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외할머니.
외할머니.
도아는 순간 단어가 입력되지 않아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노부인은 연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네 엄마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네 소식을 듣고 정말로 깜짝 놀랐어. 레쥬의 딸의 살아 있다니.”
도아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물었다.
“제 외할머니시라고요?”
“그래! 깜짝 놀랐지? 맞다. 그렇지. 미안하구나.”
허둥지둥 노부인은 목걸이 로켓을 열어서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작은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소녀의 초상화였다.
갈색 머리카락에 초록 눈동자.
엘몬드 공작이 보내준 초상화에 나온 인상과 거의 흡사했다.
“도아 양과 닮은 거 같군요.”
쿠낙이 미소를 지으며 말해 도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요?”
“네.”
노부인이 손을 뻗어 도아의 손을 꼭 잡았다.
“레쥬의 딸이라니. 한눈에 알아봤단다.”
도아는 어색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노부인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놀랐겠지만, 잠깐이라도 나와 이야기를 나눠줄 수는 없겠니?”
도아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그녀에게 쿠낙이 말했다.
“기다릴 테니 이야기를 나누고 오세요.”
“짐은 B급이 일단 엘몬드 공작을 만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둘의 의견이 갈렸다.
노부인이 로베른을 찌릿 노려보았다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오오, 정말로 엘몬드 공작을 만나러 가는 거니? 그놈을 만나지 마라. 그 집안이 레쥬를 납치해 가서 나에게 보여주지도 않았단다.”
갑작스러운 정보에 도아는 놀랐다.
“납치요?”
“그래, 레쥬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 내가 얼마나 레쥬를 찾았는데……. 어느 날 그 못된 놈이 레쥬와 결혼하겠다고 하더구나. 나는 딸과 한 번만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 녀석은 매정하게 날 내쫓았지.”
초록색 눈이 매서운 빛을 발했다.
“레쥬가 일찍 죽은 것도 그 공작 탓인 게야. 아주르 나자크가 탐났던 거지.”
도아는 엘몬드 공작이 보낸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가족이라고, 만나고 싶다고, 그런 내용이 가득한 편지였다.
어머니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그게 다 거짓말이라고?’
그냥 아주르 나자크가 탐난 거라고?
노부인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엘몬드 공작가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혈통의 천함은 어쩔 수 없으니 말이다. 아주르 나자크를 이용하려고 한 거야. 너도 거기에 넘어가지 마라. 응? 부디 이 할미가 더는 걱정하지 않게 해 주겠니?”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쿠낙 역시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때 저쪽에서 말을 탄 기사들이 달려왔다. 노부인이 “아아.” 하고 몸을 떨었다.
“공작가 놈들이 눈치챈 모양이다. 내가 널 먼저 만난 걸…….”
선두에 선 기수는 도아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회색빛 털을 가진 늑대다.
아칸은 새하얀 마차와 노부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눈에 경멸이 서린다.
“드블랑 부인, 드블랑 가문은 분명히 엘몬드 공작령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텐데.”
노부인이 도아를 감싸듯 나서며 말했다.
“공작가에서 딸뿐만 아니라 내 손녀까지 빼앗게 둘 줄 알고!”
“무슨 소리를! 그쪽이야말로 우리 아가씨에게 함부로 말을 걸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봐라, 도아야! 또 이렇게 할미를 핍박하는구나!”
로베른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도아는 생전 처음 겪는 친척싸움―이걸 친척싸움이라고 해야 할까?―에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끙 하고 손을 들어 올렸다.
“아칸 경.”
“도아 님.”
아칸이 서둘러 말에서 내렸고, 다른 기사들도 이어 말에서 절도있게 내렸다.
“모시러 왔습니다. 프롱드 국경을 넘으셨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어 늦은 점을 사과드립니다.”
“아니에요. 그런데……. 저분이 정말로 제 외할머니는 맞는 거네요?”
아칸이 그 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칸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는 억울하고 할 말이 무척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 늑대라도 표정이 무척 풍부해서 그녀는 미소가 나오려는 걸 눌러 참았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닌 거 같았다.
도아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외할머니와 먼저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그건…….”
아칸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무장한 기사들을 이끌고 있는 이상 무고한 노부인을 핍박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알겠습니다. 도아 님께서 편하신 대로 하시지요.”
❖ ❖ ❖
드블랑.
