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뚀아 님! 또야 님!!”
달려드는 베리에게 받게 될 충격에 대비하고 있는데 라크샤샤가 베리의 목덜미를 잡아 멈춰 세웠다.
“달려들지 마라.”
“데성합니다…….”
베리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이다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 또아 님 마니, 마니 아프시…….”
도아가 웃으며 느릿하게 손을 뻗어 베리를 안아주었다.
“우리 베리, 잘 있었어?”
“우엥! 우에에엥!”
베리가 울음을 터트리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옳지, 옳지.
도아가 베리를 도닥여 주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 쿠낙. 안녕, 폐하.”
차례로 인사를 하니 멈춰 있던 두 사람이 그제야 움직였다.
냐냑세세도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언제 일어난 겐가? 몸은? 안 좋은 곳은 없나?”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파요.”
라크샤샤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당연한 거고. 다른 건?”
“그리고 오른 눈이 아직 아픈데…….”
슬쩍 살폈지만, 라크샤샤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고양이족이 마음먹으면 타인은 그들의 표정을 읽기 어렵다.
최고급 로얄블루 사파이어 같은 두 개의 눈동자가 빤히 도아를 바라보았다.
라크샤샤의 시선에 도아는 저도 모르게 점점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도아보다 창백한 건 오히려 쿠낙 쪽이었다.
그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입장이 된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쥐었다가 피기를 반복했다.
로베른은 비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어쩐 일인지 오늘은 망토가 없는 차림새였다.
도아는 심각한 분위기에 침을 삼키고 물었다.
“설마 실명했어요……?”
작게 묻자 라크샤샤가 명령했다.
“오른눈도 떠봐라.”
도아는 주춤거리며 천천히 오른눈을 떴다.
순간 찌릿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눈을 찌푸리게 되었다.
‘아…….’
아예 안 보이는 건 아니고 희미하게 주변이 보인다.
그녀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보이니?”
라크샤샤의 목소리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요.”
라크샤샤의 푸른 눈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럼 됐다.”
라크샤샤의 말에 성급하게 되물은 건 쿠낙이었다.
“계속 저 상태로 지내시게 되는 겁니까? 아니면 돌아오는 건가요?”
‘저 상태?’
도아가 얼떨떨해져서 물었다.
“혹시 저 아직도 눈에 금이 가 있어요?”
그거 좀 무서울 거 같은데?
라크샤샤가 담백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흰자가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 있다.”
“헉.”
도아는 숨을 삼켰다.
호러물에 나오는 사람처럼 변했단 말인가.
“저 직접 볼 수 있어요?”
“보렴.”
라크샤샤가 작은 거울을 내주었고 도아는 살그머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으아―”
진짜로 호러물 같았다.
“징그러워요.”
도아가 중얼거리자 라크샤샤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징그러워?”
앗, 하고 도아가 슬그머니 라크샤샤를 바라보았다.
라크샤샤가 눈을 부릅떴다.
“징그럽다고? 지금 너는 살아 있는 걸로 감사해야 해. 오른 눈이 보이는 것도 그렇고.”
어지간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라크샤샤였는데, 오늘만은 톤이 높았다.
높고 차갑다.
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도아의 앞을 쿠낙이 가로막았다.
“아닙니다. 도아 양은 저 때문에……. 차라리 저를 혼내십시오.”
라크샤샤는 어이없어져서 쿠낙을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자기가 도아에게 방망이라도 휘두른 줄 알겠다.
“하아.”
라크샤샤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 품 안에서 커피대를 꺼내서 빙글 돌려 입구 쪽을 가리켰다.
“제삼자들은 좀 나가주면 좋겠군.”
냐냑세세는 빤히 도아와 라크샤샤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다시 이야기하지요.”
쿠낙이 망설이자 라크샤샤가 노골적으로 말했다.
“얘 옷 다 벗기고 진찰할 건데, 인간은 옷을 벗은 모습을 친밀한 사이에만 보이지 않나?”
“나가겠습니다.”
“B급에게 할 이야기가 많은데, 지금은 아닌 거 같군.”
베리는 착하게도 도아를 한 번 더 꼭 끌어안아 준 다음 밖으로 나갔다.
단둘만 남게 되자 도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라크샤샤를 바라보았다.
라크샤샤가 도아 앞에 바싹 다가가서 섰다.
그가 커피대를 내려놓고 팔을 벌려 도아를 끌어안았다.
푹신한 털에서는 익숙한 커피 향이 났다.
“왜 다치고 다니고 그러니, 속상하게.”
“라크샤샤아아아…….”
저도 모르게 말꼬리가 늘어진다.
푹신한 털에 전신을 푹 파묻고 도아는 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라크샤샤가 말했다.
“저 마검이 뭐가 중요하다고, 그런 짓을 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요.”
“아둔한 것.”
“아픈 사람에게 너무해.”
“아프니까 이 정도로 끝내는 줄 알아라.”
