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드블랑에서는 첫 달 파티가 무척 성대하게 열립니다. 여기저기서 밤낮으로 파티가 열리지요.”
아칸이 열심히 설명했다.
“낮에는 피오나타(fionata), 그러니까 공용어로는 꽃의 요정, 밤에는 루바타(lubata), 즉 달의 요정으로 분장을 하고 즐깁니다.”
“엘몬드 공작가에서도 손꼽히는 밤 파티를 열지요.”
“물론 저희 가문에서만 조촐하게 열리는 파티도 있습니다.”
“파티에 와 주시면 좋지만, 그때가 아니더라도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엘몬드 공작 각하께서 부디 안부를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이지만, 아칸은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의 태도는 그야말로 기사다워서 간곡히 부탁하면서도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도아는 초대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음, 일단 제 일정을 알아봐야겠지만……. 생각해 볼게요.”
아칸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도아 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초대장을 전달했으니,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도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말이에요? 이제 곧 해가 질지도 모르는데, 어딜 가요. 오늘은 지나고 가요. 저도 궁금한 게 많거든요.”
도아의 말에 아칸은 멈칫하고 살며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복종을 표시했다.
“뜻대로 하시지요.”
“그럼 하루 묵고 가세요.”
도아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손님이 오셨으니 솜씨를 발휘해야겠네요. 뭐 못 드시는 거 없으시죠?”
얀이 활짝 웃었다.
사실 도아의 요리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어디에서 먹어도 그 맛이 아니라서, 종종 떠올릴 때마다 입맛만 다셨을 뿐이었다.
“겨울이라 재료가 많지 않은 점은 감안해 주시길.”
도아의 말에 얀은 “아닙니다.” 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아칸은 “도아 님께서 직접 요리를…….” 하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모험가라는 직업 특성상 요리는 당연한 일이었다.
도아가 씩 웃었다.
“기대해도 좋아요.”
❖ ❖ ❖
화이트 와인을 약간 넣고 끓인 홍합요리와 소시지를 듬뿍 넣은 매운 토마토 파스타, 그리고 오리콩피가 나왔다.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옥수수빵도 함께 놓여 있었다.
아칸은 조심스럽게 홍합을 하나 먹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이트 와인의 섬세한 맛과 홍합을 볶기 전에 채소를 버터로 볶아서 이미 맛을 내둔 그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홍합 살은 찰지고 비린내는 전혀 없었다.
홍합에서 나온 뽀얀 국물마저 참을 수 없을 만큼 맛있었다.
도아는 힐끗 아칸을 바라보았다. 그는 묵묵히 홍합 껍데기를 골라내고 있었다.
강하기만 해 보이는 기사님이 홍합 껍데기를 산더미처럼 쌓아두는 모습을 보는 건 즐거웠다.
얀은 파스타를 마음에 들어 했다.
토마토의 감칠맛과 소시지에서 나온 소금기와 육즙, 거기에 허브 향과 희미한 단맛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계절에 토마토라니 신기하네요.”
“음식 저장의 비법이 있지요.”
도아가 쿡쿡 웃었다.
역시 이쪽에서는 병조림이 새로운 문물인 듯싶었다.
‘오염 때문이니……. 빛모래로 병조림용 병을 생산한다는 계획은 역시 먹히겠는걸?’
“매운데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파스타 면 바깥쪽은 거친데 덕분에 소스가 듬뿍 스며 들어 있었다.
푹신푹신하고 뜨끈한 옥수수빵을 소스에 찍어 먹는 것도 맛있었다.
오리콩피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개수 때문에 인당 하나씩인 걸 아쉬워하며 요리법을 묻기도 했다.
“음……. 일단 콩피 자체가 좀 오래 걸리기는 해요.”
염장한 오리 다리를 오리 기름에 넣고 약한 불에 오랫동안 익힌 다음 기름채로 보관한다.
