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쿠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여러 감정이 섞이자 오히려 표정을 짓기가 어려웠다.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 되어 도아를 바라보았다.
도아는 자신이 상대를 말로 찌른 걸 모르는 듯이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간신히 그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런 문장조차 말로 토해내기가 어려웠다. 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렇지 않으면 도아를 붙들고 제 감정을 전부 토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쿠낙이 나에게 하려는 게 그거였잖아요. 내 손으로 친구를 죽이게 하는 거.”
두 번째 타격.
도아는 쿠낙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는 걸 보았다. 금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린다.
“나에게 강요했잖아요? 그죠?”
어떠냐!
역으로 당한 기분은!
“그건, 그건 다릅니다.”
쿠낙이 항변했다. 그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저는 저 때문에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기 전에…….”
도아의 손가락이 그의 가슴을 꾹 찔렀다.
“날 죽여줘. 네 손으로.”
정말로 심장이 찔린 것처럼 쿠낙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도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셔츠 깃을 잡아당기며 그녀가 속삭였다.
“잘못했죠?”
가까워진 눈동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초록빛.
오른쪽 눈이 검게 물들었는데, 그것마저도 아름답다.
쿠낙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입을 꾹 다문다.
뚱한 표정을 한 소년이 된 거 같아, 도아는 웃으며 옷자락을 놓았다.
그녀가 도로 턱하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사실 이렇게 다치거나 아플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쿠낙이 슬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건 계산을 잘못한 내 잘못이지, 쿠낙 탓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리고 이게 내가 쿠낙을 죽이는 것보다 나아요.”
도아가 자르듯 하는 말에 쿠낙은 할 말을 잃었다.
짧은 침묵이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쿠낙의 말에 도아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미안해요. 죽는 줄 알고 깜짝 놀랐죠?”
도아의 솔직한 사과에 그는 말문이 막혔다.
아니다, 그쪽이 사과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보다는 탁 하고 긴장의 끈이 풀려버린 기분이었다.
“읏…….”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곧 눈에서 눈물이 흘러넘쳐서 도아는 당황해 달려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나 안 죽었잖아요? 요양하면 싹 나을 거예요.”
“정말, 정말로, 나 때문에, 당신이 죽는 줄 알고……. 나는…….”
쿠낙이 그녀의 양 팔을 꽉 붙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그의 고개를 파묻는다.
도아는 커다란 덩치에 손을 둘러 그의 등을 토닥였다.
쿠낙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억눌려 있던 죄책감과 분노가 눈물에 녹아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도아 양은, 정말로 못됐어요.”
“아, 그러네요. 내가 못됐네. 내가 잘못했네.”
태평한 어조로 도아가 토닥이며 말하자 다시 그는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도아 양은 하나도 잘못한 게 없고, 저 때문에, 제가, 내가―”
살고 싶어 한 게 잘못이다.
마검과 계약해서 목숨을 부지한 주제에, 살고 싶어져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걸.
하지만 그 말까지 내뱉을 수는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바닥까지 떨어진 말이니, 남에게 들려줄 말은 못 된다.
그런데 그런 그의 뒷말을 어찌 알아들었는지, 도아가 말했다.
“살고 싶은 게 나쁜가요.”
쿠낙의 등이 크게 흠칫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도아를 보았다.
눈물을 흘린 후에 감정이 씻겨나간 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도아가 살며시 그의 눈가를 닦아주며 말했다.
“나는 쿠낙이 살고 싶어 해서 기뻐요.”
너는 살아 있을 가치가 없다.
분명 쿠낙은 그런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터였다.
누구든 그런 말을 계속 들으면,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싹트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쿠낙은 모두에게 겁을 주지 않으려고, 다정하게 대하려고 애썼잖아요.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했고요.”
“그건…….”
“사람들이 더 싫어할까 봐 그런 것이든, 어쨌든. 함께 하기를 고른 거잖아요?”
그건 분명히 힘든 일이겠지.
“나도 잘 알아요.”
도아가 씩 웃었다.
모두가 그녀를 불쌍한 고아로 보고, 그녀가 실수하면 그건 모두 ‘그녀가 고아이기 때문에’가 되어 버린다.
맞서는 건 괴롭고, 당당히 서는 건 괴롭다.
가시를 세우지 않는 건 더더욱 힘들다.
엄마가 해 준 이야기 속 영웅들처럼.
피할 때는 피하고, 맞설 때는 물러섬 없이.
누군가는 그 태도를 욕하고, 누군가는 뒤에서 소곤거려도.
비굴하지 않게 다정하기.
“쿠낙은 쿠낙 스스로가 살아도 된다는 걸 증명해 보인 거예요. 적어도 난 쿠낙이 살아 줬으면 하거든요. 얀도 분명 그럴 테죠.”
쿠낙은 다시 도아를 꽉 끌어안았다.