라크샤샤가 몸을 떼며 홀랑 도아의 옷을 벗겨냈다.
“꺄악?!”
“어디 정말로 몸 한번 보자.”
라크샤샤는 진찰 도구를 꺼냈다.
잠시 후 라크샤샤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말했다.
“정말로 운이 좋구나.”
“에헤헤.”
“칭찬이 아니란다.”
“칭찬으로 받을래요.”
라크샤샤가 옷을 돌려줘서 도아는 주섬주섬 가운을 도로 입었다.
라크샤샤가 목소리를 낮췄다.
“마나관이 확장된 건 알지?”
끄덕끄덕
도아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샤샤가 이어 말했다.
“강제로 늘어나서 확장된 만큼 아직 얇고 불안정해. 요양하면서 안정시키는 게 좋겠다. 함부로 마나를 사용하다가 찢어지기라도 하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도아는 침을 꼴깍 삼켰다.
“천천히 아침저녁으로 명상 꾸준히 해 주고. 이대로 안정화를 시키면 30년분의 마나 수련을 얻은 게 되겠지.”
“얼마나 걸릴까요?”
“반년은 요양. 게다가 몸 상태도 안 좋아. 아마 지금은 어딜 건드려도 잘 부러지고 부서질 거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단단해지겠지만.”
“이해했습니다.”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샤샤는 한숨을 다시 폭 내쉬었다.
속이 쓰렸다.
어디 가서 얻어맞지 않고 다닐 만큼 훈련을 시켰는데, 왜 이런 너덜너덜한 몰골로 나타나는 걸까.
제자를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건 무척이나 기쁜 일이지만, 이런 일일 때만 보는 거라면 영원히 보지 않는 편이 낫다.
오랜 세월을 견뎌낸 고양이족은 오랜만에 무지근한 피로감을 느꼈다.
그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또 물어볼 것이 있느냐?”
“참, 라크샤샤. 나 ‘피트잔’을 봤어요.”
라크샤샤가 수염을 움찔했다.
“그 벌레를?”
“네, 약을 처방했는데. 아무래도 어떤 마법사 단체에서 사용하는 모양이에요.”
라크샤샤가 혀를 찼다.
“살충제 레시피도 기억하고 있지?”
“네, 있습니다.”
도아에게 레시피를 확인하고서 라크샤샤는 짜증 난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사람이란.”
“돌고 도는 거지요.”
라크샤샤가 문득 작게 웃고 말했다.
“우리도 제법 유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십 년만 있으면 네가 더 유명해지겠구나.”
“아, 그러네요. 역사서에 이름이 남으려나.”
도아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또? 그 남동생인지는 만났느냐?”
“아뇨. 그러고 보니 엘리바스가 다녀간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는걸요…….”
“아끼지 않고 부른 건 잘했다.”
라크샤샤는 도아가 괜히 긴급버튼을 쓰는 것을 주저할까 봐 빠르게 칭찬했다.
“다른 건?”
이어 하는 말에, 도아는 ‘그러고 보니’ 하고 말했다.
“라크샤샤 혹시 요정씨앗이라는 거 알아요?”
라크샤샤가 움찔하고 물었다.
“왜? 그게 필요하냐?”
“아뇨, 제가 하나 얻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몰라서.”
“세계수 가지가 있지?”
“네.”
“그것과 에너지원이 될 던전 코어를 같이 놔두면 부화할 거다.”
“그럼 안에서 요정이 나와요?”
“그렇겠지?”
라크샤샤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이어 말했다.
“하여간 처방전은 내줄 테니까, 까먹지 말고 꾸준히 아침저녁 약을 먹어라. 아니, 너에게 말하지 말고 밖에 인간들에게 말해야겠구나.”
라크샤샤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들어와도 되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우르르 일행이 들어왔다.
라크샤샤는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이 녀석은 이제 반년 정도 요양해야 해. 그러고 나면 멀쩡해질 테니, 걱정 안 해도 좋네.”
“반년이나 말입니까.”
쿠낙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아는 그를 달래려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그에게 먹히지 않을 거 같았다.
냐냑세세가 말했다.
“어차피 이제 곧 가을, 겨울이니까. 봄이 될 때까지는 여행도 어렵지 않은가? 미리 겨울을 지낸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네.”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냐냑세세가 슬그머니 라크샤샤를 돌아보며 말했다.
“라크샤샤 님, 저와 할 이야기는 없으신가요?”
공손한 태도였다.
라크샤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당대의 냐냑세세와 할 이야기는 없네. 져버린 해는 돌아오지 않고,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지.”
라크샤샤가 싱긋 웃었다.
“난 그림자 같은 거라네. 내 제자의 빛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군요.”
냐냑세세는 납득하는 얼굴을 했다.
어딘지 후련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이었다.
도아가 라크샤샤의 로브를 붙잡았다.
“사부, 갈 거예요?”
