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아직 봄이라 밤이 길었다.
“봄날 밤길을 걸어서 무너진 폐허를 찾아 걷는 건 나름대로 운치가 있나?”
도아의 중얼거림에 쿠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달도 보름달이었다.
“운치가 있다고 해 둘까요. 그렇지 않으면 처량할 거 같거든요.”
“처량까지야?”
하하 웃으며 도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무더기를 디뎌 올라갔다.
로베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정도의 폐허가 지금까지 보고가 안 되었다는 게 놀랍군.”
“너무 노출되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도아가 무너진 담장을 가리켰다.
“게다가 이건 최근에 무너진 거야. 분명히 돌을 꾸준히 빼다가 썼겠지. 주변 주민들에게는 제법 편리한 채석장 아니었을까나.”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 보이긴 하다만…….”
로베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옛 성터라고 할 법했다.
성이 있었다는 흔적은 남아 있지만, 돈이 될 만한 건 말 그대로 돌 하나까지 빼갔다.
“이런 곳에서 마법사를 만났다고?”
“일단 찾아보자.”
셋은 나누어서 성터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도아는 뒷주머니에서 커피대를 꺼내서 커피를 꾹꾹 눌러 담고 불을 붙였다.
깊이 숨을 빨아들이자, 불빛이 반짝인다.
오랜만에 카페인이 몸속을 돌자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하아.”
도아는 연기를 뱉어내며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진짜 아르맥을 찾아내자!
1. 갇혀 있던 측근을 찾아서 성의 사정을 듣자.
2. 당나귀산의 성터에서 비밀통로를 찾아내자.
‘어디보자, 단서 추적.’
도아는 단서 추적을 시작했다. 가느다란 은색선이 한쪽으로 이어졌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는 척하며 도아는 단서 쪽으로 다가갔다.
무너진 성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로 추적선이 이어졌다. 벽 앞에는 잡초가 무성했다.
은색 선은 그 아래로 이어지고 있어서 도아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연기를 뱉었다.
담쟁이덩굴 사이로 연기가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도아는 담쟁이덩굴을 옆으로 치웠다.
개구멍이 보였다.
추적선이 이어진다.
“폐하, 쿠낙! 여기예요!”
도아의 부름에 두 사람이 다가왔다. 도아가 구멍을 가리켰다.
“연기를 뱉어 보니까 빨려 들어가는 게 막힌 구멍이 아닌 거 같아요.”
그녀가 커피대를 털어 대충 커피를 정리하고 도로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내가 제일 작으니까 일단 내가 먼저 가 볼게요. 폐하에게 후위를 부탁해도 될까나?”
“좋겠지.”
로베른의 말에 도아가 싱긋 웃고 허리에 걸린 비상용 랜턴을 손에 들고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예상보다 더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는데?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도아가 돌바닥과 뒤를 더듬어 보았다.
손가락 하나 걸리지 않게 매끈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신기하네.’
그녀는 앞쪽을 랜턴으로 비추어 보았다.
‘와, 깜깜해.’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볼게요!”
“조심하세요, 도아 양.”
“네, 그럴게에에에에?!”
“도아 양?!”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비밀통로가 앞으로 급격히 기울어졌다.
도아는 미끄럼틀에 누운 것처럼 앞으로 죽 미끄러졌다.
‘으아아아?’
가속도가 너무 붙었다, 하는데 몸이 붕 떴다.
도아는 재빠르게 낙법 자세를 취했다가 주변을 살피고 다이빙 자세로 바꿨다.
풍덩!
멋진 입수 자세로 물 밑에 들어간 도아에 이어 쿠낙도 물속으로 떨어졌다.
도아가 물 위로 올라와 소리쳤다.
“푸핫, 폐하! 우리 둘 다 괜찮아! 물로 떨어졌어!!”
잠시 후 로베른이 미끄럼틀에서 나왔지만, 물로 떨어지지 않고 망토 덕분에 부드럽게 공중에 떴다.
그가 물 건너편의 뭍으로 올라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느껴진다.
도아도 땅으로 올라와 머리카락을 짜내고 질컥거리는 부츠를 벗고 물을 쏟아냈다.
“떨어지는 사람이 바로 연못으로 빠지게 해 뒀네…….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닌가 봐요. 쿠낙은 그렇게 쫓아오면 안 되죠.”
도아가 눈을 찌푸리고 쿠낙을 바라보았다.
쿠낙이 말했다.
“도아 양에게 무슨 일이 생긴 후면 늦으니까요.”
“우리 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늦은 거죠. 적어도 한 걸음 뒤에서 날 붙잡아 주거나……. 그편이 더 낫지 않을까요.”
쿠낙은 그 말에 천천히 도아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함께 죽겠다.
그런 말을 지금 내뱉어도, 도아 양은 조금도 기뻐할 거 같지 않았다.
“…… 알겠습니다.”
늦은 그의 대답에 도아는 빙긋 웃었다.
