하고 꼭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한 후에야 떠났다.
도아는 식량을 다시 모았다.
냐냑세세를 만나는 길까지 사흘 치 식량만 구매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사정없이 두 달 치는 될 식량을 잔뜩 모았다.
작은 마을의 식량값이 순간 휘청할 정도였다.
그뿐 아니라 도아는 수리나 손질을 위한 금속, 가죽, 천 등도 구매했다.
보니까 스킬 레벨이 오른 댄버스 부인은 수리 시에 아이템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 더 완벽한 수리가 가능한 듯싶었다.
마지막으로 도아는 베리를 두고 고민했다.
‘같이 들어가야 하나.’
물론 던전을 공략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모르는데 베리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놓고 가는 것도 물론 걱정이 되는 일이나,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
“티어요! 또아 님이랑 깔래여!(싫어요! 도아 님이랑 갈 거예요!)”
베리는 도아에게 딱 달라붙어서 데리고 가달라고 화를 냈지만, 도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베리야. 이번에는 패널티도 있고. 어떻게 될지 몰라.”
“알디만……. 알디만 더아 님이 안 오시면 뎌는, 뎌는…….(하지만……. 하지만 도아 님이 안 오시면 저는, 저는…….)”
중얼거리는 베리를 도아는 안아주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베리야, 살아 있는 게 가장 중요한 거야. 그다음은 언제든지 와. ‘그다음’은 살아 있어야지 오는 거야.”
“물론 나도 죽을 생각은 없지. 물론이야. 하지만 베리는 너무 어리니까 그런 위험을 감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응, 돌아올게.”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지만, 베리는 할 수 있어. 괜찮아.”
오래오래 도아가 베리를 설득하는 모습을 로베른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결국 준비 기간 내내 설득한 끝에 베리는 시무룩한 얼굴로 떨어져 나왔다.
모험가 길드에서 베리를 맡아주기로 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길드장인 얀에게 보호를 맡기기로 이야기해 뒀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도아 일행은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까지는 검은 구름이 안내해 주었다.
가는 길마저도 쉽지 않았다.
넘치는 던전이라서, 마수의 수가 점점 더 증식했다.
도아 일행에게는 큰 위협은 아니지만, 그래도 던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기력을 소모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뭐랄까.
‘까다롭네.’
도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숲속을 가로질러 일주일.
그래도 길 안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도아는 던전 앞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왜 이름에 ‘도시’가 들어가는지 알 수 있었다.
마치 무너진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약 가로 4m 정도의 무너진 성벽이 느닷없이 솟아있고, 거기에 아치형의 문이 있었다.
그 문 옆에 동그란 구체가 떠 있다.
빨간색 익숙한 공 옆에 도아는 자신의 카드를 태그했다.
삑
구체의 색이 녹색으로 변했다.
차례로 쿠낙과 로베른도 자신의 카드를 태그했다.
“이걸로 이 던전을 공략하러 들어간 사람들 명단에 나도 추가됐네.”
“그리고 마지막이 되시길 빕니다.”
여기까지 안내를 해준 티하타가 정중하게 행운을 빌어주었다.
쿠낙에게는 말도 걸지 않은 티하타지만 이해할 수 있다.
도아는 감사를 담아 말했다.
“고마워요, 티하타님. 덕분에 여기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어요.”
“별말씀을요.”
도아는 새삼스럽게 긴장이 되어 배낭을 추어올렸다.
“그럼 들어갈까?”
도아가 운을 떼자 로베른이 말했다.
“B급은 기수에 타는 게 좋겠어.”
“동의합니다.”
도아는 대꾸 없이 등자를 밟고 해왕이에게 올라탔다.
저번처럼 절벽에서 느닷없이 추락하는 거라면 사양이다.
해왕이도 이미 모습을 그리핀으로 바꾸고 있었다.
“들어가면 물속이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환경일 수 있습니다. 단단히 정신을 차리세요.”
“응.”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먼저 가고 그다음 도아 양, 그리고 폐하가 마지막을 맡아주시죠.”
“짐에게 후위를 맡기다니, 시건방지구나.”
로베른의 말에 대꾸도 없이 쿠낙은 아치형 문을 통과했다.
도아도 바싹 붙듯 그 뒤를 따랐다.
마지막으로 로베른이 문을 통과했다.
셋 모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티하타는 무너진 성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부디 무운을…….”
❖ ❖ ❖
푹
발이 모래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고 생각한 순간 아래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유사다.
“?!”
순간 당황한 듯 해왕이는 네 다리로 버둥거렸다.
“해왕아, 날아!”
도아가 소리치며 고삐를 잡아당기자 미끄러지던 해왕이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유사에서 빠져나온 도아는 즉각 다른 두 사람을 건져냈다.
모래사막에 내동댕이쳐진 로베른과 쿠낙은 어처구니가 없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아 역시 이를 악물었다.