‘아구구.’
도아는 그의 품에 안겨서 작게 웃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젖은 한숨과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쿵쿵
심장박동이 빠르게 뛰다가 점점 느려지는 걸 듣고 있으려니, 그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듯했다.
멋쩍은 얼굴로 쿠낙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도아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실례했습니다.”
그가 손수건을 받아들며 중얼거렸다. 도아는 고개를 저었다.
“별말씀을. 레이디의 눈물 앞에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하.”
느끼한 목소리를 내며 말하자 쿠낙은 손수건을 와작 구기며 얼굴을 붉혔다.
“…… 레이디는 아닙니다만…….”
“말이 그렇다는 거죠.”
도아가 히죽거리며 하는 말에 그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귀여워서 더 놀리고 싶은데, 더 놀리면 정말로 화를 낼 거 같다.’
S급이라든가, 흑룡이라는 명칭이 이 귀여운 사람에게 어울리나?
쿠낙이 허둥지둥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헛기침을 했다.
“손수건은 빨아서 돌려드리겠습니다.”
“괜찮은데.”
“빨아서 돌려드리겠습니다.”
“네네.”
도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등을 툭 치고 도아는 걷기 시작했고 쿠낙은 잠시 그 등을 바라보았다.
멈추고, 도아가 왜 안 오냐는 듯 갸웃하며 그를 본다.
“도아 양.”
“네.”
“…… 아닙니다.”
“아니, 말하다 말기?”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쿠낙이 걸음을 빠르게 해서 도아의 옆에 섰다.
“바람이 차니 얼른 들어가죠. 몸 상하겠습니다.”
“그렇게 약해지지는 않았는데요. 아마도.”
“그 ‘아마도’가 문제라고 느껴지지는 않으신가요?”
“꺄악, 또 2차전을 시작하려고?”
도아는 작게 비명을 지르고 웃었다. 쿠낙이 걸음을 재촉했다.
❖ ❖ ❖
“뭘 했는지 마검이 흑룡이 됐던데?”
로베른이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 무렵, 쿠낙은 모험가 길드에 편지를 보내겠다고 오두막을 떠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베리도 함께 그를 따라서 떠났다.
무언가 개인물품을 살 게 있다나?
덕분에 오두막에는 단둘.
아니다.
댄버스 부인까지 해서 총 셋이었다. 하지만 댄버스 부인은 다른 사람이 있으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낯가림이 심한 집요정님이다.
“무슨 소리야?”
도아가 물었다. 그녀 앞에는 머그잔 가득 허브티가 담겨 있었다. 생강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로베른이 미소 짓고 말했다.
“짐은 마검이 마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데 한참 걸릴 거라 여겼는데. 짧은 시간 동안 마검의 그림자가 사라졌더군.”
“아.”
“그래서 B급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렸나 궁금해져서.”
“폐하, 진짜로 눈 좋네.”
사람을 잘 관찰하고 본다.
밝은 형광빛 네온 블루. 파라이바의 색을 쏙 닮은 눈동자는 칼날 같은 면이 있다.
서걱서걱― 아니다. 날카로워서 써는 소리도 내지 않을 거 같다.
잘리는 사람이 잘린지도 모르게 그 눈동자는 단면을 열어보겠지.
‘이 사람, 의외로 인간을 향한 애정이 있다니까.’
오랫동안 지켜본다는 건, 그만큼 애정이 있으니까 가능한 일 아닐까?
도아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냥 계기만 좀 준 거지. 이겨낸 건 쿠낙 스스로의 의지라고 할까.”
“그럴까?”
“그럼. 왜냐면…….”
도아가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 따라 둥글게 원을 그렸다.
“내가 없을 때도 쿠낙은 포기하지 않았잖아.”
단순하지만 단순하기에 단단한 논리였다.
“처음 쿠낙을 만났을 때도 독을 마신 후였거든.”
십년지기 친구가 내준 독을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낙은 그 후에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정중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거 아냐? 거기다가 마검도 계속 시끄럽게 굴고. 심지어 인간을 다 죽일 힘도 있잖아.”
도아가 시선을 들어 로베른을 보았다.
“그러니까 괜찮을 거라고 믿었어. 지금이야, 뭐. 내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힘들겠지만…….”
도아가 다리를 의자 위로 끌어 올려 모았다.
“시간이 지나서 사람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고 섞이게 되면 지금보다 더 자신감도 붙을 테고. 괜찮아졌을 거야. 나는 그걸 조금 더 당겼다고 해야지.”
“그랬을까?”
“그럼, 그럼.”
도아가 장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른은 턱을 괴고 도아를 바라보았다.
“하나 물어봐도 되나?”
“뭔데?”
“또 마검 소유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도아는 끄응 하고 고민하더니 작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돌아가 주세요?”
“진심인가?”
“응, 이거 두 번은 못 해.”
