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세계수 여행사 : S급 먹방대모험 패키지-82화 (91/100)

⊹ 82화 ⊹

상인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부 사신다굽쇼?”

도아가 놀라 로베른을 돌아보았다.

로베른이 천천히 천을 손으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이 정도의 상품은 구하기도 힘들지.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정해져 있거든.”

상인은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눈만 아니었으면 저도 이렇게는.”

“그러니까 상품 하나라도 이런 식으로 함부로 팔 수 없다는 거야. 전부 정해져 있으니까.”

로베른이 웃으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어디서 훔쳤지?”

상인은 굳었다가 큰소리쳤다.

“뭐야! 사람을 도둑 취급하고! 에잇, 재수 없어. 안 팔아, 안 판다고!”

그러며 상품을 그러모으기 시작했다.

로베른이 상품을 잡았다.

“은색 거미줄 천을 이딴 식으로 다루는 것만 봐도 알겠는데. 어디서 훔쳤지?”

남자는 멈칫하더니 로베른에게 천뭉치를 집어던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저런.”

도아가 중얼거렸다.

“실례하겠네.”

로베른이 옆의 노점상에서 호두알을 하나 집어 들었다. 도아는 ‘앗, 너무 잔인해.’ 하고 손가락을 벌리며 눈을 가렸다.

빡― !

로베른이 던진 호두알에 명중당한 사내가 힘없이 뒹굴었다.

로베른이 도아에게 말했다.

“저 인간을 처리하고 갈 테니, 먼저 가도 되네.”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르게 바닥에 널브러진 천에 시선이 갔다.

‘어쩐지 진짜인 거 알고 나니까 아깝네…….’

“B급.”

로베른이 웃으며 그녀를 불렀고, 도아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안 가져갈 거야.”

그는 미소 짓고 느긋한 걸음으로 쓰러진 남자에게 다가갔다.

‘옷에 진심이 남자…….’

도아나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쿠낙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입니까?”

“로베른이 도둑을 잡았어요.”

“그렇군요.”

쿠낙이 그러며 멋쩍게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미리 선물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네? 아니에요. 저도 몰랐는걸요.”

베리가 ‘엣헴.’ 하고 꼬리를 치켜세웠다. 도아가 조심스럽게 가죽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납작한 주머니 안에는 가장자리에 섬세한 조각을 한 반달 모양 나무 빗이 들어있었다.

윤기가 반지르르한 나무 빗 조각 끝에는 도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고마워요, 쿠낙. 정말 예뻐요. 나는 아무것도 준비 못했는데, 어쩌죠.”

쿠낙이 제 눈을 가리켰다.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도아는 눈을 크게 떴다가 웃었다.

세 사람은 함께 눈축제를 즐겼다. 돌아갈 때까지 로베른이 오지 않아서 세 사람은 먼저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로베른이 돌아온 건 새벽녘이 되어서였다.

물 마시러 나온 도아는 바깥에서 기척이 느껴져 하품하며 문을 열었다.

“로베른, 늦었, 엥?”

그가 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도아가 문을 열어주자 그가 들어와 짐을 내려놓았다.

“이게 다 뭐야?”

로베른이 말없이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도아의 어깨에 휙 둘러주었다.

순간적으로 온기가 확 느껴졌다.

“아, 이거 아까 그…….”

구름염소털이라고 했던가?

“B급에게 주지.”

“엥? 가져온 거야?”

“도둑맞은 상인을 찾아서 정당한 대가를 주고 구해온 거라네. 그쪽도 부상 때문에 움직일 수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었으니까.”

도아가 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거 비싼 거 아냐?”

로베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주르 나자크의 아주르 나자크만큼은 아니겠지.”

그가 천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즐거운 신년 되게. B급.”

“로베른.”

그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고마워.”

“B급이랑 같이 있으면 심심할 일이 없을 듯하니, 그 값이라고 생각해두면 되지.”

“그거 다행이네.”

도아의 말에 그가 싱긋 웃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도아는 짐을 열어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반짝거리는 천은 무척이나 아름답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아까 그 도둑이 가지고 있던 천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폐하도 참.’

도아는 구름염소털로 된 천을 어깨에서 잡아당겼다. 갑자기 등이 서늘해졌다.

‘이걸로는 댄버스 부인에게 내복이나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다.’

진정한 발열내의가 되겠네.

❖ ❖ ❖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고 있는데도 비에나리에 북부는 여전히 추웠다.

도아는 원터치 텐트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중얼거렸다.

“요양지로 남쪽이 아니라 북쪽을 택한 게 잘못이었나.”

하지만 그 몸 상태로 멀리 가는 건 무리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온천이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자.

도아는 광천수와 유자 시럽을 잘 섞었다. 요즘은 이렇게 차가운 탄산음료를 마시면서 온천에 들어가는 게 그녀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탄산음료를 만들어 들고 도아는 종종걸음으로 물통나무 중 하나를 골라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탕 온도는 평소보다 더 높은 듯했다.

거기서 몸을 데우고는 차가운 유자에이드를 한 모금.

