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도아는 종이 포장을 북 찢어서, 상자를 열었다.
“어라, 상자가 아니…….”
달칵
경첩이 열리고 상자가 반으로 갈라졌다. 짙은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액자였다.
작은 액자에는 세밀화가 두 점 들어 있었다.
도아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하나는 가족이 모여 있는 세밀화고 하나는 여성 그림이었다.
탁!
도아는 거칠게 액자를 도로 닫았다.
도아는 이를 악물었다.
“됴아 님…?”
베리가 걱정스럽게 도아를 불렀다. 도아가 ‘핫’ 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렇구나. 액자를 보냈구나. 흐으으으응.”
도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다른 편지들을 챙겼다.
“이거 내 방에 두고 올게.”
도아가 액자를 마지막으로 챙겼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우편원이 빠르게 밀크티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좋은 선물이 아니었나 보네요.”
쿠낙이 걱정스럽게 도아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우편원이 잔을 탁 내려놓고 모자를 챙겨 썼다.
“그럼 잘 마셨습니다. 전 이만 가볼게요.”
“이케 빠리여?(이렇게 빨리요?)”
보통은 아랫마을 소식도 전해 주곤 하는데, 하고 베리가 우편원을 바라보았다.
우편원이 빙긋 웃었다.
“이럴 때는 빠르게 몸을 빼는 게 언제나 상책이더라고요. 보내는 편지는 없으신가요?”
“아, 이쪽에…….”
미리 노끈으로 엮어둔 편지 봉투 묶음을 건네자 우편원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쿠낙은 힐끗 보았던 그 액자 안의 그림을 떠올렸다.
네 사람이 서 있는 가족사진과 여성의 그림.
‘도아 양과 닮았지.’
밤색 머리카락에 초록색 눈이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아주르 나자크.
‘도아 양의 어머니인가.’
왜 엘몬드 공작은 그 사진을 도아 양에게 보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러고 보니 엘몬드 공작이 자신을 누나라고 부른다고 했었다.
‘그럼 엘몬드 공작은 도아 양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는 건가.’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불꽃이 튀는데, 도아가 문을 열고 나왔다.
“엥? 우편원 벌써 갔어요?”
“네, 바쁘다고…….”
“편지는요?”
“보냈습니다.”
“아니, 그사이를 못 참고. 인사는 하고 가지. 참.”
도아가 툴툴거렸다. 쿠낙이 그녀를 살폈지만, 도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보였다.
오히려 쿠낙의 시선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아뇨.”
쿠낙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액자가 뭐냐고 묻는 건 예의가 아닌 듯싶었다.
‘도아 양이 이야기하고 싶을 때 이야기하겠지.’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야 있는 거 아니겠는가.
도아가 싱글싱글 웃으며 앞치마를 입었다.
“오늘 폐하 늦으려나?”
“글쎄요.”
“먼저 저녁 먹어도 되겠지?”
“괜찮을 거 같습니다.”
도아가 씩 웃으며 칼을 들었다.
“오늘은 맛있는 거 먹자.”
❖ ❖ ❖
로베른은 피곤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체력적으로 피곤하지는 않았다.
그를 체력적으로 피곤하게 하려면 마룡 정도는 데려와야 했다.
“…….”
그때를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돋는다. 희미한 희열마저 느껴졌다.
그때처럼 목숨을 걸고 싸울 날이 또 있을까?
모험가들, 특히 등급이 높은 모험가들은 아드레날린 중독자나 다름없었다.
위험에 위험을 더해, 목숨에 목숨을 걸고 던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제정신일 리가 없다.
쿠낙과 로베른은 S급 인재다.
S급이 필요한 일이 잘 터지지 않기도 하지만, 애초에 S급은 숫자가 적다.
일단 마법사 링 리더인 바르샤는 거의 두문불출.
게다가 ‘미치광이’라는 이명답게 그는 깔끔하게 던전을 처리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머지 S급 네 명 중 두 명은 이제 곧 은퇴한다. 그러면 가용범위에 있는 S급은 두 명뿐이었다.
당연히 의뢰가 쌓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귀족이 얽힌 의뢰는 정말 귀찮단 말이지.’
돼지 같은 상판대기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력이 소모된다.
‘쓸데없이 꿀꿀거리고.’
그런 돼지 밑에서 일하는 병사들이 가엾다.
일 자체는 별거 아니었다.
겨울 산을 오르는 일도 그에게는 별일 아니다.
눈 위를 사뿐히 걸어서 올라가는데 바람결에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
저도 모르게 로베른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의 위치를 다시 봐도 자정이 지난 새벽이다.
‘이 시간에 요리를?’
그래도 B급의 요리를 맛볼 수 있으면 좋지, 하고 걸음걸이가 더 빨라지는데―
눈앞에 스윽 검은색 인영이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나타나 움찔했다가 로베른은 상대를 보고 혀를 찼다.
