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청란-2
[뭐냐, 네놈은.]
흑룡은 그런 소년에게 약간의 위압감을 뿜어냈다.
인간에게 본 모습을 들켜봤자, 늘 좋은 일은 없었고, 그렇다고 죽여버리자니 그것 또한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대충 겁을 먹게 하여 쫓아낸 후, 다른 곳으로 은거할 생각이었다.
그래. 분명 이렇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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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있지? 오늘 엄마가 말이야....”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흑룡에게는 별 시답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자꾸만 떠벌렸다.
그 소년은 위압감에 겁을 먹기는커녕, 그런 흑룡의 모습에 감탄하며, 도통 도망갈 기세가 보이지를 않았다.
그런 소년에게 흑룡은 약간의 호기심이었을까? 그 소년과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소년은 역시나 소년.
한때 인간세계의 대마법사 소리를 들으며 여러 법칙을 증명해 낼 만큼 머리가 총명한 흑룡과의 대화 주제로 딱히 걸맞다고 할 수는 없는 이야기만을 주저리주저리 할 뿐이었다.
하지만 무엇일까?
이상하게도 지루하거나,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년이 항상 흑룡을보며 미소를 짓고 말하는, 그런 태도에 마음이 들어서일까?
그렇게 영원토록 하늘 위에서 머물 것만 같던 태양이 어느새 산의 끄트머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이제 나는 가봐야 할 것 같아.”
[가는 것이냐?]
“응...늦으면 엄마한테 엄청 혼나.”
흑룡은 드디어 이 경험이 끝나는 것에 무언가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혼자서 편히 쉴 수 있을 터인데, 무엇일까? 이 몸의 작은 한 구석에서 이상한느낌이 들었다.
“그럼! 내일 또 올게!”
[내일?]
“응! 용 님은 싫어?”
[....마음대로 하도록 해라.]
“아싸! 그럼 내일 봐!”
그렇게말한 소년은 힘껏 웃으며, 천천히 흑룡의 시아밖으로 사라져 갔다.
내일, 내일이라.
이상하게도 그 소년이 내일 만나자고 했을 때, 흑룡의 마음속에 있던 찜찜함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신비한 일이구나..]
그런 흑룡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그 소년과 더욱 대화를 해봐야 할 터.
흑룡은기다렸다.
몇백 년을 살아온 흑룡에게는 하룻밤 따위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늘 밤은 도통 지나가질 않았다.
어서 이 밤이 지나야 그 소년과 대화할 수 있을 텐데.
흑룡은 밤하늘에 둥글게 떠 있는 달을 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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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그 뒤로도 매일같이 흑룡을 찾아 산으로 달려왔다.
소년의 이름은 청란 이었다.
푸른 머리칼을 가진 아이의 이름에 걸맞은 이름이라고 흑룡은 생각했다.
그들의 일상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매일 청란이 산에 온다.
그리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해가 지면 청란은 집으로 돌아간다.
이런 단순하고, 새로운 것 없는 일.
그리고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청란이 자신의 일이나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일을 일방적으로 떠드는 것뿐이라.
흑룡은 아랫마을 오른쪽 세 번째 초가집의여편네가 실수로 밥을 태워 먹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밤에 아랫마을에서 축제를 벌인대! 맛있는 것도 많이 있겠지?”
청란이 발을 방방 뛰며 흑룡에게 신나게말했다.
[축제라...]
분명 축제라는 것은, 인간들이 모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누며 신나게 즐기는 것 일 테지.
백룡과 같이 인간세계를 다닐 때, 한번 참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새 구이가 정말 맛있었는데.
[그래. 그렇담, 오늘은 일찍 가봐야겠구나.]
흑룡은 왠지도 모르게 아쉬움을 느끼며 말했다.
청란도 자신과 있는 것보단, 축제에 가고 싶을 테니.
“너도 나처럼 생겼다면 같이 갈 수 있을 텐데.”
[변할 수 있다만?]
“뭐? 하지만 난 한 번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생각해보니 흑룡이 청란을 볼 때는 늘 용의 모습만 취했지, 인간의 모습을 취했던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흠. 그렇군, 그럼.]
흑룡이 안개에 뒤덮이며 항상 인간세계에 있을 때의 몸으로 변했다.
“와....”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말거라.”
그런 모습을 눈이 빠져라 보는 청란 덕분에, 흑룡은 묘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인간 모습일 때, 이랬던 적은 한 번도없었는데.
“진짜 이쁘다! 선녀님 같아!”
“...농이 지나치구나.”
“아닌데? 진짜 엄청나게 이쁜데?”
“.....”
그런 청란의 말에, 흑룡은 뒤로 돌아, 돌 위에 걸터 앉았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이 달아오르자, 그 모습을 청란에게 보여주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그러면 너도 같이 오늘 축제에 가지 않을래?”
그런 청란은 오늘 저녁에 있을 인간들의 축제에 흑룡을 초대했다.
“흠, 축제라....좋다.”
오랜만에 인간세계 구경도 할 겸, 맛있는 음식도 먹을 겸, 흑룡은 청란의 말에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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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의 세계도 참 많이 변했구나.”
인간들의 세계로 구경을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일 테지만, 인간들의 생활양식은 늘 달랐다.
이곳의 인간들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치마와 저고리, 비녀 등을 하는 모양이었다.
“와! 저기 봐! 쥐불놀이한다!”
청란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인간들이 불을 피운 통에 줄을 연결해서,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었다.
딱 봐도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이상하게 아름다운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흐음...이런 느낌인가?”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흑룡은 살짝 힘을 주어, 번쩍거리는 구체를 만들어내서,주위를 빠르게 빙빙 돌게 만들었다.
그러자 마치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몽환적인 불빛들이 춤을 추었다.
“와! 저걸 봐!”
“근처에 도사가 있나?”
“엄청 예쁘다....”
그런 흑룡의 모습을 보던 주변 사람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와! 진짜 멋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
“단순한기의 조작이다. 기의 흐름을 손으로 조절하여 위력을 낮추고, 이렇게.....”
그런 광경을 옆에서 지켜본청란이 신이 나서 방방 뛰며, 어떻게 하는지 방법을 물어보자,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을 해준 흑룡이지만, 복잡한 기의 흐름따위 알 이유가 없었던 청란은 금새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음....모르겠어.....아 맞다! 저쪽에 꼬치구이 팔던 데, 가자!”
“어..어어..! 잠...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런 청란은 어느새 흑룡의 손을 잡은 체, 그녀를 이끌기 시작했다.
왤까? 그저 단순히 손을 잡고 달리는 것일 뿐.
정말 단순하고, 간단한 행위일 뿐인데.
‘가슴이 터질 것 같구나, 이렇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경우는 처음이야.’
오랜만의 인간세계에서 구경을 하던 탓일까?
많이 흥분을 해서 그런 것 같다.
그래.
이 미칠 듯이 뛰는 심장도.
새빨개져서 더워지는 얼굴도.
너의 얼굴을 보기 부끄러운 것도.
그저. 흥분해서 그런 것이라고 흑룡은 마음속으로 되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