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쿠낙은 민망한 듯이 말했다.
“얀이 전부 주문해 주는 것들이라…….”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짐을 잔뜩 들고 왔죠.”
얀이 배낭 가득 뭘 짊어지고 있나 했더니 쿠낙에게 줄 선물이었다.
그 뒤로 종종 얀은 우편물을 보내고는 했다.
예전과 같은 검은색이지만 소매에 금사나 은사로 자수가 들어가기도 했다. 과하지는 않아서 고아한 느낌을 준다.
허리띠도 예전에는 단순하고 낡은 가죽 벨트였는데, 지금은 제대로 은제 장식이 달린 물건이었다.
도아가 그의 옷차림을 훑자, 쿠낙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옷 가장자리에 자수가 들어간 건 너무 심했나. 아니면 팔토시의 버클에 문제가 있는 건가.’
도아는 유심히 그를 보고 다시 로베른을 보았다. 그의 옷차림이야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시선을 눈치챈 로베른이 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걸 주지.”
“뭔데?”
도아가 얼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로베른이 그녀의 손 위에 브로치를 떨어트렸다.
“와아!”
까메오 브로치였다. 일반적인 까메오와 다른 점은 고양이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새하얀 고양이 까메오의 바탕은 푸른색이었다. 가장자리의 촘촘한 밀그레인이 아름답다.
“내한성 브로치라네. B급은 아이템은 잘 망가트리면서 절대로 사지 않더군.”
“큭…….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도아는 제 옷에 브로치를 달며 생각했다.
‘댄버스 부인이 옷을 잘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디자인은 평범하니까.’
그때 잠자리 준비를 위해서 모포를 옮기는 베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고, 베리야!”
도아가 느닷없이 모포와 함께 베리를 끌어안았다. 베리는 놀랐지만, 웃음을 터트렸다.
“더아 님, 무슨 일이세여?”
“아니, 우리 베리. 옷 새로 맞춰줘야겠네.”
이제 보니 키가 무척 커서 옷이 깡똥했다. 게다가 낡은 옷을 기워 입은 게 보였다.
“전 갠찮아여!”
폴짝 뛰는 베리를 더 힘주어 안으며 도아가 말했다.
“아냐, 이 누나만 믿어. 누나가 다 알아서 할게.”
“누, 누나…….”
갑작스러운 말에 베리의 꼬리가 바싹 섰다. 인간이었다면 얼굴이 붉어졌을 테지만, 고양이족이니 그런 티는 나지 않았다.
“내가 그동안 베리를 신경 못 썼네. 프롱드 가면 우리 둘이서 옷 맞추자.”
“컹컹!”
“그래, 그래. 해왕이도 새 안장 맞춰주고 그럴게.”
도아의 말에 해왕이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밤이 깊어 모닥불을 대강 정리하고 일행은 자리에 누웠다.
도아는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도아는 결국 텐트 밖으로 나왔다.
저녁 바람은 차가웠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봐도 봐도 경이로운 하늘이 거기에 펼쳐져 있었다.
별이 너무 많아서, 별빛으로 세상이 밝아질 거 같은 하늘이었다.
‘이렇게까지 별이 많은 줄 여기 오기까지는 몰랐지.’
“잠이 안 오나?”
도아가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로베른이 모닥불 자리 앞에 앉아 있었다.
도아가 달의 위치를 가늠하고 로베른을 다시 보았다.
“불침번?”
“그냥 바람 쐬기지.”
그가 빈 의자를 권해서 도아는 자리에 앉았다. 도아가 물었다.
“불침번 안 서도 되지 않아?”
“짐의 말을 무엇으로 들은 건지 모르겠군. 바람 쐰다고 하지 않았나?”
도아는 그를 빤히 보다가 말했다.
“뭐어, 폐하가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도아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
도아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다시 로베른을 향했다.
“오늘 바람은 거칠군.”
“…… 그러게.”
바람에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인간의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아주 먼 곳에서 온 냄새였다.
‘결국 불침번이네.’
도아가 모닥불 자리의 덮어놓은 숯불을 나무막대로 뒤적이고 주전자를 올렸다.
“폐하는 왜 잠이 안 와?”
로베른이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잠이 오지 않는 건 B급 쪽이겠지. 걱정되나?”
“응?”
“엘몬드 공작을 만나는 게.”
“음, 그게…… 조금……?”
태연한 척해도 속으로는 긴장되고 있었나 보다.
도아는 발갛게 달아오른 숯을 바라보았다.
“폐하는 가족이 있어?”
“있었지.”
대답이 쉽게 돌아와 도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로베른의 시선은 숯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여기서 질문을 멈춰야 하나 싶었지만, 그보다 알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지금은 헤어진 거야?”