세계수의 세 가지 중 하나.
아주르 나자크가 태어나는 가문.
“그래서 흰색과 녹색이 우리 가문의 색이란다. 세계수 가지는 새하얀 빛이었단다…….”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알고 말굽쇼. 그 가지 하나 제 주머니 속에도 있습니다.
“어머, 그러고 보니 내 소개도 안 했구나. 나는 드블랑의 가주인 메세 드블랑이라고 한단다. 그냥 할머니라고 부르렴.”
생글생글 웃으며 메세가 도아에게 권했다. 도아는 어색하게 “할머니.” 하고 작게 불렀다.
메세는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레쥬의 딸을 찾았으니 이제 내가 여한이 없구나.”
도아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마차 여행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찻잔이었다.
“그래, 모험가를 하고 있다고?”
“네.”
메세가 눈을 찌푸렸다.
“너무 위험한 일이야. 너 하나쯤 먹여 살리는 건 일도 아니란다. 모험가는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렴. 응?”
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무슨 할 일이 있어. 어쩜. 모험가들 중에서는 무뢰배들도 많다고 들었다. 네가 어떻게 그들과 어울려 다니겠니. 손도 이렇게 거칠어져서는.”
메세가 도아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 나이인데도 메세의 손은 보드라웠다. 오히려 도아의 손에 훈련으로 인한 굳은살이 박여 있어 더욱 거칠었다.
“이제 다 이 할머니에게 맡겨라. 네 사촌들도 다 널 궁금해하고 있단다.”
“제 사촌이요?”
“그래. 네 어머니에게 형제들이 없었겠니? 이모들도 네 소식을 들으면 깜짝 놀랄 게다.”
메세는 이어서 드블랑 저택이 얼마나 화려한지, 호사스러운지 이야기했다.
너는 걱정할 거 하나 없다.
조금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이 할미만 꼭 믿고 있으면 돼요. 내가 좋은 혼처도 알아봐 주마.”
“혼처요?”
그 말에는 웃음이 터져 나올 거 같은 걸 도아는 꽉 억눌렀다.
메세가 “그래.” 하고 눈을 찌푸렸다.
“아직 너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지만, 드블랑에게는 아주르 나자크를 이어 가야 할 임무가 있단다.”
도아는 슬그머니 그 이야기를 피해 가며 되물었다.
“제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레쥬 말이니? 레쥬는…… 무척이나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단다. 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했지.”
메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공작이 그런 짓을 한 게야.”
도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여러모로 계속 놀라는 일뿐이다.
“그럼 어머니는 언제 사라지신 건가요?”
“응? 으음……. 그게 한 십 년쯤? 아니, 이십 년쯤 된 거 같구나.”
눈앞의 도아는 아무래도 열 살은 넘어 보여 메세가 화급히 말을 고쳤다.
“그게 뭐가 중요하니. 이제 네가 돌아왔는데! 이제 이 할미랑 가자. 응? 부탁이다. 네 진짜 가족에게 널 소개할 수 있게 해 주렴.”
그때 저쪽에서 검은색 마차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달리기를 위해 만들어진 경마차였지만 아슬아슬한 속도였다.
‘저러다가 바퀴라도 빠지는 거 아냐?’
도아가 마차를 바라보는데, 마차는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경마차는 따로 마부가 없다.
마부가 자리에서 뛰어내리더니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걸어오는 폼이 무척이나 성난 듯 보였다.
당황한 아칸이 그에게 다가갔다.
“공작 각하.”
귀가 좋은 도아는 그 단어를 알아듣고 놀라 다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선명하다.
그가 아칸을 뿌리치고 이쪽 가까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도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한순간 그의 얼굴이 흔들렸다.
확 밝아졌다가, 울 듯이 일그러졌다가 한순간 감정을 다잡는다.
그가 차를 마시고 있는 두 사람 옆에 딱 버티고 서서 말했다.
“드블랑 부인.”
“엘몬드 공작.”
메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제 누이를 마중 나왔습니다.”
“이제 이 아이도 내게서 억지로 빼앗아 가려고? 자네 아버지만큼 자네도 파렴치하군.”
“빼앗아? 하―!”
그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간이테이블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내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가 입 다물고 있는 걸 빌미로 아무 소리나 지껄이는 건 상관없어.”
“명예? 엘몬드 공작가에 명예라는 게 있나?”