“좋아요.”
화르륵
로베른이 랜턴에 불을 붙었다. 도아가 그의 랜턴을 바라보았다.
“화염석 랜턴이네? 폐하는 불 마나를 사용하니까 금방 불을 붙이는구나……. 나는 붙이려면 한세월인데.”
“짐에게 어울리는 랜턴이지.”
도아는 제 작은 별조각 랜턴을 들어 올렸다.
별조각 랜턴이 따뜻한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주변이 어두울수록 빛이 밝아지는 랜턴이라, 로베른이 밝은 랜턴을 켜자 광량이 줄어들었다.
‘예쁘고 편리하니 됐지.’
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구실?”
커다란 책상과 다양한 시험관, 커다란 책장과 가지런히 꽂힌 가죽 정장의 책들.
“그냥 대놓고 마법 연구실입니다, 하는 느낌이네.”
도아는 어이가 없어서 책상 위 연구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보존 마법이 걸려 있나? 누가 관리하는 건 아닐 테고…….”
“…… B급.”
로베른이 그녀를 불렀다. 도아가 그를 돌아보니 전신거울 앞에 로베른이 서 있었다.
도아가 ‘으.’ 하는 얼굴로 다가가며 물었다.
“설마 이 거울 속 잘생긴 인물이 누구인 줄 아나? 충격적이군. 이런 대사 하려는 거 아니…… 어?”
도아도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도아 양?”
도아는 무서운 걸 본 사람처럼 거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도련님이 있어요.”
“!!”
쿠낙이 재빠르게 도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쿠낙?!”
“도아 양도 빨려 들어갈지 모릅니다.”
“아. 그건 생각 못 했네요. 폐하, 괜찮아?”
로베른이 거울로 손을 뻗었다.
“로베른!”
그녀가 놀라 그의 팔을 잡아당김과 동시에 로베른의 손이 거울 표면에 닿았다.
“평범한 거울이야.”
“그 확인을 꼭 본인 손으로 해야 해?!”
로베른이 도아를 돌아보더니 “호오.” 하고 말했다.
“그렇게나 B급은 짐이 걱정되나? 짐을 사모하고 있는 줄을 몰랐군. 미안하네만, B급. 짐은―.”
도아가 그를 발로 걷어찼다. 로베른이 웃으며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도아가 주먹을 꽉 쥐고 흔들어 보였다.
“진짜, 지금 일하는 중이라 내가 용서한다. 아오.”
투덜거리고 도아가 거울 속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아르맥이 뭐라고 말하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지만 들리지 않았다.
도아가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진짜일까? 만약 진짜라면 여기서 어떻게 꺼내지? 난 이런 고등 마법이라면 완전히 까막눈이야.”
“이런 마법은 건드리지 않는 편이 안전하겠지요.”
“응……. 전문가가 필요하긴 하겠지. 하지만 전문가를 어디서 찾지?”
“미르카의 모험가 길드와 접촉하면 마법사 한둘 정도는 금방 구해질 겁니다.”
“그게 나으려나…….”
도아가 중얼거리며 거울 속의 아르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도아가 말했다.
“저기, 혹시 우리 말은 들려요?”
아르맥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울고만 있다.
‘진짜라면 정말 곤란하네. 아마 단서 추적을 따라왔으니 진짜이긴 하겠지만.’
퀘스트 창을 확인해 볼까, 하는데 누군가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이 동시에 휙 돌아섰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인물은 물로 떨어지지 않고 물 위에 가볍게 착지해서 섰다.
양팔을 얍 좌우로 벌리고 물 위에 발끝으로 톡 선다.
발끝부터 물결이 일었다.
베이비블루색 머리카락은 무척 길어서 종아리쯤 닿을 듯했고, 주홍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였다.
귀와 목에 걸린 장신구가 무척이나 반짝거리고 화려했다.
팔에도 커다란 팔찌를 몇 개나 차고 있었다.
그건 발목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옷은 단출한 디자인으로 두루마기를 하나 걸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이는 이제 열두셋쯤 되었을까?
도아가 긴장해 검 손잡이를 잡았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성별은 알 수 없었지만 빚은 듯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이 몸을 기다리게 하더니, 이런 곳에 처박혀서 뭘 하는 거지?”
목소리도 중성적이었다.
도아가 물었다.
“네가 누군데?”
“그대가 김도아 아닌가? 나를 만나기 전에는 빛모래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어……?”
순간 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주홍색 눈동자가 도아의 양옆을 휙휙 바라보더니 웃었다.
“뭐야? S급을 양쪽에 거느리고, 뭘 하고 싶은 건지.”
“네 놈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로베른이 묻자, 소년은 통통 물 위를 걸어서 뭍에 도착했다.
로베른을 완전히 무시하며 소년은 도아에게 바싹 다가갔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진짜 아주르 나자크로군. 연구에 협력할 생각 없나?”
“없는데.”
“그거 아쉽군. 적절한 대가를 지불하면 어떤가?”