“그래. 너무 오래 있었지.”
라크샤샤가 미소 지으며 도아의 이마를 쓸어 넘겨 주었다.
“고양이족 꼬맹이를 거뒀더구나.”
“아―”
도아는 베리를 힐끗 보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라크샤샤가 자신의 약초장을 가리켰다.
“저건 남겨두고 가마. 거기 꼬맹이. 이리 와 보렴.”
베리가 달려오자 라크샤샤가 처방전을 베리에게 주며 말했다.
“저 녀석에게 넘기면 까먹을지도 모르니 너에게 주마. 아침저녁으로 6개월간 꼬박 감시하며 먹이렴.”
“네, 네!”
베리가 진중한 얼굴로 처방전을 받아들며 기합이 들어간 대답을 했다.
라크샤샤가 도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선택을 해야 할 때는 꼭 너를 생각하렴. 너를 생각하는 우리를 생각하고.”
“네.”
도아가 얌전히 대답하자 라크샤샤가 미소 지었다.
“좋아. 그럼 잔소리는 끝났고. 커피나 한 대 하지.”
라크샤샤가 커피대에 불을 붙이며 천막 밖으로 나갔다.
도아는 그의 기척이 곧 사라진 걸 눈치챘다.
잠시 천막 입구를 바라보다가 도아가 시선을 일행에게 돌렸다.
로베른이 물었다.
“그래서, 요양만 하면 낫는 건가?”
“응. 처방전도 아마 몸을 보하는 약일걸?”
보약이라고 아나 몰라.
도아가 로베른의 표정 보고 덧붙였다.
“진짜야. 아니었으면 라크샤샤가 뭐라고 더 했을 거야. 그런 말을 할 때 가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 거 같긴 했지.”
로베른의 말에 도아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라크샤샤랑 이야기해 봤어?”
로베른은 기가 찬 얼굴을 했다. 쿠낙이 조용히 이어 말했다.
“도아 양은 3주간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엑?!”
뭐요?
3주요?
도아가 깜짝 놀라 경악하자 로베른은 지친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B급은 모르겠지만 3주면 약초사와 이야기를 충분히 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지.”
“그, 그렇겠지.”
도아가 멋쩍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봤다가 쿠낙을 보았다.
“쿠낙은 어때요? 괜찮아요?”
“지독할 정도로 멀쩡합니다.”
“어, 음. 좋네요.”
어쩐지 내가 감사 인사를 받아야 하는 타이밍이 아닌 듯하다.
쿠낙이 내 손을 꼭 잡으며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아는 쿠낙이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 만큼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걸 몰랐다.
그녀가 양손을 뻗었다.
“나 일어나는 것 좀 도와줄래요?”
쿠낙과 로베른이 양쪽 팔을 각자 하나씩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와아.”
순간 휘청했다.
하지만 제대로 두 다리로 설 수 있었다. 온몸이 아프고 무겁지만, 그래도 견딜 만하다.
“그냥 침대에 누워 있으시죠.”
쿠낙의 권유에 도아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움직이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요.”
“짐이 B급이라면 천막 밖으로 나가지는 않겠네.”
로베른의 말에 도아가 “왜?” 하고 물었다.
“큼큼.”
냐냑세세가 헛기침을 해서 주의를 끈 후에 말했다.
“위대한 슈퍼루키 B급 모험가 김도아를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이 잔뜩 와 있거든.”
“엑.”
도아는 밟힌 개구리 같은 소리를 냈다.
ᅠ
❖ ❖ ❖
[떨어지는 태양의 도시 : 함락]
이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모험가 길드는 공략 완료된 던전 목록을 공개하기 때문에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공략자 : 김도아(B급)
공략자 : 쿠낙 샌델(S급)
공략자 : 로베른(S급)
의뢰자 : 냐냑세세
공략자 목록에서 '김도아'의 이름이 가장 위에 올라가 있다는 건 그녀가 의뢰를 받은 사람이자, 파티 리더라는 뜻이다.
S급 두 사람과 파티를 맺고 파티 리더로 활동하는 B급 모험가.
그것만으로도 주목을 끌 상황인데, 도아는 이미 A급 던전 단독 공략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상황이었다.
거기에 이번에는 200년 된 던전 공략.
어째서 200년이나 던전 공략에 실패했는지, 200년이나 된 던전은 어떤 모습일지.
학자들과 모험가들, 그리고 각국의 정치 세력들도 눈을 부릅떴다.
200년 동안 묵은 B급 던전 코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던전 안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우리나라에 있는 오래된 넘친 던전도 혹시 공략이 가능한가.
냐냑세세가 직접 의뢰하다니, 냐냑세세는 무슨 계시라도 받은 걸까?
얀은 미어터지는 인터뷰 요청을 전부 거절했다.
그런데 두 번째 엄청난 소식이 터져 나왔다.
ᅠ
마검이 정화되어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