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드블랑은 무슨 배짱으로 그런 난리를 쳤는지 모르겠네.’
도아는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나름대로 이해가 되는 면도 있다.
어느 날 딸이 듣도 보도 못한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하지 않나, 임신하지 않나.
‘연애 결혼이란 게 생긴 것도 현대에선 오래되지 않았고. 집안에서 정해주는 사람이 아닌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와 결혼하는 건 금수나 하는 짓이라는 의견도 있었고…….’
외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으나, 이해한다 해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도 엄마에게는 아예 관심이 없었잖아. 언제 돌아온 지도 몰랐고. 엄마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결혼해서 애 낳는 게 인생의 전부라면, 그게 종마랑 뭐가 다르담.’
도아는 편지뭉치를 정리해 넣었다.
‘아, 그래서 더 싫었나? 자기 인생을 부정하는 것 같은 말을 해서?’
조심스럽게 상자를 닫고 도아는 침대에 누웠다.
‘와, 침실 천장이 돔이야.’
신기하네.
“컹컹!”
밖에서 짖는 소리가 나서 도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침실에서 나가니 해왕이가 들어와 있었고, 당황한 시종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해왕아, 앉아.”
도아의 명에 해왕이가 착 엉덩이를 바닥에 붙였다. 베리가 달려가서 해왕이를 꼭 끌어안았다.
“미안한데, 해왕이도 같이 방에서 지내도 될까? 마구간에 넣어두면 외로움을 많이 타서…….”
시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괜찮습니다.”
“저희는 들개가 들어온 줄 알고 놀라서…….”
“아, 미안. 내가 키우는 기수야.”
도아는 마구간에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시종이 나가자 도아가 해왕이를 보고 웃었다.
“아이쿠. 내가 해왕이를 까먹었네. 미안해서 어쩌지? 응?”
“컹컹!”
해왕이가 달려들어 도아의 얼굴을 핥았다.
“응, 응, 그래, 그래.”
도아가 웃으며 해왕이를 밀어냈다.
베리는 빨갛게 부어오른 도아의 눈가를 바라보았다.
울고 나오신 게 틀림없었다.
문은 꼭 닫혀 있었지만, 흐느낌이 새어 나오는 소리도 들었다.
“더아 님.”
“응?”
“갠찮으세여?”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도아가 미소 지었다.
“응, 괜찮아. 엄마가 남긴 편지를 보다가 울어버렸어.”
웃으며 솔직하게 말해 주는 도아 님이 어쩐지 약해 보여서, 베리는 마음이 아팠다.
‘빨리빨리 자라서 도아 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
도아가 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같이 산책이라도 갈까? 해왕이랑 베리랑 나랑. 아니, 베리 책 보고 있었어?!”
베리가 앉아 있던 소파 위에 [약초전서]가 펼쳐져 있었다.
베리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우리 베리, 장하네.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알았지?”
“녜!”
베리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산책은 같이 나갈 거지……?”
“그럼여!”
베리가 제 가슴을 툭 쳤다. 도아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방을 나서는데, 에크하르드가 서 있었다.
“헐, 깜짝이야. 왜 들어오지 않고 서 있으세요?”
“아, 아니요……. 그…….”
에크하르드가 말을 잇지 못해서 도아는 갸웃했다가 “아 참.” 하고 헛기침했다. 아까는 저도 모르게 말을 편히 해 버렸다.
“편지 잘 읽었어요. 궁금한 점에 대해서도 쓰여 있었고요. 그리고 으음……. 진짜 공작님이 내 아빠구나, 라고 실감이 났어요.”
에크하르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렇군요. 그럼 도운이라고 불러주세요.”
“응?”
“안 될까요……?”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해 주세요.”
도아는 산책을 다녀와서 일단 나이에 대해 정리를 좀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는 지금 산책 나가려고 하는데, 괜찮은 산책 장소가 있나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에크하르드가 씩씩하게 나섰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도아 일행이 정원으로 나섰다.
엘몬드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들― 설거지 하녀부터 총관까지―은 전부 정원을 기웃거렸다.
“도아 아가씨, 정말로 예쁘시죠? 그 그림이랑 똑 닮았어요!”
“에크하르드 도련님과 함께 걷는데 에크하르드 도련님께서 그렇게 활짝 웃으시는 거 처음 봐요.”
“마님이랑 닮았지요?”
“그 아주르 나자크 정말 예쁘지 않나요?”
“드블랑이 난리 칠 거 생각하면 꼬시네요.”
“이제 공작가에 계속 계시겠죠?”
“그러고 보니 같이 온 다른 일행들 누군지 알아?”
“알지! 알지! 미쳤어, 진짜. 흑룡이랑 황제라니!”
“설마 도아 아가씨 상대가……?”
“꺄악!”
“근데 그 미치광이는…….”
“몰라, 자고 있던 거 같던데? 그나마 다행이지.”
“마법사는 정말 모르겠어. 근데 예쁘기는 예쁘더라.”