“아, 탄산 진짜 좋다.”

“그래? 정말 좋아?”

입구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났다. 도아는 소름이 쭉 돋았다.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못 한 데다가.

상대가 싱글싱글 웃으며 도아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 검은 눈.

등에 커다란 검을 매고 있다.

도톰한 입술은 붉게 칠했고, 몸에 딱 붙는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아씨, 진짜.’

완전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크사툴.”

도아의 말에 크사툴이 활짝 웃었다.

“와, 기억해 주고 있구나. 진짜 아주르 나자크네. 진짜로 있을 줄은 몰랐는데. 세상에, 그랬구나.”

크사툴이 고개를 옆으로 비딱하게 꺾으며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래서 ‘마검 쿠낙’이 도망쳤구나. 분명히 그랑에 있었는데.”

도아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바로 근처에 검이 놓여 있다. 손을 뻗으면 분명 닿을 텐데.

손으로 검을 잡고, 발검하는 순간― 이미 저쪽이 그녀를 벨 것 같았다.

크사툴이 한걸음 나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도아가 말했다.

“탕에 들어올 거면 옷을 벗어야지.”

크사툴이 눈이 가늘어졌다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맞아. 그러네. 크사툴이 예의가 없어. 그지? 마검이라서 그런가 봐.”

크사툴은 제 신발을 벗어 던지고 옷을 훌훌 벗기 시작했다.

도아는 그사이에 제 검을 쥐었다.

그걸 보고도 크사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속옷 한 장 차림이 되어서 크사툴은 온천에 들어왔다.

“하아― 그렇구나. 이런 느낌이구나.”

크사툴이 물을 찰방거렸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도아는 그런 크사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기척도 없이 온 거야?”

“음, 영업비밀.”

도아는 천천히 주변의 기척을 더듬어 살폈다.

다른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크사툴은 도아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손은 닿지 않지만, 검은 닿을 만한 거리였다.

크사툴이 말했다.

“아주르 나자크에게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뭘?”

“마검을 정화 시켰다는 게 진짜야?”

“왜 정화 시킨 게 나라고 생각해?”

“에이, 아주르 나자크와 마검 사이에 무슨.”

크사툴이 손가락으로 틱 물방울을 튕겼다.

물방울이 스친 도아의 뺨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크사툴이 비딱하게 이어 말했다.

“장난치지 말자?”

도아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대답에 따라서 뭔가 달라져?”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마검이 한 자루 없어졌으면 남아 있는 마검은 한 자루뿐이니까.”

“그럼, 한 자루가 없어진 건 확실해.”

크사툴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도아가 이어 말했다.

“너는 네가 마검인 것처럼 말하는데, 애초에 마검은 인격이 없잖아? 내가 알기로 마검은 라이트 크리스털에서 변형된 걸로 알고 있는데.”

크사툴은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표정을 꾸며낸 게 역력해 보였다.

“그래? 그런 것도 알아? 역시 세계수의 사도는 다르구나아―”

“세계수의 사도 아닙니다.”

도아가 손을 들어 정중하게 부정했지만 크사툴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도아는 억울해졌다.

‘진짜 아닌디.’

크사툴이 방그레 웃고 말했다.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야. 하지만 이 인격의 대부분은 아마 나일걸?”

“잠깐, 아까부터 크사툴, 이라고 너 자신을 삼인칭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마검과 너는 다른 인물이라는 거지?”

“응. 마검을 온전히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크사툴과 마검을 합쳤다고 해야 할까?”

“마검이랑 융합했다고?”

“맞아. 바로 그거야.”

“왜 그런 미친 짓을? 그게 가능했으면 그냥 던전 코어나 크리스털을 심장에 쑤셔 박고 내가 던전 에너지를 펑펑 쓰는 능력자라고 하지.”

도아의 말에 크사툴은 웃음을 터트렸다. 우아하고 명랑한 웃음소리였다.

“맞아, 맞아. 그래서 지금 이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좀 까다롭거든. 크사툴이 아주르 나자크에게 얼마나 예의를 갖추고 있는지 알겠어?”

“그럼 다른 마검도 융합하려고 찾는 건가?”

“그렇지. 아니면 융합시키거나.”

“지금 쿠낙이 그 마수에서 빠져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크사툴이 속삭였다. 놀랍도록 요염한 목소리였다.

“마수라니, 해방이지.”

파직!

기묘한 스파크가 그녀의 귓가에서 일어났다.

도아 머리 위의 머리띠 리본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아, 목소리에 무슨 마력이 있었던 건가?’

엘리바스의 보호 마법이 작동한 모양이었다.

크사툴이 입술을 뚱하니 내밀었다.

“온천까지 보호장비를 차고 오는 건 치사하네.”

“머리는 보호해야지.”

도아가 중얼거렸다. 슬슬 대화가 마무리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마검과 융합해서, 빙글 돌아버린 머리와 힘을 가지고 뭘 하려고?”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인가.”

“영원.”

“그래, 영원.”