“습격을 할 거면 제대로 하지 그러나?”
느긋하게, 망토 안쪽에서 그의 손이 검 손잡이 위에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쿠낙은 위아래로 로베른을 살펴보고 말했다.
“문제가 있습니다.”
“…… 문제?”
로베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쿠낙이 문제라고 말할 정도면 B급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컸다.
몸이 잘못됐나?
아니면 정치적으로 위협을 당하나?
모험가 길드의 파벌싸움에 휘말려서 자격 박탈?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가 하나씩 사라졌다. 쿠낙이 낮게 숨을 내쉬고 말했다.
“도아 양이 술을 계속 마시고 있습니다.”
“…….”
순간 로베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마나를 쓰다가 뇌까지 전기로 튀겨진 건가?”
폭언에도 쿠낙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했다.
“몸에도 분명 안 좋을 텐데, 제가 말을 해 봤지만 듣지 않더군요. 그쪽은 분명 쓸데없는 소리를 할 테니 미리 경고하러 왔습니다.”
로베른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들어주는 것도 짜증이 난다.
그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쿠낙은 자기 멋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래도 오늘 온 엘몬드 공작가와 관련이 있는 일 같은데……. 가족사는 묻기도 그렇더군요.”
오두막 앞에 순식간에 도착한 로베른은 현관 앞에서 부츠의 눈을 털어내고 말했다.
“술을 그렇게 마신다면 물어봐 달라는 뜻이라고 느껴지지 않나?”
쿠낙이 멈칫했다. 로베른은 문을 벌컥 열었다.
따뜻한 공기와 함께 맛있는 음식 냄새가 확 번져왔다.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던 도아가 찬바람에 눈을 떴다.
“어라……. 폐하 왔어?”
그녀가 아하하 웃으며 테이블을 두들겼다.
“어쩌지? 먼저 먹어 버려서.”
로베른은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다 못해 부엌 조리대 위에도 가득한 음식들을 쭉 둘러보고 말했다.
“저장고를 거덜 내기로 했나? 겨울이 벌써 다 지났던가?”
“에에이이, 맛있는 거 먹을 때도 있는 거지.”
“술은 거덜 냈을 거 같군.”
포도주병이 여기저기 굴러다닌다.
그는 망토 끈을 풀었다.
도아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댄버스 부인이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집요정의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했다.
“폐하, 뭐 먹을래?”
“주정뱅이의 시중은 필요 없네.”
“…… 뭐.”
도아가 도로 풀썩 자리에 앉았다.
“주정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네…….”
쿠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아 양,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으음, 딱히?”
도아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냥 오늘 왕창 마시고 왕창 취해 버리고 싶어서……. 하하.”
로베른이 의자에 앉았다. 댄버스 부인은 손님을 소홀히 하지 않는 태도로 식기와 접시를 내왔다.
그는 냄비 가득 담긴 고기 조림 요리를 제 접시에 담았다.
“이건 뭐지?”
“뵈프 부르기뇽. 맛있어.”
로베른은 뵈프 부르기뇽을 한입 먹었다.
여전히 충격적으로 맛있었다.
게다가 포도주가 당기는 맛이었다. 그는 굴러다니는 병을 바라보았다.
“술도 제대로 못 마시는 애송이에게는 아까운 포도주들이군.”
“맛있게 마셨으면 됐지.”
“왕창 취하려고 마신 건데, 맛있었나?”
날카로운 말에 도아가 다시 어색하게 웃었다. 쿠낙도 도아의 옆에 앉았다.
그가 똑바로 도아를 바라보았다.
“제가 못미덥다는 건 압니다만. 그래도 이야기를 해 주신다면…….”
“그래서?”
부드러운 쿠낙의 말을 끊어내며 로베른이 끼어들었다.
도아가 바라보았다.
“뭐가?”
“그 엘몬드 공작과 무슨 일이 있는 건가? 누나라고 하더니 사생아 취급을 하던가?”
쿠낙은 당황해 눈을 크게 떴고, 로베른은 그러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이번에는 메쉬 포테이토를 퍼담았다.
도아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가 말했다.
[진짜로 짜증 나네!]
버럭 튀어나온 말은 한국어였다. 당연히 모국어 쪽이 훨씬 더 편했다.
쿠낙은 갑자기 나온 낯선 언어에 멈칫했다.
[그래! 내가 술 좀 마셨다! 그게 너에게 추궁당해야 할 일이야?]
“그랬나?”
[그래! 완전히 그랬지! 내가 내 돈 내고 산 술이랑 내 요리를 먹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야!]
“그렇군.”
[와, 진짜, 짜증 나네. 엿 같네, 나라고. 나라고 해서―!]
도아는 눈물이 왈칵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나 버린 엄마가, 다른 사람이랑, 행복한 거……. 흑, 으흑―]
우왕,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차피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놓이는 듯도 했다.