로베른이 그제야 시선을 돌려 도아를 바라보았다.
“왜? 짐에 대해 궁금해졌나?”
“폐하는 은근히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잖아. 가족 이야기도 그렇고…….”
도아가 다리를 의자 위로 올리며 무릎을 당겨 안았다.
“궁금해졌어. 안 돼?”
그런 도아를 로베른은 한참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안 되진 않지만, B급은…….”
그가 말을 끌었다. 도아는 뒷말을 기다렸다.
“그대는 잔혹할 만큼 다정해지지는 못할 거 같거든.”
도아는 살짝 입을 벌렸다.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저게 뭔 소리인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솔직히 말해서 맥락을 전혀 모르겠다.
어리둥절한 도아의 표정을 보고 로베른은 짧게 웃었다.
그가 다리를 꼬며 말했다.
“짐에 대해 궁금해졌다니 간단히 알려줄까. 짐의 가족은, 전부 죽었네.”
도아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베른은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인간사냥이었지. 노예를 보충하기 위해서 종종 그런 짓을 하거든. 마수가 넘쳤다, 라고만 보고하면 마을 하나가 없어져도 그만이지.”
무릎을 붙잡은 도아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노예로 파는 거니 나이 든 인간도, 너무 어린 인간도 수지가 안 맞지. 그 자리에서 전부 죽이고는 적당한 나이의 사람들만 끌고 간다네. 짐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었는데, 거기서 둘이 죽었지.”
도아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짐이 나머지 넷을 구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을 때는 이미 다 죽은 후였지. 우리는 운이 나쁘게 지하 투기장에 팔렸거든.”
주전자가 이제 끓기 시작했다.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도아는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 게 일그러져 보였다.
세상이 물로 찬 것처럼 일렁이다가 고여서 떨어졌다.
로베른이 손을 뻗어 도아의 뺨을 쓸었다.
“그대가 울 일은 아닌데.”
도아는 그가 무슨 환상을 봤는지 알 거 같았다. 절대로 이뤄지지 않는 희망이 뭔지 알 거 같았다.
입 밖으로 죽어도 내지는 않겠지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쓸고, 젖은 속눈썹을 훑어냈다.
도아는 눈을 감고 얌전히 그가 하는 대로 놔두었지만, 그래도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아주르 나자크가 고장 났나?”
눈을 떠서 본 로베른은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가장 괴로운 건 로베른일 텐데, 자신이 우는 게 우스워서 도아는 눈물을 멈추려 애썼다.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로베른이 속에 담고 있는 건 이 정도가 아니겠지.
자신은 괴로우면 엉엉 울면서 라크샤샤나 조세핀, 엘리바스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그런 상대가 없을 터였다.
물론 그런 사람이 없어도 괜찮다고 하겠지.
단단하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괜찮은 건가?’
문득 그의 이명이 떠올랐다.
황제.
절대자의 자리는 고독한 법이며, 정상에 홀로 서 있는 건 외로운 법이다.
‘이 사람에게 엄청 엄청 괜찮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마음속에 꾹꾹 쌓아둔 걸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도아는 도로 눈을 꾹 감았다.
“금방 고쳐질 거야.”
웅얼거리는 말에 로베른이 픽 웃으며 도아의 감은 눈 밑으로 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냈다.
그가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본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대놓고 그에게 ‘과거가 궁금하다.’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 길드를 통해 조사를 했으면 했지, 그에게 사적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그렇군. 이런 기분인가.’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이 세계에서는 널리고 깔린 이야기다. 그런데 그녀는 울고 있었다.
로베른은 예상치 못한 기분을 느꼈다.
그건 만족감이었다.
지금 도아가 흘리는 눈물은 전부 그의 것이다.
손을 뻗어 젖은 뺨을 닦아내도, 도아는 순순하게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여린 눈가를 쓸고, 안와의 윤곽을 더듬어도 얌전했다.
손가락이 뜨거운 눈물에 젖는다.
눈물을 참느라 눈을 꼭 감기에 살짝 엄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려 보았다.
어떤 눈인지 보고 싶다.
눈물이 고인 초록색 눈동자는 밤의 숲 같은 어두운 녹색에서 감람색으로, 다시 취람 빛으로 변했다. 눈물에 아롱아롱 색이 흔들린다.
그는 엄지를 뗐다. 도로 눈꺼풀이 감긴다.
도아는 눈물을 꽉꽉 눌러 참았다. 눈을 뜨니 푸른 눈동자가 빤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고쳐졌나?”
“고쳐졌어……. 아마도.”
후우, 길게 숨을 내뱉자 로베른은 그녀에게서 손을 뗐다.
