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인간의 삼대욕구. 식욕, 수면욕, 그리고....
“이...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뭐...다 방법이 있지.”
향이는 눈이 아주 휘둥그레지며 강준에게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향이의 집에 들이닥친 그들은, 능수능란하게 여러 가지 식재료들을 향이의 집 창고에 차곡차곡 쌓아두기 시작했다.
그 식재료들의 정체는 바로 청라 어르신이 직접 명령하여 옮긴 것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지금 당장은 충분해.’
어젯밤. 강준이 청라와의 거래를 통해 얻게 된 것들 중하나가 바로 이 식재료들.
청라 어르신과 쇼부 좀 쳐서, 안정적인 식재료들을 공급받게 되었다.
뭐, 향이의 집에는 부적을 붙혀서 만든 냉장창고도 없기도 하고, 넓지도 않아서 그리 다양한 종류의 식재료는 가져오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지금 당장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것.
“음. 좋아. 상태는 나쁘지 않군.”
항아리에 가득 담겨온 우유를 바라보며 강준은 중얼거렸다.
이 정도 양이면, 충분히 만들 수 있겠지.
“만들어 볼까? 버터.”
강준은 손을 싹싹 비벼가며, 버터를 만들기 위한 자신만의 마인드맵을 머릿속에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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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우유 속 지방의 응집체인 버터는, 인류가 가축을 키우기시작한 시점에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졌다.
물론 우리 세계의 조선에서도 버터는 존재했었다.
수유(油)라고 불리는 조선 시대의 버터는 아주 귀했으며, 죽이나 차에타 먹었다.
하지만 워낙 기계도 없이 수유를 만드는 것이 중노동이었고, 그로 인해 수유를 만들겠다며 병역의 의무를 회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송아지에게 줄 우유를 인간이 뺏어 먹는 것은 결국 송아지들의 성장을 늦추어 경제적 손해라고 신하들이 상소를 올린 끝에, 세종대왕님께서 수유 생산을 금지 시켰다.
하지만 강준에게는 아주 중요한 식재료이기도 했다.
양식의 기본으로 항상 쓰이는 버터가 없다면, 어찌 서양의 음식들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강준은 어떻게든 버터를 만들어야 했다.
“우와...강준 형...이게 다 뭔일이여?”
어젯밤.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울타리 보수공사 일을 하던 혁수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는 듯해 보였다.
“뭐긴 뭐야 임마! 이 형님의 능.력. 아니겠냐?”
강준은 이젠 입에 물지 않으면 심심한 곰방대를 물고,담배를 피워대며 한껏 거드름도 같이 피워댔다.
“아무튼, 혁수 너. 오늘도 일 나가려고?”
“뭐...나가긴 해야지...돈을 벌어야 하니....아아 진짜 힘드러.....나 오늘은 쉬면 안 돼? 응?”
출근할 것을 생각하니 순식간에 우울해진 혁수는 출근하기 싫다고 구시렁거렸다.
뭐. 회사 가기 싫다고 직장 때려 친 녀석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걱정 마라. 오늘 출근 하지 말고, 집에 있어.”
“진짜? 아싸! 오늘 쉰다!”
그렇게 출근을 회피한 혁수는 기쁨의 쾌재를 불렀다.
“어. 오늘 어디 갈 곳이 있거든.”
출근하기 싫으면, 프리랜서가 돼야지.
강준은 생쇼를 하는 혁수를 보며 히히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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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는 무슨 일인데? 책이라도 사려고?”
“뭐, 지금 내가 하려는 일에 필요한 것 좀 사려고.”
해가 수직으로 뜬 정오.
강준과 향이, 그리고 혁수는 하림마을의 책방으로 발걸음을옮겼다.
책방의 입구에는 온갖 책들이 쌓여있어서, 책 특유의 냄새가 잔잔하게 강준을 감쌌다.
“오! 향이 아니니? 오랜만이로구나.”
“강녕하셨어요? 문호 아저씨.”
그런 삼인방을 반기는 문호 라는 사람은 돋보기만 한 큰 외 안경을 낀, 인자한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그래 나는 잘 지냈단다. 헌데 그 뒤쪽의 두 사람은 누구인게냐?”
“아. 이쪽은 혁수 도령님과 강ㅈ..아니 강하라고 해요. 제집에서 신세를 지내는 분들이시죠.”
“안녕하세요~”
“강녕하십니까.”
“흠. 그렇구나, 헌데 오늘은 어쩐 일로 왔느냐?”
“혹여 여기서 종이와 붓을 구할 수 있습니까?”
“종이와 붓이라면...팔고 있으니, 원하는 만큼 사도록 하려무나.”
갑작스럽게 웬 종이랑 붓이냐고?
뭐, 레시피를 적는다든지, 가계부를 쓴다든지, 이제 곧 종이가 필요해 질 듯해서 충분한 양을 구매하려고 이 책방에 들른 것이다.
그리고 겸사겸사 애슐란의 정보가 있는 책이 있으면 더 좋고.
“그럼 일단....종이는 한 50장 정도 사고....아. 여기는 볼펜이 없지? 그럼 붓 하나와 먹물...그리고 벼루인가? 일단 이 정도면 될 것 같네.”
“오호...상당히 부잣집 아씨 같구나, 이렇게 많이 사주다니. 아주 고맙네.다 합쳐서 3금6은4동이라네.”
“엌...역시 비쌀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이만큼이나 비쌀 줄이야...”
고작 종이 조금하고, 붓 하나, 먹물이랑 벼루 정도 샀다고 우리 돈으로 36만4천 원???
하긴, 이 시대에 종이 하나 만들자고 들어가는 인력과 시간이 얼마나 들어가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지만.....아 그냥 나뭇조각에 글자를 새길까?