로베른이 피식 웃으며 헐렁해진 제 옷소매를 흔들어 보였다.
“그렇군, 이게 그동안 파티들이 전멸한 이유로군.”
쿠낙은 헐렁해진 제 장갑을 어떻게든 버클로 다시 졸라매고 있었다.
도아는 발이 등자에 끼워지지 않아 버둥거리다가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바지가 그대로 미끄러질 거 같아서 부여잡았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세 사람 모두 열한두 살쯤 되는 어린아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던전 입구는?”
“저쪽이었네만, 지금은 입구가 사라졌군.”
그가 가리킨 곳은 유사 바로 위였다.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유사 바로 위로 떨어지도록 허공에 멋지게 디자인되어 있었나 보다.
유사 가운데에는 뭐가 있을지 안 봐도 뻔했다.
개미지옥 같은 마수겠지.
“몸이 작아지니 적응이 어려웠겠지. 무기를 달고 있는 벨트가 바지째로 벗겨질 수도 있고 말이야.”
“부끄럽겠네.”
“왕은 무치이니, 짐에게 부끄러운 건 없다.”
뻔뻔스럽게 말하며 로베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가만히 있으면 곧 몰려들어 올 마수의 표적이 될 테지.”
도아는 짐에서 제 오두막 키링을 빼냈다.
“일단 재정비하자.”
❖ ❖ ❖
오두막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마수들이 들이닥쳤다.
저대로 앉아 있었다가는 마수들과 바로 전투를 벌여야 했으리라.
댄버스 부인이 일행이 쏟아낸 모래를 치우는 사이 도아는 제 방으로 들어왔다.
‘일단 옷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창문 밖으로 빙글빙글 허공을 도는 가디언들이 보였다.
고대 도시의 수호자.
‘한두 마리가 아닌데.’
도아는 툴툴거리면서 헐렁이는 신발을 벗었다.
대충 모래를 털어내고 옷을 다시 입는다.
소매를 접고 헐렁한 바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아! 댄버스 부인!”
도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혹시 지금 옷 내 사이즈에 맞게 수선 가능해요? 아니, 이건 좋은 옷이니까 이거 말고.”
도아는 가방에서 좀 더 저렴한 옷을 꺼냈다.
핑
허공에서 반짝이는 줄자가 나타났다.
휘리릭
줄자가 도아를 감고 돌았다.
도아가 내놓은 옷이 사라졌다.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시간이 걸렸다.
도아는 그 사이에 가방에 넣어뒀던 수선용 재료를 전부 꺼냈다.
‘제법 된다.’
커다란 소가죽이 3장.
도톰한 천이 10미터.
얇은 천이 10미터.
‘가죽은 아직 제작 스킬이 없지만, 천은 제작 스킬을 높이 올려놨으니까.’
그래도 몸에 꼭 맞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잠시 후 댄버스 부인이 옷을 가지고 돌아왔다.
도아가 입어 보니 사이즈가 몸에 딱 맞았다.
“다행이다…….”
가죽도 수선이 가능해서 그런지 벨트의 크기도 그녀에게 맞춤이었다.
“그러고 보니…… 가죽도 간단한 건 제작 가능한데…….”
일단 기본 제작 스킬은 전부 올려놔서 간단한 건 가능하다.
“혹시 신발도 가능해?”
댄버스 부인이 소가죽을 들고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음…….”
엄청 간단한 신발이었다.
모카신보다 아주 쬐끔 나았다.
북미 원주민이 신었던 모카신은 가죽 한 장이 밑창의 전부라 바닥에 뾰족한 가시가 있으면 바로 찔렸다.
내구성도 엉망이고.
하지만 그래도 이건 밑창을 덧댔으니 조금 나은가.
‘그냥 헐떡이는 신발을 신어야 하나?’
발에는 그게 좋겠지만, 전투에서는 최악이다.
‘일단은 사막이니까, 모카신으로 하자.’
그녀의 발에 맞춰서 제작된 신발이라서 편하기는 편했다.
채비를 하고 거실로 나간 도아는 두 사람에게도 댄버스 부인의 능력을 알렸다.
“하지만 수선하면 옷 크기가 줄어들어서 던전을 공략하고 나가면 쓸모없어지니까, 그 점까지 생각해서 수선하는 게 좋겠어요.”
도아는 수선용 천이 여유 있다는 점도 이야기했다.
“필요하면 제 천으로 제작하면 되거든요. 둘 다 특수천이나 귀한 물건이면 놔두고―”
“짐이 입고 있는 옷을 다 줄여주면 되겠군.”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둘 다?”
놀라 도아가 묻자 로베른이 피식 웃었다.
“B급의 가난뱅이 감각이 놀라운데. 옷이야 새로 구매하면 되는 것. 목숨이야말로 늘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라네. 머릿속에 새겨 두게.”