이러면 장기간 보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리는 단순. 오븐에 넣어서 굽기만 하면 된다. 기름기는 싹 빠지고 염장을 했기 때문에 껍질과 속까지 바삭바삭하고 짭짤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까다롭군요.”
얀이 고개를 끄덕여서 도아는 웃었다. 베리는 요즘 광천수에 푹 빠져 있었다.
그냥 광천수는 너무 탄산이 강해서, 물과 시럽을 넣어서 희석하면 적당한 강도가 되었다.
아칸과 얀도 맛보더니 마음에 들어 했다.
식사가 끝나자 복숭아 병조림이 나왔다.
아칸과 얀은 복숭아가 나오자 깜짝 놀랐다.
금빛을 띠는 시럽 한 방울까지 싹싹 긁어먹고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맛있는 걸 먹고 배가 부르자 표정이 느슨해졌다.
얀이 제 가방 안에서 묵직한 술병을 꺼냈다.
“베삭 산 브랜디입니다.”
“길드장은 술 고르는 눈이 있지.”
“칭찬 감사합니다, 폐하.”
얀이 공손히 술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도아가 갸웃하고 물었다.
“지금 마시나요?”
“식후주로 괜찮지요.”
“그래요?”
짙은 호박색 술은 어쩐지 굉장히 독해 보였다. 쿠낙이 말했다.
“도아 양은 그냥 차로 하시죠.”
“그럴게요.”
쿠낙이 브랜디를 약간씩 따라서 내고 도아와 베리는 찻잔을 들었다.
얀은 다시금 도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도아 양.”
“제가 뭘요.”
“여러 가지로요.”
도아가 직접적으로 마검을 없앴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몸 상태나 흐려진 오른 눈을 보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몇백 번 감사해도 부족한 일이었다.
“아, 맞다. 참. 아칸 경― 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물론입니다. 도아 님.”
“아무래도 저 적이 붙은 거 같거든요.”
“적이요?”
도아는 얼마 전에 쳐들어왔던 크사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얀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랑을 공격했던 그때 그 사람입니까?”
“네, 그 뒤로 혹시 조사된 게 있나요?”
“아뇨, 사방으로 조사관을 파견했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도아 양 앞에 나타나다니…….”
그가 신음을 내뱉었다.
“괜찮으셨습니까? 다른 다친 곳은 없으시고요?”
“네, 다행히도 회복이 상당히 된 상태에서 와서요. 그리고 다짜고짜 공격한 것도 아니었고요.”
“‘영원’이라…….”
얀은 턱을 문질렀다.
“다시 한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쿠낙의 검은 이제 사라졌으니, 다른 검이 어디 있는지가 문제군요.”
“위치는 전혀 모르나요?”
“네, 애초에 활성화된 마검은 쿠낙의 검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더 깊이 조사해 보겠습니다.”
“엘몬드 가문도 아무런 문제없습니다.”
아칸이 문자적 의미 그대로, 늑대답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오게 된다면, 엘몬드 가문이 적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 맛보게 되겠지요. 도아 님의 적은 엘몬드 가의 적입니다.”
단호한 말에 도아는 부끄럽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로베른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드블랑에서는 별말이 없나?”
순간 약점을 찔린 사람처럼 아칸이 움찔하고는 로베른을 바라보았다. 호박빛 눈동자가 짙어지더니 눈이 가늘어졌다.
“그쪽은 가십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군요.”
“이 상황에서 관심이 없다면 바보지.”
“드블랑이 짖어 봐야, 엘몬드는 관심이 없다고 해 두지요.”
“단순히 짖는 거면 좋겠는데 말이야.”
대화를 들으며 얀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고, 도아는 갸웃했다.
“드블랑이 뭔데?”
어디서 들은 거 같기는 한데…….
“세계수의 세 가지 중 하나.”
로베른의 말에 도아는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 있었지.
프롱드의 드블랑,
방랑의 투아지트,
후단의 카엘.
“그런데 그 가문이랑 무슨, 아, 잠깐만. 뭔가 알 거 같은데, 그 지점을 알고 싶지 않아진 거 같기도 하고……?”