물론 정화하고 나면 30년 치 수련이 한 번에 된다든가―하는 말도 안 되는 프리미엄 보너스가 붙긴 한다.
하지만 그게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애초에 여기서 죽으면 주객전도다. 메인 퀘스트를 뭐 때문에 깨려고 하는 건데.
“그러고 보니 마검 사용자가 하나 더 있었지. 완전히 잊고 있었어.”
임팩트가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B급의 어리석음은 짐이 감내할 일이지.”
“까먹을 수도 있지.”
“죽을 만한 사건을 잊어버린다는 건 어리석음을 넘어서 뇌에 구멍이 난 거 아닌가?”
“폭언인데.”
도아가 오리처럼 입을 비죽거리자 로베른이 싱긋 웃었다.
“그렇군. B급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해야 하나? 몸도 약해졌으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 애초에 그런 일에 함부로 끼어드니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 아닌가? 계속 이런 식으로 군다면 감금도 불사할 마음이 있네만.”
도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아니. 어……. 잔소리?”
잔소리인 건지 욕인 건지 긴가민가해서 도아는 슬쩍 물음표를 던졌다.
“잔소리라네.”
“으으으음…….”
“그대에게는 이 정도 잔소리가 딱 맞지.”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도아가 되묻자, 그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 중이라는 듯 주먹을 입가에 대고 말했다.
“이 이상 이야기하면 B급이 아무리 수치를 모른다 해도 수치심을 느낄 거 같은데, 이야기해도 되는 건가?”
“도무지 맥락을 모르겠는데. 폐하, 머리가 어떻게 됐어?”
“그 불경함은 여전하군.”
로베른이 그렇게 말하며 대화를 적당히 종결시켜서 도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잔소리와 수치심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하긴 속옷을 함부로 두지 마라, 같은 잔소리는 부끄럽긴 할 테지만. 그런 잔소리를 할 일은 없지 않나.’
로베른은 고민하는 도아를 가만히 보았다.
그녀가 잔소리에 과민 반응하는 이유는 ‘굉장히 부끄럽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게, 신경 써 준다는 게 무척 부끄럽다.
그게 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기꺼워하는 쪽이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반응이 바로 “아, 또 잔소리!” 같은 식으로 튀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베른이 대놓고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그게 부끄러워 일일이 과하게 반응하는 건 그만두는 게 어때?”
하고 말한다면 도아는 얼굴을 빨갛게 물들 터였다.
뭔가 항의를 할지도 모른다.
그 항의가 궁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주고 싶은 건 아니니까.’
스스로 마음속에서 튀어나온 답이 새로웠다.
그가 턱을 문지르며 “방금 깨달은 사실인데.” 하고 운을 띄웠다.
도아가 그를 바라본다.
“짐은 상당히 B급을 배려하고 있군.”
“네? 절 바닥에 처박으신 분이요?”
“어깨관절을 뽑지도 않고, 무릎을 부러트리지도 않았는데?”
“어― 기준선이 그렇다니 뭐라고 할 말이 없네.”
“영광으로 알도록.”
“어이쿠, 네네.”
도아가 어깨를 움츠리며 잔을 들어 올렸다.
생강 허브티는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어 있었다.
차를 마시는 사이 댄버스 부인이 소리 없이 과자 그릇을 놓고 갔다.
몸도 마음도 느슨하게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저―기, 폐하.”
로베른이 제 몫의 차를 마시다가 도아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 갑자기?”
“아니, 말을 하려고 했는데, 계속 어쩌다 보니 못 하게 돼서.”
자신은 3주나 의식이 없었고, 쿠낙도 제정신이 아니었을 터.
그동안 모험가 길드나 여러 곳과 소식을 주고받아 준 건 분명 로베른이었을 터였다.
본의 아니게 뒤처리 담당을 시키게 되어 도아는 미안함이 앞섰다.
‘오만불손한 황제가 콘셉트인 사람에게 보고서 작성을 시키다니. 정말 미안한 일이지.’
로베른이 잔을 내려놓고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고는 다리를 휙 꼬았다.
입가에 오만한 미소가 서린다.
“분수를 알게 된 B급이 머리를 조아리고 황송하다고 아뢴다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도아는 눈을 깜박였다. 잠깐 고민하다가 그녀는 잔을 든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손으로 치맛자락 대신 카디건 끝을 잡고, 잔을 든 손은 우아하게 벌렸다.
한쪽 다리가 뒤로 살짝 미끄러지고 허리를 숙인다.
“황송하옵니다, 폐하.”
손에 든 컵만 아니라면, 그럴듯한 태도였다.
“참으로 불민한 태도지만, 무지한 B급이니 봐주도록 하지.”
“만족했다니 다행이네.”
도아가 자리에 털썩 도로 앉으며 시선을 창문으로 돌렸다.
천천히 눈송이 하나가 창가를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