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부터 권력자들이 권력을 얻고 나면 다음으로 원하는 게 불로불사, 즉 영원이기는 한데…….’

그 영원을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영원을 말하는 건지 문화적 차이가 있어서 모르겠어요!

크사툴이 손가락으로 온천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마검은 본래 약자들의 것이야.”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고, 참을 수 없는 일을 겪었는데 아무 힘도 없을 때. 손쉽게 힘을 주는 마검에 손을 댄다면. 그 사람은 약자였겠지.”

“그렇다고 치자.”

“그러니까 나는 약자들의 집합체라고 할까.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이라고 할까.”

크사툴의 검은 눈동자가 도아를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모두가 영원을 얻는 거야.”

도아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네 계획이 뭔지 모르지만, 저번처럼 마검을 폭주시키거나 도시를 공격하면 약자가 먼저 당한다는 걸 알고 있어? 약자의 대표자님?”

“음, 약간의 희생은 어쩔 수 없지 않나?”

“그 약간의 희생이 된 약자를 대변한다며.”

“하하, 하지만 난 더 이상 약자가 아닌걸.”

“아, 그러니까 약자들의 힘으로 강자가 됐지만, 강자가 됐으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

뭐지? 국회의원?

크사툴이 의기양양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그야 크사툴은 마검이잖아.”

도아는 헛웃음을 짓고 이어 말했다.

“애초에 마검은 약자들의 모임도 아니잖아. 나도 마검과 접촉한 적 있어. 마검이 뭔지 아주 잘 알아.”

마검이 속삭이는 말은 그저 상처 입히기 위한 것뿐이었다.

억울함과 분함이 아니라, 마검 계약자를 망가뜨리고 싶어 하는 명백한 악의뿐이었다.

“아주르 나자크는 속이기 어렵네.”

크사툴이 히죽거렸다.

천천히 크사툴이 도아를 바라보다가 그녀의 오른 눈을 가리켰다.

“오른 눈, 그래서 잘 보여?”

“보여.”

“그래?”

뭔가 계산하듯 그녀를 살펴보던 크사툴은 빙긋 웃었다.

“크사툴은 아주르 나자크를 확인했어. 좋아, 좋아.”

크사툴이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손짓 한 번으로 몸을 말린 후에 차곡차곡 옷을 입는다.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어.”

도아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세를 잡고 마나를 돌리기 시작했다. 목욕을 하기 전 입고 있었던 그녀의 옷은 여기에서 조금 떨어진 텐트 속에 있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수는 없었다.

크사툴이 제 검을 들었다.

도아가 권했다.

“있지, 싸울 거면 저쪽으로 가서 싸우면 안 될까? 여기 나무들 다 오래된 나무들이라서 싸우다가 부러지면 아까운데.”

“그럴까?”

크사툴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콰앙!

검과 검이 맞대어졌다고는 하기 힘든 폭발음이 들려왔다.

커다란 물통나무가 반으로 쪼개졌다.

크사툴의 검을 쳐내며 뒤로 훌쩍 뛴 도아의 맨발이 흙 위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쯧.”

도아는 혀를 찼다.

크사툴이 아하하 웃었다.

“안 속네.”

“안 속지.”

도아는 허전한 왼팔에 마나를 두껍게 둘렀다.

‘방패 주문한 거 언제 오냐.’

마나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럴 때마다 어쩐지 가속페달을 밟는 기분이었다.

엔진이 뽑아낼 수 있을 만큼 RPM을 올린다.

스포츠카가 속도를 올리면 특유의 엔진 소리가 나는 것처럼, 마나도 회전하면서 특유의 음을 냈다.

도아의 빛 속성 마나는 마나 음이 없다.

무음이다.

그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기습공격에 최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최고속도까지 올릴 수 없지.’

그녀의 마나관과 코어는 80% 정도 회복된 상태였다. 회전수를 최고로 올리는 미친 짓을 하다가는 엔진이 파열될 텐데.

‘이걸 상대로 괜찮으려나.’

크사툴이 땅을 박차고 날듯이 달려왔다. 새까만 연기에 뒤덮여 안개를 두르고 싸우는 사람 같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다음 동작을 예측하는 게 힘들었다.

“뭐야, 뭐야, 뭐야, 제대로 안 할 거야? 아주르 나자크!”

크사툴이 도아를 걷어찼다. 왼팔로 막아냈지만 몸이 찌르르 하니 울린다.

“치사하잖아. 그쪽은 완전 무장하고, 나는 달랑 검 하나거든?”

도아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크사툴이 히죽거렸다.

“하지만 비무장에다가, 약해진 상태인 아주르 나자크를 죽이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잖아?”

“그건 또 그래.”

도아는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울린다.

도아가 씩 웃었다. 크사툴이 휙 시선을 돌리더니 뒤로 훌쩍 물러났다.

번쩍―!!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 만큼 강렬한 빛이 번졌다.

“쿠낙, 늦어요.”

도아가 짐짓 아가씨처럼 새초롬하게 말하자, 쿠낙이 정중히 대답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