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금강산도 식후경
그렇게 계곡에서의 내 정조(강준의 개인적인 생각)의 위험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일단락 후, 다시 향이의 집으로 돌아왔다.
“음....푸..푸핫! 아 엌ㅋㅋㅋㅋㅋ”
“드츠르..즌쯔!...즈그브린드...(닥쳐라...진짜!...죽여버린다...)”
가까스로 참던 웃음을 폭발시키며 미친 듯이 웃는 혁수.
그의 눈 앞에는 강혁이 이미 빨개진대로 빨개진 얼굴을 하며 입술을 꽉 깨문 강준이 있었다.
강준은 원래라면 입지도 않을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한복이 여자의 것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쪽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애 옷을 입느니, 차리리 원래의 옷을 입겠다. 하겠지만, 그런 흉한 모습은 용납 못한다는 향이의 강력한 항의 덕에 결국 이 옷을 입게 되었다.
새빨간 치마에 분홍빛 깃, 새하얀 저고리, 그 옷을 입고 있는 강준은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보기에는 어디 부자 양갓집 규수 같은 모습이었다.
항년 34세 함강준. 그의 사나이 인생은 여기서 끝이 났다.
근데 저새끼 이젠 방바닥을 구르면서 웃네? 시발놈.
“머리카락은 좀 어떠세요?”
“하...후....확실히 안 묶은 것 보단 머리카락이 덜 휘날려서 편하긴 해.”
발바닥에 널부러져 웃고 있는 혁수놈의 대가리를 몇 번 짓밟고 있자 향이가 말을 걸어왔다.
강준의 머리는 향이가 직접 머리를 땋아주고, 빨간색 댕기를 엮어주었다.
바람이 불거나 움직일 때 긴머리카락이 휘날려서 불편하긴 했지.
그래서 그냥 자르려고 했더니, 신체발부수지부모라나 뭐라나.
여기 지구아닌 거 아니었어? 그런 말은 왜 있는거냐.
땋은 머리를 보면 볼수록 내 안의 무언가가죽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릴 적에 입던 옷이 딱 맞아서 다행이네요.”
향이는 정말 기쁜 듯이 손뼉을 치며, 싱긋 웃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큰마음 먹고 사주신 옷. 나이가 들면서 점차 못 입게 되었지만, 강준이 입은 것을 보니 아껴두길 정말 잘한 것 같다.
“그렇긴한데...뭔가 간질간질 하다고 해야 하나,,?”
움직이기엔 편하고 딱 맞아서 좋기는 한데....
치마. 치마라는 것이 너무 적응이 되질 않는다.
속곳이라는 이시대의 속옷을 입기는 했지만....안쪽에 바람이 들어가서 허전하고, 걸핏하면 치마가 날아갈 것 같아서 부끄럽다.
애초에 지금 입은 속옷도 그냥 천을 덧씌우기만 해서 더욱 그렇다.
아닌가? 레이스나 프릴이 달린 현대 여성의속옷을 입었다면 진짜 죽었을 것이다.
“아 근데 오해는 말고 잘 어울리긴 해.”
“닥쳐.”
“힝..”
어느새 머리를 긁적거리며 꼽사리를끼는 혁수를 닥치게 만들었다.
저 녀석도 향이의 아버지가남기신 한복을 입었는데.
근육 때문에 옷이 터질락 말락 하는 꼴을 보니...그래도 역시 남자가 나아.
“아 그나저나 이젠 배고파 죽겠네.”
“야 임마. 넌 눈치 라는게 없냐? 물 맥여주고, 씻는 곳 알려주고,옷까지 줬는데, 이젠 밥 내놓으라고 하게?”
“아니 근데...우리 이틀동안 진짜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애초에 드라이브 끝나고 밥 먹으려고 했고...”
이내 혁수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으며 배고프다며 난리를 부렸다. 저런 진상새끼.
“흠....나도 배가 고프기는 해.”
하지만 나도 몇 시간 전부터 머리가 아주 혼란스러워서 몰랐지, 혁수와 마찬가지로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심지어 성장기의 몸으로 바뀌어서 그런지 배가 무척 고팠다.
“저도 오늘 식사를 하질 못했으니 같이 드시죠. 제가 차려올게요.”