메세가 발끈해 말했지만, 에크하르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하지만 누이에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건 안 되지. 억지로 쫓아내기 전에 당장 내 영지에서 꺼져.”
메세가 도아를 바라보았다.
“봤니? 이게 엘몬드 공작가의 실체란다. 힘으로 뭐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명예도 도덕도 없는 집단이야.”
메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아야, 이제 가자꾸나. 더는 여기에 볼일이 없으니까.”
도아가 메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에크하르드의 표정이 초조해졌다.
“누이―”
“진짜 아주르 나자크와 네가 어떻게 남매가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메세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도아가 그런 메세에게 말했다.
“할머니, 차는 정말로 감사했어요. 어머니 이야기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도아가 에크하르드를 바라보고 살짝 미소 지었다.
“도운이랑 먼저 이야기를 해 볼래요.”
“뭐?”
“누나!”
반색하며 에크하르드가 외쳤다. 도아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메세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죽일 듯이 에크하르드를 노려보다가 도아에게 말했다.
“나는 너무 걱정이 되는구나……. 그렇지만……. 알았다. 그래도 잊지 말고, 꼭 찾아오렴. 알았지?”
“네,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저 상당히 강하거든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메세는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도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라탔다.
드블랑 가문의 시종이 다구와 테이블을 치우고 도아에게 정중히 초청장을 건네주었다.
도아가 초청장을 받아들자, 메세가 창문 너머로 말했다.
“알았니? 꼭이다.”
“네.”
메세는 창문을 닫았고, 그걸 신호로 마차가 출발했다.
도아가 에크하르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날 생각은 아니었는데.’
옷도 새로 맞춰서 갈아입고, 영지 분위기도 좀 보고. 어떤 사람인지 살피다가 짜―잔하고 놀래켜 줄 생각이었는데.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다.
도아가 “으음…….” 하고 초청장을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에크하르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 하세요? 김도아입니다?”
어색한 인사말을 하며 도아는 그를 살펴보았다. 에크하르드는 간신히 표정을 폈다.
“에크하르드 도운 엘몬드입니다.”
인사하고 그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렇게 만날 생각이 아니었는데요.”
그는 초조해졌다.
이런 식으로 길바닥에서 인사를 나눌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기사단을 보내서 그녀를 맞이하고, 미리 준비해 둔 화려한 마차로 이송해서.
저택에서 첫 만남을 가질 생각이었다.
만찬도 준비했고, 저택도 도아를 맞이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공작가의 잃어버린 딸을 찾은 걸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가.’
메세 드블랑을 생각하니 분통이 터졌다. 도아 누나에게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해댔을지 안 봐도 뻔했다.
그가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그리고, 방금 그건…… 심약한 노인을 겁박해서 쫓아낸 게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에크하르드를 보자 오히려 도아 쪽에서 여유가 생겼다.
그녀는 가만히 에크하르드를 보았다. 묘하게 도아보다 그가 더 어머니를 닮은 거 같았다.
도아가 말했다.
“네. 알겠어요. 나중에 이야기해 주는 거지요?”
“물론입니다.”
에크하르드가 힘주어 대답했다. 그때 로베른이 목소리를 높였다.
“길에서 계속 이야기할 건가? 그럴 거면 텐트를 치지.”
에크하르드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렇군요. 일단 제 자택으로 가시죠.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도아가 놀라 묻자, 에크하르드가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 그렇게 부담가지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랄까. 그냥 작은 환영회 같은 건데. 아, 그냥 넘어갈 겁니다. 환영회는 나중에 해도 되지요.”
준비를 다 해 둔 환영회를 파기하기로 마음먹으며 에크하르드가 하하 웃었다.
도아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럼 출발해도 될까요? 솔직히 여기까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 저희 일정은 내일모레쯤 도착하는 거였거든요.”
“다음 마을에 마차를 준비해 둔 게 있을 겁니다.”
“그럼 알겠어요.”
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일행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에크하르드가 도아를 불렀다.
“저기…….”
“?”
의아해하며 도아가 그를 돌아보자 에크하르드가 작게 물었다.
“이런 말을 묻기에는 이상하지만……. 왜 드블랑 부인을 따라가지 않으셨습니까?”
“음―.”
도아가 눈을 굴리고 하하 웃었다.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 라고 해 둘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