도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갑을 끼고 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잔을 준비하고 차를 우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로베른은 제 젖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제 손가락을 핥아 보았다.
평범한 눈물인데, 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달다.
‘이런 거군.’
다시 한번 그는 생각했다.
‘이런 거였군.’
도아가 돌아서서 잔을 건넸고, 그는 잔을 받아들었다.
도아는 의자를 끌어다가 그의 옆에 바싹 붙여 앉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다.
“에취.”
그녀가 작게 재채기하자 로베른이 제 망토를 내주었다.
“고마워.”
도아는 로베른의 망토를 두르고 잔을 쥐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차를 마셨다.
달은 천천히 서에서 동으로 기울어졌다.
툭
로베른은 고개를 돌렸다. 도아의 고개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져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끄러지는 컵을 로베른이 조심스럽게 빼 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닥하자 주전자가 둥실 떠올라 기울어져서 뜨거운 차를 그의 잔에 채워 넣었다.
동틀 무렵 일찍 일어난 베리가 텐트를 나왔다가 두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
로베른이 손가락을 세워 입가에 가져갔다. 결국 도아는 해가 완전히 뜰 때까지 쿨쿨 자 버렸다.
❖ ❖ ❖
나르카와 프롱드 사이의 관문은 무척 컸다.
‘역시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건 위화감이 커.’
도아는 모험가 카드로 신분을 증명하고 국경을 넘었다.
베리가 언제 샀는지 가이드 북을 손에 들고 말했다.
“더아 님, 여기서부터 슈도까지 일주일이 걸린대여.”
“그래?”
“녜! 그리고 국경 마을의 명물인 뎜술 갈레뚜도 잊지 말라구 써 있떠여.”
“점술 갈레트?”
“갈레뚜를 뒤집어서 접히는 모양으로 뎜을 봐 준대요. 그리고 마싰대요!”
“그건 꼭 먹어야겠군.”
쿠낙이 웃으며 말했다.
“관광도 좋지만, 일단 일정을 세우지요. 바로 엘몬드 영지로 내려가실 건가요?”
도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국경인 만큼 사람도 많고, 그만큼 어수선해 보였다. 덩치 큰 남자 둘에, 기수까지 데리고 있는 모험가를 뜯어낼 얼치기는 없겠지만.
“오늘 갈레트만 먹고 이동하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부지런히 움직이면 나스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오늘은 거기까지 가요. 그러기 위해서 먼저 점술 갈레트를 해치웁시다!”
갈레트는 메밀로 만든 크레이프였다. 엷게 편 반죽이 적당히 익으면 도아가 직접 뒤집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완벽하게 뒤집히면 길운이라고 한다.
접히는 모양에 따라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구워진 메밀 크레이프 속에 짭짤한 치즈와 햄을 넣고 척척 접어주면 갈레트 완성.
“맛있다.”
“마시떠요!”
도아와 베리는 운이 좋다는 판정을 받고 맛있는 갈레트를 먹었다.
그리고는 곧장 국경 마을을 벗어나 나스로 향했다.
확실히 국경을 지나 본격적으로 프롱드에 들어서자 사람들이나 마을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평야가 쭉 이어지는 건 나르카와 마찬가지였지만 나르카보다 훨씬 날씨도 온화하고 땅도 비옥해 보였다.
“뭔가 좋은 냄새가 나는데요?”
도아의 말에 쿠낙이 빙그레 웃었다.
“나스의 주요 농작물 중 하나는 라벤더거든요.”
그 말에 설마! 하고 도아는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언덕 위에 오르자 한눈에 나스의 풍경이 보였다.
보랏빛 라벤더밭이 한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달콤한 향기가 밀려들어 왔다.
“와아―!”
도아는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풀과 섞인 라벤더 냄새가 폐 속 깊이 빨려들어 왔다.
“굉장하다…….”
저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도아의 옆에 나란히 선 베리도 연신 감탄했다.
라벤더와 비슷하지만 라벤더가 아닌 이 식물은 라벤더보다 더 부드럽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라벤더밭 사이에 난 길을 걸어 나스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관련 상품을 잔뜩 팔고 있는 게 보였다.
도아는 주머니를 열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지는 마음을 꾹 참았다. 계속 여행할 텐데, 기념품을 사 봐야 짐만 늘어날 뿐이다.
그래도 필요하니까! 라벤더 향이 짙은 포푸리와 비누 같은 건 샀다.
여행을 계속하는 데 향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확실히 나르카에 비하면 가판대도 화려하고, 물건 만드는 센스도 좋아.’
“리더, 그렇게 많이 사서 어디에 쓰려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도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바르샤! 접속했구나!”
바구니 안에 구겨져 있던 바르샤가 고개를 불쑥 내밀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