“아니. 나도 염치가 있지 이만큼 받았는데 그 정돈 내가 해야지.”
강준은 자기도 배고프다며 밥을 하러 간다는 향이를 말렸다.
“하지만...손님이신데 그런 걸 시킬 수는...”
“향이야..? 이렇게 불러도 되나? 아무튼 걱정 마.형님의 요리는 아무나 쉽게 먹지 못한다고! 이건 좋은 기회야.”
옆에 있던 혁수도 어색하게 향이의 이름을 부르며, 강준에게 맡기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알았어요. 그래도 돕기는 할게요.”
애초에 키도 조그만한 강준이 밥을 지을 줄은 아는지 싶어, 자신이 나서려고 하던 향이였지만.
자신만만하고 거리낌 없는 강준과 그것을 당연하게 믿고 있는 혁수의 모습에 한번 지켜보고 싶어졌다.
“좋아. 일단 부엌으로 가보자.”
‘이 세계의 식재료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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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짜 아궁이가 있어.”
방을 나서서, 문도 없이 뚫려있는 부엌으로 들어가니, 정말 조선시대 그대로의부엌이었다.
일단 방을 들어서자 그 존재감을 내뿜는 커다란 아궁이와
가마솥 두 개,구석에 매달려있는 메주와, 곳곳에 있는 항아리.
벽에는 나무로 만들어진 선반이, 그 안에는 각종 채소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까전의 신체발모...뭐시기 에서부터 눈치는 챘었지만, 이 세계는 지구의 조선과 비슷한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저건 지구의 채소들 아닌가.
“신선한 채소들이 많이 있네? 밭이라도 있나봐?”
“아뇨, 밭이라고는 간단한 잎 채소들만 있고, 마을에서 일을 끝내고 대금대신 받아오곤 해요.”
“흠, 향신료들은 있어?”
“향신료...라 하면?”
“소금이나 후추 같은 요리의 맛을 일깨워 주는 재료들 말이야.”
“소금이라면 있지만...후추는 상당히 비싸서...양반들 아니면 돈 많은 양인들말고는 막 사용할 수는 없죠...”
“그럼 살 수 있기는 한 거야?”
“네? 네 그렇죠...?사람들이 많이 가는 주막들도 조금이지만 사용한다고 해요.”
‘그렇지!’
강준은 향이의 말을 듣고 쾌재를 부를 수 밖에 없었다.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한때 검은 금 이라고 불렸던 후추를, 양반도 아니고 일반인들도 무리하면 살 수는 있는 향신료라는 것이다.
“그럼 후추를 이 한 이라는 나라에서 재배 하는거야?”
“어엄....그러니까, 제 14왕제이시자 현 왕제이신 상종께서 다른 나라들의 문화교류? 라고 책방 아저씨가 말하시던데....그래서 나랏문을 열고 다른 나라의 상인들을 많이 불러드렸다고 해요. 후추도 그만큼 상인들이 많이 가져온다고 하셨어요.”
“그렇지!”
“까..깜짝이야!”
이 나라의 왕은 쇄국정책이 아닌 문화 교류를 지향하는 왕인 모양이다.
강준은 이렇게 보여도 양식조리 전문 셰프다.
한국에서 태어난 만큼, 한식에 대해서도 대부분 잘 알고 있지만, 외국의 요리들에 더욱 관심을 쏟고, 그만큼 공부와 연구를 착실하게 해왔다.
처음 이 한이라는 나라라는 세상에 떨어지게 된 것을 매우 안타까워 했던 이유 중 하나도, 이 나라가 조선과 비슷한 행보로 나아간다면, 양식 요리의 재료들을 구하기가 매우매우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 책방 아저씨는 누구야?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알고있지?”
“어어..? 크흠..일단 진정하세요, 지금은 식사준비를 위해 부엌에 오신거잖아요?”
“아 맞다...미안 내가 좀 흥분했네.”
강준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금방까지의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아아아~ 진짜 너무 귀엽다...’
그런 강준의 모습은 향이에게는 최고의 선물 이었다.
평소엔 까칠하던 그 언동이 자신에게 흥미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는 그런 모습.
그리고 그런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히는 요망한 볼을 아주그냥...