“.....에휴...여기요.”
“와 잠만. 형. 뭔데? 내가 5일은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을.....뭔데?? 제엔장! 얼마나 벌어온 거냐구!”
강준이 소매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자, 금으로만 이루어진 숲이 펼쳐졌다.
이것 또한 청라와 나눈 거래 중 하나이긴 하다만, 푸딩의 제조법을 덤으로 알려줬더니, 아주 만족하며 던져준 주머니였다.
한과 같은 달달한 거에 사정을 못한다더니...푸딩을 만들길 정말잘했네.
“임마! 형 클라스가 이제 보이냐? 난 한다면 하는 놈이야!”
“5252! 믿고 있었다구 제엔장!”
“두..두분! 조금만 조용히 하셔요...!”
그렇게 한껏 분위기가 달아오를 때 쯤 향이가 적절하게 막아주었다.
“흠흠....일단 거스름을 줘야 하니,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그렇게 문호가 거스름을 챙겨오기 위해, 작은방으로 들어가자, 우리는책방 구경을 시작했다.
“흠...애슐란에 대한 책은 없나...?”
책들이 다 무슨 마음가짐이니, 성리학이니 철학 위주의 책밖에 없냐.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도, 난 저런 위주의 책들은 영 아닌 것 같다.
책하면 요리책, 요리책 하면 레시피!
강준은 현대에 살았을 때도, 양식 요리에 관한 책 한 권을 낸 경험이 있었다.
뭐...판매량은 굳이 언급은 하지 않겠다.
젊은 열기로 책 작업을 했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결정적으로 그림이 너무 적었다.
‘동기들한테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라고 쓴소리를 들었었지...’
그렇게 책들로 겹겹이 쌓인 산들을 하나씩 찾아보고 있을 무렵.
“형! 형형! 이거 봐! 개 쩌는거 발견함!!”
혁수놈이 무슨 개껌 찾은 강아지마냥, 헐레벌떡 강준에게 달려왔다.
그렇게 어린 향이마저, 구석에 있는 책을 집어 들어, 조용히 감상하고 있는데, 이 녀석은참....
“응? 그게 뭔데 그렇게 난...리......와. 지린다.”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며 다가온 혁수를 바라본 강준은 입을 다물 수 가 없었다.
혁수가 들고온 책의 표지에는 어떤 여성이 실오라기 하나걸치지 않은, 요망한 몸매를 과시하는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춘화(春畵)였다. 쉽게 말하면 이 시대의 X심이다.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성욕은 어느 시대던지, 항상 남자들의 곁을 맴돌고 다녔다.
그것은 이 한 이라는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만큼 훌륭한 신사..아니 선비들이 차고 넘친 것 이었다.
그렇게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춘화는, 이 두사람에게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물 이었다.
“와 씨 지리네. 야! 아직 넘기지 말아봐! 나 아직 다 못 봤어!”
“아니. 다음 장이 더 지리는데?”
“빨랑 넘겨.”
그렇게 두 인간들은 책방 구석에 몰래 박혀, 히히덕거리며 춘화 집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강준이 지금은 여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의 본 모습은 34살 먹은 남정네였다.
사나이가 야한 것을 즐기는 게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이것은 그래. 단순한 생리현상이다. 그럼. 그럼.
“ㅗㅜㅑ.....싼다....”
“눈나...나 주거..!”
“두 분.....거기서 뭘 하시는지요?”
““.......!””
그렇게 하염없이 나체의 여자들을 탐닉하던 두 사람은 뒤에서 느껴지던 기척을 이제야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아...아니 향아. 그게 아니고....”
“이건....그러니까.....”
그렇게 우리의 뒤에 서 있는 향이를 보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중학생이 선생님 앞에 서 있는 듯, 말을 흐리며 제대로 된 말도 나오지 않았다.
“흐음.....그런 파렴치한 책을 보시다니......”
눈이 가늘어지며, 아주 매섭게 우리를 바라보는 향이. 너무 무섭다.
이렇게 된 이상...
“아....혁수! 혁수 이놈이 같이 보자고꼬셨어! 이 녀석이 문제야!”
비기. 죄다 떠넘기기!
이 비기를 획득한 계기는, 온갖 부조리와 짬들이 가득하던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비기.
그 비기는 너무나도 화려하게 혁수의 뒤통수를 내리갈겼다.
“아니 형? 이렇게 배신을 한다고?”
“혁수 도령님. 실망이네요.”
“나..나는 다른 책이나 찾아봐야겠다~”
“혀..혀엉!”
그렇게 강준은 빛을 잃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손을 뻗는 혁수를 깔끔하게 버리곤,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미안하다 동생아.....
하지만 내 34살 먹고, 쪽팔리게 나보다 한참 어린 여자아이에게 저런 눈빛을 받고 싶지는 않구나....
진짜 죽고 싶어질 것만 같아서 말이지.....
“음? 이게 무슨 소란인고?”
“오! 거스름돈을 챙겨오셨나요?”
마침 짤랑거리는 거스름을 들고 돌아온 문호 덕에 더 자연스레 향이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려그려. 자. 여기 거스름이란다. 난 이제 이 책을 읽어봐야 하니, 읽고 싶은 책이 있다면 조용히 읽고 가도록 하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들고 있는 책에 고개를 돌리는문호.
어라? 저 책에 적힌 그 글자는?
“.....당신도 할 수 있다. 멋진 남자가 되는 수염 기르기?”
“무...뭣! 혹시 아가야. 이 책에 적힌 글자를 알아보는 거니?”
당연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책에적힌 글자는. 내가 살던 곳의 언어인,
영어. 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