“그래?”
“그렇대. 침실로 옮긴 테오가 완전 넋이 나갔던데?”
“뭐야, 뭐야.”
까르륵 웃으며 사용인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눴다.
“S급이면 강하겠지?”
“당연히 강하지. 도시 하나도 전멸시킬 수 있다는데?”
“도아 아가씨는 얼마나 강한 거야? B급이면.”
“B급이시지만, A급 던전 솔로 공략 하셨다고 했잖아. 엄청 강하신 거 아닐까?”
“그럼 대전사로 나가실 가능성도 있나?”
“그러게―”
“가주님이 허락하시겠어?”
“하긴.”
하인들이 수런거리며 지나간 길 위, 발코니에 서 있던 로베른은 커피대에 불을 붙였다.
도아의 커피대가 여전히 그의 손안에 있었다.
❖ ❖ ❖
첫 번째 달 축제.
달의 요정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날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총 7일간 진행되며, 다들 낮에는 꽃의 요정, 밤에는 달의 요정을 가장한 차림을 한다.
가장무도회라는 특성상 온갖 자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프롱드의 사교계는 축제의 열기로 들떠 있었다.
물론 다른 소식 덕분에 흥미진진함이 더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엘몬드 공작가에 잃어버린 딸이 돌아왔다는 말이었다.
남대륙에서 왔다는 아주르 나자크가 전 엘몬드 공작의 딸이라는 말이었다.
드블랑 가문이 분통 터져 한다는 소식도 함께 들려왔다.
“그럼 엘몬드 공작가에 가면 그녀를 볼 수 있는 건가요?”
“하지만 사교계 데뷔도 안 했잖아요? 게다가 모험가라니…….”
“어차피 가장무도회잖아요. 봐도 모를걸요.”
“흥, 모험가랑 우리랑 어떻게 같겠어요?”
모험가에 대한 시선은 천차만별이다.
사냥꾼과 다름없는 천박한 직업이라는 시선부터, 귀족들도 눈을 빛내는 영웅담까지.
다들 소곤거리며 엘몬드 공작가를 바라보는 가운데, 도아는 귀족 아가씨의 삶을 맛보고 있었다.
“아가씨, 좋은 아침입니다.”
시녀들이 줄줄 들어와 커튼을 열며 아침 인사를 했다.
“창문을 열겠습니다.”
알아서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세안수를 준비하고, 보송보송한 수건을 들고 대기.
씻고 옷까지 아가씨답게 갈아입고 나면, 가벼운 조식이 나왔다.
‘남이 해 준 아침.’
바삭바삭 도톰한 토스트에 잼을 바르고 진한 차에 우유를 곁들였다.
식사를 하고서 가져다준 신문을 읽고 나면 아침 단계가 끝났다.
그러고 나면 도아는 정원으로 향했다.
엘몬드 공작가의 정원은 말을 타고 돌아도 두 시간은 걸릴 정도로 넓었는데, 도아는 정원 한켠에 오두막을 열어 두었다.
“안녕, 댄버스 부인. 로라.”
<어서 오세요, 주인님.>
로라가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댄버스 부인은 도아가 옷을 다른 곳에서 맞춘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로라를 통해서 열심히 이야기한 결과, 댄버스 부인은 자신도 최신 유행을 연구할 테니 결과물을 봐 달라고 부탁해왔다.
댄버스 부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은빛 눈을 보면 거절할 수도 없었고, 거절할 필요도 없었다.
도아가 에크하르드에게 부탁해서 요즘 유행하는 패션 잡지를 구해 댄버스 부인에게 건네주었다.
로라가 우와 하고 말했다.
<500년쯤 지나면 확실히 옷차림도 바뀌네요. 어머나, 세상에.>
“500년?”
도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둘을 바라보자 댄버스 부인은 빙그레 웃었고, 로라는 샤르릉 가루를 뿌렸다.
<요정장님께서 열심히 옷을 만들어 보시겠대요! 꼭 주인님 마음에 드는 옷을 만들어 내겠다고 하십니다!>
“응, 난 사실 댄버스 부인이 주는 옷도 좋기는 해.”
그때부터 댄버스 부인은 매일매일 새 옷을 만들었다.
그것도 한두 벌이 아니었다.
물론 사용하는 옷감은 평범한 옷감이고, 도아의 통장은 그 정도로는 요만큼의 타격도 입지 않았다.
‘돈 많아서 다행이지.’
댄버스 부인이 도아에게 이 옷 저 옷 입혀보는 사이 베리는 열심히 높은 식탁에 앉아서 책을 펴고 공부했다.
<주인님, 너무 예뻐요! 천사! 여신! 하늘에서 떨어진 달의 요정!>
로라는 도아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찬사를 던져댔다.
<아니, 아니, 요정조차도 비할 바가 못 되는! 세계수의 총아!>
<주인님의 아름다움에 저는 화살 맞은 것처럼 쓰러져 버려요. 아앗, 로라, 쓰러집니다! 털썩! 한 번만 쓰러져서는 부족해요! 털썩, 털썩, 털썩!>
붕붕 날아다니면서 로라는 주접과 빛가루를 뿌려댔다.