“눈은 비싸.”
“으응, 그렇지만. 이건 진귀한데. 가지고 싶구만, 가지고 싶어. 이렇게 예쁜 눈이라니.”
그가 도아의 눈으로 손을 뻗었다.
파지직!
“아얏!”
소년이 손을 움츠렸다. 손끝이 까맣게 타 있었다. 도아가 놀라 손을 잡았다.
“괜찮아??”
“난폭하구만. 그런데 어떻게 내 마법을 막았지? 그 머리띠 정체가 뭐야? 아티팩트인가? 내 마법을 막을 만큼 대단한 아티팩트가 존재한다고?”
소년은 손가락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지 중얼거리다가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손목에 걸린 팔찌의 돌이 밝게 빛났다.
‘크리스털이었구나!’
도아가 몸을 빼려는데, 쿠낙이 사정없이 검을 휘두르는 게 보였다.
그대로 소년의 팔이 잘릴 찰나, 아슬아슬하게 도아가 검을 튕겨냈다.
캉!
도아는 제가 이렇게 빠르게 발검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소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팔을 자르면 안 되죠!”
“다시 붙이면 됩니다.”
“아니……. 그래도 안 되죠!”
포션으로 팔다리를 착착 붙이니까 아무래도 감각이 이상한 건 알지만.
그래도 아이의 팔다리를 샥샥 자르는 건 아니지 않아?!
“그럼 그럼, 이 몸의 팔다리는 잘 붙지도 않는다! 섬세하게 만든 건데.”
“……?”
‘만들어?’
도아가 소년을 돌아보았다. 소년이 훗훗 웃었다.
“그대도 이 몸의 대단함을 알아보는군? 그 열정. 인정하지. 자, 실컷 봐도 좋다!”
펄럭
그가 제 두루마기를 휙 벗어 던졌다.
“으악씨―!”
도아는 간신히 욕이 나가려는 걸 억눌렀다.
“어떠냐? 아름답지?”
“꼬마야, 옷은 그렇게 함부로 벗는 게 아니란다.”
도아의 목소리가 저절로 딱딱해졌다. 그녀가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두루마기를 받았다.
소년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몸을 이쪽저쪽 내보인다.
“아름다운 걸 숨기는 게 죄악이지. 내가 허락하니 실컷 봐도 좋아. 특별히 삐―도 큰 걸로 달았다고.”
“미친놈의 미친 짓거리가 여전해서 별 생각도 안 드는군.”
“흥, 네 놈들은 눈이 삐었어. 그렇게 아름다운 육체가 알몸으로 달려드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안 하고. 고자 아닌가?”
로베른이 차갑게 말했다.
“네 몸도 아닌 몸으로 그딴 짓을 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나?”
도아는 그 말에 섬찟해져서 소년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두루마기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도아가 두루마기를 펄럭여 소년의 목을 조를 듯 휙 둘러주며 말했다.
“남의 몸을 빼앗아서 함부로 사역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돌려줘.”
주홍색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베이비블루 빛 속눈썹에 둘러싸여 색 대비가 강렬하다.
소년이 배시시 웃었다.
새하얀 치아도 완벽히 가지런했다.
“그건 아니야. 이건 내가 만든 몸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아주르 나자크.”
“만들었다고……?”
“그래. 특별히, 마법으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든 몸이지. 내 마법의 정수라고 할까?”
도아가 천천히 손을 놓아주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소년은 두루마기를 입고 앞의 고름을 귀엽게 나비 모양으로 묶었다.
“자, 그럼 소개를 할까? 나는 마법사 링의 링 리더, 바르샤야. 그대가 분명 김도아겠지?”
“맞아.”
“산―다르크가 정화를 위한 빛모래를 보냈어. 효과가 좋았고, 마법사 링에서 대량으로 구매하고 싶다고 서신을 보냈지. 그랬더니 산―다르크가 하는 말이 그대를 만나기 전에는 팔 수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만나겠다고 초대장을 보냈지.”
바르샤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도록 오지 않다니. 링 리더를 이렇게 기다리게 한 사람은 그대가 최초야.”
“레하가 그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도아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섞였다.
빛모래를 팔지 못하면 산―다르크에도 손해일 텐데.
바르샤가 “흥.” 하고 팔짱을 꼈다.
“곰족은 고집이 아주 세지. 그쪽을 설득하느니, 내가 직접 널 만나러 오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바르샤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쓸데없는 용건이면 공격해서 눈알이나 가지고 가려 했는데, S급도 둘이나 달고 있고. 마검을 정화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바르샤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게다가 그 아주르 나자크의 아름다움. 과연. 그대가 내 앞에서도 뻔뻔히 굴 수 있는 건 그 아름다움 때문이겠지.”
“아니. 전혀 아닌데.”
저절로 말이 나왔지만 바르샤는 무시하며 작은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왜 S급 놈들은 개성이 이렇게까지 강하지?’
도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