“B급, 진실에서 눈을 돌리면 안 된다네.”
“지금은 돌릴래.”
“도아 님, 그 이야기는 꼭 엘몬드 공작가에 오셔서 직접 공작님께 들어 주십시오.”
“음……. 염두에 두곤 있을게요.”
“드블랑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실이 아닙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이봐, 그런 말을 하면 엘몬드 가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제삼자는 조용히 하시죠.”
“짐은 누구에게도 명령받지 않네만.”
꼬우면 덤비든가.
절대적 강자이기에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본인을 그렇게 지칭하는 게 웃기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제왕은 무치라네.”
“…….”
아칸은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그죠, 그죠.’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른과 싸워 봐야 얻는 게 없다.
없을뿐더러 손해만 본다.
‘S급 모험가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도아가 손을 위아래로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하여간 아칸 경의 이야기는 알았어요.”
“네, 도아 님.”
아칸은 그제야 침착한 기색을 되찾았다.
얀이 재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도아 양, 벌써부터 지명이 들어오고 있던데. 어떻게 하시렵니까?”
“지명? 그게 뭐예요?”
“모험가를 지명해서 사건 의뢰가 들어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게 된다는 말은 ‘네임드’가 되었다는 뜻이지요.”
“저 유명해졌군요.”
“네, 북부에서는 상당히요.”
얀의 말에 도아는 ‘오오.’ 하고 장난스러운 감탄사를 터트렸다.
도아의 담백한 반응에 얀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나이에 A급 던전 솔로 공략에 성공해 슈퍼루키라고 불리고, 1년도 되지 않아 북부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아무리 겸손한 사람이라고 해도 ‘아, 정말요?’ 하며 자신의 명성에 대해서 궁금해할 법했다.
하지만 도아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장난스럽게 ‘저 유명해졌군요.’ 하고는 끝이었다.
그런 담백한 태도가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얀은 그녀가 정말로 ‘비추는 샘 공략’ 외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엘몬드 공작가와 이야기가 잘 되면 좋겠는데…….’
적어도 그러면 남대륙으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서 머물 이유가 하나 정도는 생기지 않을까?
한숨을 삼키며 얀은 길드장답게 웃고 이어 말했다.
“이대로 계속 명성을 쌓으시면 잘하면 내년에 A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초고속 승진이네요.”
도아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목표는 S급인데 말이야.’
모험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S급 달게 해 주세요. 하는 건 너무 하겠지.
S급이 되려면 그만큼 강렬한 의뢰가 있어야 한다는데…….
‘적당한 일이 생겼으면 좋겠네.’
도아는 속으로 작게 빌었다.
❖ ❖ ❖
얀과 아칸이 떠난 후, 도아는 훈련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유연성과 움직임이 예전만큼 돌아왔을 때, 도아는 안대를 풀어 보았다.
이제 흰자가 완전히 깨끗해졌다. 푸른빛이 돌 정도로 맑은 흰자라 안심되었다.
이리저리 눈을 돌려보니 반짝반짝 여러 가지 색으로 빛이 났다.
‘진짜 내 눈.’
어머니가 물려준 내 눈.
도아는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살짝 미를 지어 보이고 물러났다.
그녀는 서랍장을 열어보았다.
던전 코어에 꽂혀 있는 세계수 가지에서는 여전히 희미하게 빛 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아래 놓인 요정 알에 빛 가루가 떨어지는 족족 흡수된다.
“아직도 부족한가?”
도아가 갸웃거리며 요정 알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부화시키지 못하고 지나가겠는걸…….”
도아는 걱정스럽게 콕 하고 알을 찔러 보았다.
“괜찮니? 잘 자라고 있는 거 맞아?”
흔들흔들
알이 좌우로 흔들렸다.
“어라?”
도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찔러서는― 아닌 거 같네.’
좌우로 흔들리는 진동의 폭이 점점 더 커진다.
흔들거리던 알의 동작이 딱 멈추더니 번쩍―! 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