도아가 이리저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다가 말했다.
“다 예쁜 거 같은데? 그런데 단발이라 드레스가 안 어울리나? 머리카락을…….”
도아는 제 단발을 어루만지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는다.
보통 1년이라면 머리카락이 꽤 자라야 하는데, 그녀의 머리카락은 처음 왔을 때 길이 그대로다.
그건 손톱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너는 여기 잠깐 왔을 뿐이며,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야. 라고 말해 주는 것처럼.
‘계속 자라지 않겠지.’
거울 속의 어려 보이는 외모도 더는 나이 들지 않을 터였다.
‘처음에는 동안이라고 좋아했는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가, 도아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그래도 귀엽잖아. 만족했었으니까, 만족하자. 욕심이 많네.’
도아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때 로라가 말했다.
<그럼 머리카락을 길게 할까요?>
“응? 그게 돼?”
<그럼요! 어디 보세요? 짤랑짤랑짤랑.>
도아의 머리 위로 날아온 로라가 열심히 날갯짓을 하며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동그란 금색 몸체에서 우르르 빛 가루가 쏟아졌다.
“우와앗?!”
“더아 님?! 와아앗?!”
머리카락이 갑자기 쑥쑥 자라더니 거의 바르샤만큼이나 자라버렸다.
<앗, 좀 과했나요. 헤헷~>
도아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거의 종아리까지 닿아 있었다.
“세상에.”
그녀는 제 양 뺨을 감쌌다.
“머리카락이 이렇게 긴데도 귀엽네.”
“더아 님! 엄청 예뻐여! 요뎡 같아요!”
베리가 식탁에서 뛰어 내려와서 이리저리 그녀를 둘러보며 와아와아 목소리를 높였다.
툴레가 미모를 보는 조건 중의 하나는 털이다.
털이 얼마나 풍성하고 윤기가 잘잘 흐르는지가 미의 요건 중 하나라서, 베리의 눈에는 머리카락이 길어진 도아가 훨씬 더 예뻐 보였다.
“그래? 예뻐?”
“녜!”
도아가 후후 웃었다.
“확실히 머리모양이 옷에도 영향을 끼치는구나……. 맞아. 예전에 숏컷으로 잘랐을 때 옷 스타일을 바꿨어야 했지.”
도아가 댄버스 부인을 돌아보았다.
“어때요? 머리 긴 거 괜찮아요?”
댄버스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댄버스 부인은 그녀가 민머리를 해도 귀엽다고 해 줄 것 같았다.
똑똑
이제 노크 소리만 들어도 온 사람이 누군지 알 거 같았다.
“들어와.”
도아의 말에 로베른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멈칫했다.
도아가 “엣흠.” 하고는 치맛자락을 잡고 한 바퀴 돌아 보였다.
그가 눈을 찌푸렸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B급은 이제 공녀님이 되고 싶어졌나?”
그는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지만, 도아는 그 안에서 뭔가를 감지했다.
그녀는 고민하는 척하고 말했다.
“아니, 역시 목표는 S급이야.”
“그래?”
그는 도아를 위아래로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예쁘지?”
도아의 말에 로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옷도 예쁘군.”
똑똑
이번에는 정중한 노크 소리.
“문 열려 있어요.”
찰칵 문을 열고 들어온 쿠낙 역시 놀라 멈춰 섰다.
“도아 양? 머리가…….”
“요정 가루를 잘못 뒤집어써서요…….”
어쩐지 머리카락을 길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말하기 부끄러워 도아는 슬쩍 말을 바꿨다.
쿠낙이 빙긋 웃었다.
“긴 머리카락도 잘 어울리십니다.”
“그렇죠?”
헤헤 웃고 도아는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가, 두 사람에게로 돌아섰다.
“그래서 갑자기 둘 다 무슨 일이에요? 이 아침부터 대련을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닐 테고요.”
쿠낙이 로베른을 바라보았다.
“먼저 오셨으니, 먼저 이야기하시죠.”
로베른이 품에서 원통을 꺼내어 도아에게 내밀었다.
“정보 길드에서 연락이 왔더군.”
“저도 모험가 길드에서 온 연락입니다.”
쿠낙은 제법 두툼한 서류 봉투를 도아에게 내주었다.
“양쪽에서 갑자기?”
“정보 길드에 의뢰해 둔 일 없나?”
‘의뢰……? 아!!’
도아는 허둥지둥 테이블로 다가가서 원통을 열어보았다. 안에 둘둘 말린 두루마리를 펴서 읽어본다.
전부 읽은 후에 이번에는 모험가 길드에서 온 서류를 뜯어 보았다.
‘역시…….’
도아가 베리를 바라보았다. 도아의 표정을 보고 베리 역시 굳었다.
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베리야, 데이지의 흔적을 찾아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