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계약은 언제나 신중하게!
-크..크흠. 일단 내가 행했던 무례를 용서하게...여 통역사는 처음 봐서 말이지.-
-사과 받아 들이겠습니다.-
하인즈는 헛기침을연발하며, 강준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흠...무슨 말이 와 갔는지 나에게도 말해주게.”
“별것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자신만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한 청라가 강준에게 통역을 부탁하자, 강준은 거짓말을 보태며, 별일 없었다고 치부했다.
굳이 이 일의 전말을 청라에게 알려주어 봤자, 껄끄러워지기만 할 뿐,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터 였다.
강준도 속으로는 은근 분개하기는 했으나, 뭐 여기는 비즈니스이고, 외국에서 일하다 보면 그런 차별 같은 일도 당하곤 하니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그나마 이 앞의 사내는 자신의행동을 사과하기라도 했으니, 그 정도면 양반 이었다.
“나는 청라 라고 한다네,”
-로한 상단의 하인즈 로한. 하인즈 라고부르면 편하겠군.-
그렇게 강준은 그 둘의 말을 서로 알아듣기 쉽게 통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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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우리가 들고 온 물품들의 리스트이네.-
하인즈가 손을 딱 하고 튕기자, 그 뒤에 서 있던 제이든이 서류 뭉치를 들고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흠...역시 뭐라고 적혀있는지 모르겠군, 부탁하지.”
“예 어르신.”
하지만 청라는 역시 리스트에 적힌 것이 무엇인지, 애초에 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었으니, 전적으로 강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보자보자.....와 미친! 오레가노*! 이건 없어서는 안 되는 건데....맙소사! 로즈마리*, 바질*, 딜*, 올리브 오일, 심지어 시나몬*까지?
(오레가노:허브과의 일종, 약간 매콤한 맛이 나고, 신선한 오레가노에선 다소 톡 쏘는 듯한 매콤한 향이 난다.
바질:민트 과에 속하는 향신료. 민트보다는 화~한 맛이 약해, 호불호가 적다, 주로 토마토 요리에 자주 쓰인다.
로즈마리: 향기가 강하고 좋은 향이 나는 향신료, 고기의 비린내를 없애는 데 특화되어있어, 고기 요리에 자주 쓰인다.
딜: 바질과 함께 식용 허브로 쓰이는 향신료, 생선의 비린내와 발효음식 특유의 꿉꿉한 냄새를 잘 잡아준다.
시나몬: 한국의 계피가 있다면, 서양에는 시나몬이 있다. 아시아의 계피보다는 약간 더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난다.)[이상 TMI끝]
이렇게 다양한 향신료를 들고 있다니...
우리 시대의 대향해시대를 연 향신료는, 그만큼 매우 중요했다.
오죽하면 후추와 같은 무게의 금 중 후추가 더 비쌀 정도였으니.
이 시대는 그만큼이나 비싸지는 않았지만, 역시 거대한 배를 모는 상단은 클라스가 달랐다.
강준은 입을 쩌억 벌리며 리스트를 보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종이와 펜을 빌려, 리스트를 청라가 알아볼 수 있게 번역했다.
‘...어? 이상한데?’
그렇게 바삐 손을 놀리던 강준은 리스트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내가 예상한 대로라면...설마?’
-저...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음? 무엇이지? 리스트에 문제라도 있는가?-
“응? 무슨 일 인게냐?”
한창이나 바삐 리스트의 번역본을 작성하던 강준은 고개를 들어, 하인즈에게 궁금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적힌, ‘이 것‘....혹시 빨갛고 신맛이 나는 채소 아닙니까?-
강준이 의문점을 가지며 리스트에 적힌 물품을 가리켰다.
-그걸 어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
-그렇다면 이 ‘토마토’는 왜 이리 값이 싼 것이지요?-
그 채소의 정체는 바로 토마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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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이 식품에 대해 한 줄 평가를 하자면 이렇다.
토마토가 빨갛게 익어갈수록, 의사들의 얼굴을 파랗게 질려간다.
그만큼 토마토는 매우 건강식이며, 많이 먹으면 굳이 의사를 찾을 필요도 없을 만큼 훌륭한 음식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맛 또한 훌륭해서, 서양 요리에서의 토마토의 입지는 가히 버터와 쌍두마차를 달리는 수준이었다.
스프, 파스타, 스튜,찜 등등
토마토를 활용하는 요리는 무궁무진하고, 그만큼 서양인들에게는 친숙한 음식이었다.
그런데 왜? 이 리스트에서 토마토의 가격은 형편없이 낮았는가?
-뭐...악마의 열매를 굳이 자기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없지....-
그렇다.
토마토는 겉의 빨간색과 덜 익었을때 먹으면 독소가 있어 구토 및 설사를 유발한다.
그렇기에 우리 세계의 과거에서도, 미국 같은 경우는 19세기까지 토마토를 악마, 마녀의 열매라는 도시 전설이 정설처럼 퍼져, 많은 사람들이 먹지를 않았다.
독일에서도 조지 워싱턴을 암살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나이프에 토마토를 발랐다거나 하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만큼 토마토를 먹으면 죽는다는 속설이 아주 널리 퍼져있었고, 그렇기에 판매량이 급감하는 시대도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다들 토마토를 좋아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지금이 딱 그런 타이밍인 것 같았다.