[뭐야, 자랑해? 그래 잘났어. 좋겠네. 지는 부모님이랑 행복하게 살고. 나는, 나는 엄청 힘들었는데. 난, 히끅……!]
“그랬군.”
[뭐야, 알아듣는 것처럼.]
“그래?”
[그래. 못 알아듣는 거 맞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니 로베른이 미소 지었다.
“못 알아들으니 안심하게.”
“!!”
도아가 토끼 눈을 하고 그를 보자, 쿠낙이 쓴웃음을 지으며 도아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못 알아듣는 거 맞습니다. 도아 양, 마음껏 편한 대로 쏟아 놓으세요.”
[쿠낙, 진짜 너무 친절한 거 아녀요?]
제 이름이 불려 쿠낙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아는 힘이 빠져 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그래도…….]
도아는 손수건에 얼굴을 푹 묻었다.
[만나고 싶었어.]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 이렇게 힘들었다고 원망도 하고, 그래도 나 사랑하죠? 물어보고. 왜 그랬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그, 그런데……. 역시……. 엄마는 없는 거야.]
“네에, 그랬군요.”
쿠낙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럼 진짜로 나 혼자잖아. 혼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혼자잖아아…….]
“괜찮습니다.”
[진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그래.”
[로베른 위로 진짜 성의 없네.]
“주정뱅이 상대하기 귀찮아서 그만.”
도아가 그 말에 눈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속이 울렁거려…….]
이건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공용어로 다시금 말했다.
“토할 거 같아.”
쿠낙이 도아를 번쩍 안아 올려 화장실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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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아가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로베른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아까운 포도주였어. 그리 생각하지 않나?”
로베른의 말에 댄버스 부인은 차가운 미소를 돌려주었다.
로베른이 픽 웃었다.
“맞아. 그녀의 것이니,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그녀 마음이지.”
❖ ❖ ❖
도아는 밤새 위아래로 쏟아냈다. 엄청나게 어지러웠다.
고개만 들어 올려도 어지러웠다.
그냥 누워 있어도 코끼리 코하고 200바퀴 돌기를 한 것처럼 빙빙 돌았다.
속은 계속 울렁거리고 머릿속은 꽝꽝 누군가가 망치로 두들기는 듯했다.
비틀거리고 일어나 물을 마시면 또다시 토했다. 위액이 나올 때까지 토했는데도, 계속 올라온다.
끔찍했다.
더 끔찍한 건 어젯밤 주정뱅이 소동이었다.
‘남들은 필름도 끊긴다는데, 난 덜 마셨나. 왜 기억이 다 나는 거야. 흑흑’
그나마 한국어로 소리친 게 다행이었다.
어지러워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
‘술병 났네, 진짜.’
예전에 겪었던 숙취는 이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베리도 걱정이 되어 기웃거리는데,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거 같았다.
‘아, 진짜 싫다.’
어쩐지 자괴감마저 들어서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도아는 눈을 감았다.
똑똑
“네에, 들어오세요.”
어차피 못 볼 꼴 다 보였으니, 가릴 것도 없다.
로베른이 문을 열고 문가에 서서 말했다.
“식사는?”
“먹어봐야 토할 텐데.”
“빈속보다는 토해도 넣는 게 더 낫네.”
“…… 그래?”
“이런 걸로 B급을 속이지는 않지.”
“그럼 부탁드립니다…….”
댄버스 부인이 기름기를 깨끗이 걷어내고 쌀이 조금 들어간 닭고기 수프를 가져왔다.
속이 울렁거리기는 했지만, 토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뜨끈한 게 들어가니 속이 더 편해진 거 같기도 하고…….
결국 도아는 온종일 누워 있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오두막 문을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전신을 찌른다.
도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명상을 시작했다.
마나를 천천히 돌리면서 몸의 세포 하나하나 활성화 시킨다.
도아는 집중상태에서 벗어나 천천히 눈을 떴다. 먼저 후각을 자극한 건 커피 향이었다.
살그머니 눈을 뜨니 이미 한밤중이고, 그녀 옆에 로베른이 서 있었다.
“깼나?”
“응. 고마워.”
그녀가 명상에 들어갔으니 호위해 준 거였다.
로베른이 연기를 뱉어냈다.
도아는 어쩐지 민망해져서 우물쭈물하며 말을 골랐다. 그녀의 어깨 위에 담요가 덮여 있었다.
“갓 태어난 새끼염소가 됐나?”
느닷없는 말에 도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아, 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듯싶었다.
울렁거림도 두통도 사라져 있었다.
도아가 멋쩍게 말했다.
“다행히도 무릎이 후들거리지는 않네.”
로베른은 눈썹만 치켜올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어둠 속에서 안개처럼 숨결이 피어올랐다.
오두막 입구에 달린 등불이 새하얀 숨을 선명하게 비춰낸다.
“미안합니다…….”
“뭐가?”
“어제 난리 쳐서.”
“난리?”
도아가 뚱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니, 불빛에 비친 그는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