“헉.”
도아는 숨을 삼켰다.
“너무나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말이 없다니.”
“우매한 B급이로다.”
“물건을 소중히 하는 도아 양의 마음도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 위로는 안 먹혀요.”
도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로베른은 양팔을 벌려 능숙하게 댄버스 부인의 줄자에 간격을 내주며 말했다.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로군.”
“그럼?”
“무기지.”
“아.”
무기의 크기는 줄일 수 없다.
도아는 제 검을 꺼내 보았다. 세계수의 축복받은 검은 언제나처럼 강력했다.
도아의 현재 모습에 맞춰서 검의 크기와 균형이 변해 있었다.
“B급의 무기는 훌륭하군.”
“여러모로 축복받았지.”
도아가 중얼거리고 제 검을 도로 꽂아 넣었다.
그녀에 비하면 쿠낙이나 로베른은 제 모습에 비해 검이 너무 컸다.
“마검은? 크기 안 변해?”
“네, 하지만 저는 어릴 때부터 마검을 써 와서 어떻게든 적응할 거 같습니다.”
쿠낙의 말에 도아가 로베른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그럼 폐하네.”
“짐의 재능을 얕보지 말거라. 적응하는 건 문제도 아니나, 효율성이 문제라는 거다.”
“아, 그건 그러네. 지금 우리 몸 크기도 줄어들었고……. 작으니 체력도 달릴 텐데.”
“마나관도 작아졌으니, 마나량도 줄어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큰 무기를 쓰면 여러 가지 점에서 어렵겠지요.”
“그치? 아무래도 체력도 더 소모하게 되고…….”
도아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띠링띠링
서브 퀘스트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서브 퀘스트가 열립니다.
서브 퀘스트
마검 정화
마검이 세계수 가지, 아주르 나자크, 라이트 크리스털과 함께 격리되었습니다.
이제 안전하게 마검을 정화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방법은 이쪽을 클릭해 주세요.
보상
▸ 세계수 포인트
▸ 세계수의 축복받은 은화
‘갑자기?!’
살펴보니 ‘격리’가 퀘스트가 열리는 조건이었나 보다.
‘하긴 던전은 외부세계와 완전히 차단되니까. 죽어도 너네들끼리 죽어라, 인가.’
“잠시만.”
도아는 부엌에 가서 물을 올리는 시늉을 하며 퀘스트 창을 클릭해 보았다.
예전처럼 동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귀여운 SD 캐릭터가 된 메이 과장이 또 나왔다.
빛 속성 크리스털은 세계수의 선물로 본래 탈리스만에 박혀 있었습니다!
반짝이는 액세서리 3종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세계가 넘쳐흘렀을 때, 넘치는 오염을 빨아들여 정화하기 위해서 사도들은 탈리스만(talisman)을 사용했습니다.
‘그런 거였어??’
그러나 오염을 감당하기에는 크리스털의 용량은 너무 작았고, 결국 라이트 크리스털은 오염에 잠식당했습니다.
메이 과장이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였다.
변질된 라이트 크리스털은 인간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되어, 사도들은 이것을 봉인했습니다.
대충 알 것 같다.
발전소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남은 핵 연료봉을 봉인했다는 거네.
세월이 흘러 봉인은 잊히고, 사람들은 이 탈리스만을 발견해 무기에 이식한 후, ‘마검’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서 오염은 인간을 잡아먹고 희미한 자아마저 지니게 되었지요.
그리고 다 써먹은 핵 연료봉의 우라늄을 꺼내서 핵폭탄을 만든 인간.
‘캬.’
그래서 이 라이트 크리스털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짧은 순간일지라도 강력한 정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팟 하고 세계수 가지를 든 도아의 SD캐릭터가 등장했다.
아주르 나자크가 세계수 가지의 힘을 온전히 받아, 순간이나마 진짜 세계수의 힘을 빌리는 거지요.
눈을 감은 도아 캐릭터의 머리카락이 흰색으로 변했다.
정화의 힘은 강력해서 변질된 라이트 크리스털을 깨고, 그 안에 고인 오염을 전부 날려버립니다.
‘어? 그럼 마검이 사라지는 거야?’
네, 아쉽게도 변질된 라이트 크리스털은 사라집니다.
‘어라? 내 생각을 잃은 건가요? 지금 이거 실시간 방송이었어요?’
……하여간 딱히 문제는 없습니다. 차곡차곡 축적해 온 힘은 전부 사용자의 것이니까요. 문제는 바로 아주르 나자크!
도아는 입을 뻐끔거렸다.
‘실시간! 실시간인 거죠! 내 질문에 답 좀 해 줄래요?’
아주르 나자크라고 해도 한낱 인간, 과부하로 인한 각종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신중하게 선택해 주세요!
틱
도망치듯 화면이 꺼졌다.
도아는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