그런 하인즈도, 처음에는 이 토마토를 수입해 왔을 때 만해도 잘 먹힐 것이라 판단했지만, 애슐란의 사람들은 달랐다.
그렇게 팔리지도 않고, 심지어 토마토 모종까지 잔뜩 사 놓았기에, 처리하기도 곤란한 계륵 같은 채소였다.
그러니 오늘 이 자리에서도 토마토는 거의 헐값에 그냥 팔아버리려고 했었던 것 이었다.
-결국 사람들이 먹지를 않으니, 팔리지가 않게 되는 것이군요...-
-그렇지, 맛 자체는 딱히 큰 문제는 없는데, 토마토를 먹으면 죽는다는 괴소문이 워낙 퍼져서 말이야....-
하인즈는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이걸로 대답은 됐나?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
-그렇다면, 토마토를 먹게 하면 되지않겠습니까?-
-.....그게 말처럼 쉬우면 참 좋겠군....
다음으로 들어온 강준의 질문에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말처럼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사람들이 안 먹는 것, 과 별개로, 토마토와 어울리는 조리법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리법이란, 저마다의 사람들이 구상하고, 짜임새를 만들며, 입에서 입으로, 사람에서사람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그러나 이 토마토는 먹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어딘가 특출난 조리법 하나 없었다.
-네. 쉽습니다.-
-자네...내가 처음에는 실례를 범했지만....참...말하는 것이 좀 그렇군. 입으로만 나온다고 그것이 다 말이 되는 것이 아니라네.-
하인즈는 점점 속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소녀가 애슐란 어를 한다는 것에 놀라기는 했지만, 결국 거기까지.
그런데도 저 밑도 끝도 없는 태도로 말하는 것이 아니꼬웠다.
-입으로만 말한다라....그것 참 웃기네요.-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한나절.-
-..음? 금방 뭐라고 했지?-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의 태도에 거칠게 지적하려던 찰나, 그녀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왔다.
-한나절*만 주십시오. 제가 토마토의 가능성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한나절*: 낮 시간의 반인 여섯 시간을 뜻한다. 반나절은 세 시간)
-한나절...하! 기가 차는군, 내가 왜 너의 말을 들어줘야 하지?-
하인즈는 헛웃음을 지으며 강준에게 말했다.
-간단합니다. 이건 돈이 될 것이니까요.-
-상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돈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거든요.-
그러자 강준은 생글거리지만, 속이 시커먼 미소를 면전에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한나절의 시간을 준다고 치자고. 만약 내 성에 차지 않는다면...어쩔테지?-
-흠...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강준은 청라의 귓속에 무어라 속삭였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안 된다!’
‘어르신, 저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끄응.....’
‘이번 기회만 잘 잡으면, 더 큰 물에서 노실 수 있으실 겁니다.’
‘........좋아! 허락하지.’
강준이 무어라 말하자, 청라는 인상을 팍 구기더니,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 상인과 무슨 대화를...-
-만약, 성에 안 차신다면, 앞으로 한에서 물건을 수출하실 때 나오는 관세를 저희가 내겠습니다.-
-......? 방금 뭐라고?-
하인즈는 방금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귀를 의심했다.
관세.
수출과 수입품에 매기는 세금으로써, 나라와 나라 간의 거래에 아주 중요한 세금이다.
하지만 나라 따라, 지역 따라 나뉘는 관세의 시세는 요동치기 마련.
그래서 부담이 될 수 도있는 관세를, 저쪽에서 대신 내어준다고?
-예. 관세를 저희가 부담하지요.-
-그 대신, 만약 성에 차신다면, 저희를 로한 상단이 한에서의 전담 수입처로 임명해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뜻은,앞으로 로한 상단은 한에 물건을 수출을 하려면, 항상 청라를 거쳐 수출을 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수입도 마찬가지.
로한 상단이라는 거대한 상단을 혼자서 독차지 할 수 있는, 그야말로 비트코인 부럽지 않은 돈복사가 가능할 정도의 큰 이득을 낼 수 있는 것 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보지. 그 잘난 입이 언제까지 열리는지 궁금해졌어.-
-....! 하인즈 님! 그게 무슨....-
-이왕 시간을 주시는 김에 주방도 빌려주시죠.-
-잘난 것만이 아니라 뻔뻔하기까지 하군. 좋다. 다 빌려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명심해라. 상인과의 약속은 그저 흐지부지하게 끝낼 수 없다는 것을....제이든! 펜과 종이를 부탁하지.-
-.....예.-
그렇게 펜과 종이를 든 하인즈는 즉석에서 순식간에 계약서를만들어 내었다.
-만약 이 계약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뭐 추천하지는 않겠네.
우리 상인이라는 족속은 계약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지. 계약은 사나운 늑대거든, 네가 아무리 도망쳐도끝까지 따라붙어 너의 목을 물어뜯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죠. 그깟 늑대 길들이지 못하면 어디 이런 배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강준은 그런 하인즈의 말을 가볍게 흘리며 계약서에 펜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