“흠흠..그래서 식사는 어떤걸로 준비하실 건..”
“아? 아아. 이미 만들 메뉴는 -메뉴요? 그게 뭔지..- 정해졌어. 밥은 아까보니 아궁이에 찬 밥이 남아있었지? 새로 지을 필요는 없고, 일단 당근하고 감자, 그리고 양파 좀 손질해줄래? 막 어떤 형태로 썰라는 건 아니고, 간단하게 껍질만 벗겨줘. 심심하면 혁수 저녀석도 데리고 와. 저녀석도 나 따라다니면서 짬좀 생겼으니깐, 단순한건 알아서 잘 할거야.”
“아 네..네!”
“달걀..아니지 계란은 좀 써도 될까? 꽤나 비싼가?”
“아..아뇨! 저희 집 마당 구석에 암탉이 한 마리 있어서 계란정도는 가끔씩 써도 되요.”
“그럼 시킨 대로 좀 부탁해.”
“ㄴ...네에...”
갑작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명령?과도 비슷한 부탁에 향이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지만, 시킨대로 감자와 당근과 양파, 그리고 작은 과도 하나를 들고 주방을 나섰다.
금방의 강준의 모습에서는 아까처럼의 귀여운 모습대신, 가끔씩 일하러가는 양반의 주방장 아저씨의 모습과 비슷했다.
빠른 말투이지만 체계적이고 간결한 의미를 가진 말투였다.
그런 색다른 모습에 잠깐 멈칫했지만, 강준의 말을 들은 몸은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저기...혁수 도령님? 강준 도령님이 재료좀 같이 다듬으라고 하셔서.”
“오 좋아! 마침 할 것도 없어서 심심하던 찰나였거든, 정 할 것 없었으면 마당에 가서 윗몸일으키기라도 하려고 했지.”
남의 집 안방을 이미 자기네 안방처럼 편하게 누워있던 혁수는 단번에 몸을 일으키며 향이를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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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강준 도령은 그쪽 나라에서 어떤 사람 이였는지요?”
“강준이 형 말이야?”
마루에 앉아, 감자에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 싹을 도려내며 향이가 혁수에게 물었다.
“뭐...요리하는 사람이었지. 그것도 엄청 대단한.”
“얼마나 대단하셨는지요?”
“음....대애충 설명하자면... 우리 세계에서는 정말 전 세계에서 인정 한다! 싶은 레스토랑...아니 주막에다가 별을 달아주거든? ”미슐렝” 이라고 하는 건데.”
“미슈..쇼...라렝? 발음이 조금 힘든 말이네요.”
“아무튼 그런 별은 정말 받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힘들거든. 근데, 형이 일하던 주막은 그런 별이 3개나 있었어.”
“그런 별을....3개씩이나요?”
“그럼~ 우리나라 대통령...아니 이 시대에서 맞추어 말하자면...왕?도 형님의 주막에서 식사를 하신 적이 있지.”
양파가 조금 매웠는지 눈물을 찔끔 내며,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덤덤하게 이야기를 내뱉는 혁수의 모습에 향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오...와...왕제께서요?!”
왕이라니, 한 에서의 왕제는 마치 하늘과도 같은, 우리를 다스리시는 존귀한 분 아닌가.
그런 왕이 강준의 가게에서 식사를 하신다니...
“대단하시네요! 엄청!”
향이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왕은 하늘과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뭐..대단하긴 하지, 돈도 많이 벌고,맨날 해외여행가서 식도락한다고 그 많은 돈 다 쓰기도 하지만, 그러고 보니 곧 다시 나갈 거라고, 적금 깨려고 하던데....안됬네.”
“와....정말 대단하신 도령님이시네요...”
혁수의 말에 향이는 강준을 다시보기 시작했다.
물론 외관은 정말이지 너무 귀엽지만.
한 에서의 대령숙수(待令熟手)*와 비슷한 위치라는 소리 아닌가.
그런 대단한 사람의 요리를 먹을 수 있다니.
향이도 모르게 꿀꺽하고 침이 목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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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숙수(待令熟手):조선시대의 궁중 요리인으로, 궁중의 잔칫날 때 그 성찬을 조리하는 남성 주방장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