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청란-4
하늘에서는 우레와 같은 천둥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는 온통 피범벅이요, 그 무엇 하나 멀쩡한 시신이 없었다.
그 잘난 얼굴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던 인간들이 어느새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찾아 울부짖으며, 하나 둘 씩 죽어갔다.
오직.
그 대지에서 두 발을 디딜수 있는 것은.
위대한 흑룡.
류월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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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땅한 비석 하나 없이 그저 흙으로만 덮힌 무덤 앞에서, 청란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곳은 청란과 류월의 추억이 쌓인 그 산속.
자신이 행복했던 시절을, 어머니와 동생들도 보았으면 했을 바람이었다.
“......류월.”
“그래.”
어느새 청란의 뒤에 소리 없이 나타난 류월을 청란은 불렀다.
“네가 보기엔 어때? 인간들 말이야.”
“.......”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추악해. 자신들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추잡한 짓이라도 감행하지.
그런 자들 덕분에 우리만 상처를 받을 뿐이야.“
“청란...”
“난 말이야....아직까지도 내 마음의 불꽃이 꺼지질 않아. 매 한순간 한순간 이 불꽃이 나를 좀먹어가며 나를 태워내고 있어.”
“어째서 우리 어머니가, 동생이, 마을 사람들이 이런 꼴을 당해야 했던걸까?”
“나라 간의 전쟁? 저들의 추악한 땅따먹기? 우스워서 말이 나오질 않아.”
“내 마음의 증오, 분노, 그리고 슬픔은도대체 누가 감당해주는 거지?”
류월을 말하고 싶었다.
내가.
내가 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싶다고.
모든 것을 잊고, 이 나와 평생을 함께 살아가자고.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알 수 있었다.
만약, 청란에게 자신과 함께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면, 청란은 기꺼이 따라와 줄 테지.
하지만, 그것은 청란을 병들게 할 것이었다.
“류월. 나를 도와줘.”
청란은 무덤 앞에서 일어나, 류월에게 손을내밀었다.
그런 청란을, 말렸어야 했을까?
울고불고 매달려서라도, 그만둬달라고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류월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알았네..”
류월은 그런 청란의 손을 맞잡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미 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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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청란과 류월은 정처 없이 3국을 돌아다녔다.
청란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지식을 쌓아갔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자, 소중한 것을 잃은 자, 복수심에 타오르는 자 등.
그런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청란은 그런 사람들의 앞에 서서,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으로 태운 자들은 누구인가.
이 나라는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
민심은 바닥나기 시작하고, 백성들은 가족, 연인 사랑하는 자들을 잃고, 하루하루를 허기진 배를 음식이 아닌 공허한 눈물로 채우지 않는가.
들어라, 검을, 창을, 낫을, 호미를.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 나라를 위해.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죽어다오.
마지막으로 목숨을 담보로 태워올린 불꽃을, 번지게 하라.
자. 전쟁을 시작하자.
그렇게 해방군, 한이 탄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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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군 자체의 무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농사나 짓던 사람들에게 칼을쥐여준다고 한들, 그 성능을전부 발휘하기에는 힘들 것이다.
적 3국에 비하면, 병력의 수준은 매우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존재가.
흑룡이 전장에 나서면, 아무리 위태롭던 전선도 순식간에 역전이 되었다.
청란은 그런 류월에게 최대한, 아주 강력하고 자비 없이 전장을 휩쓸라고 전해 주었다.
그렇게 한번 흑룡이 전장에 나타나면, 그 전장의 부상자는 없었다.
그리고 생존자도 없었다.
각 3국의수대부들은 그런 흑룡의 대비를 매일 밤 신하들과 머리를 싸매며, 대비책을 마련해 보려고 했지만.
미천한 인간은 절 때 자연재해를 거스를 수 없는 법.
그들에게 흑룡이란 자연재해와 마찬가지였다.
그런 흑룡의 덕에, 적군들은 사기가 꺾여 나가고, 흑룡이 전장에 출몰하면, 들고 있던 창마저 집어던지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렇게 한은 3국을 조금씩 잡아먹으며 점차 성장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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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란.“
“응? 왜 그래? 류월”
어두운 밤.
매일과 같이전국에서 올라오는 문서들을 점검하는청란의 방에, 류월이 찾아왔다.
그런 청란은 예전에 짓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찾아온 류월을 맞이했다.
청란은 그때 막 가족을 잃었을 때와 비교하면, 미소를 짓는 일이 많아졌다.
하지만 류월은 알 수 있었다.
그 웃음은 전부 청란이 만들어 낸 탈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 일 이후로 청란은 자신에게 언제나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짓는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청란은 자신의 얼굴에 마음 가는 탈을 마음대로 씌우는 재주를 배웠다.
“너는 정말 각오가 되어 있는가?”
수천 만명이 죽었다.
류월에 의한 적군들이, 그리고 자신이 등 떠민 한의 병사들이.
청란은 아직 단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피를 묻힌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말 몇 마디로 수백만 명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뭐..뭐야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다니, 평소 같으면 그냥 [다 죽여 버려라. 손끝 하나 남기지 마라.] 이렇게 말하던데....너 류월 아니지?”
능글맞은 가면을 쓴 청란이 실없는 소리를 하며 류월에게 말했다.
“시답잖은 농담은 치우고, 대답해라. 넌 각오가 되어 있는가?“
사람들을 기만하며 속이고,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 3년간 청란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채, 그저 전쟁을 가속화 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그 결과.
이제 한은 3국이 함께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힘이 생겨났고, 그 와중에서도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글세. 각오라...”
그런 류월의 물음에 청란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힘들지. 나도 사람이고, 정 많은...사람이거든.
가끔 잠을 자다 보면, 내가 너를 통해 사람들을 휩쓸던 장면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떠올라.“
그리고 자신이 씌웠던 가면을 벗고, 그저 담담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랬다. 류월의 친우인 청란은, 자신과 같은 생명을 초월한 용이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 그 자체였다.
사람들을 죽이고, 사람들의 위에 서며, 그런 비난과 자신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청란은 피범벅이 된 이 길을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청란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류월은, 그런 청란이 안쓰럽고, 너무나 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너는 왜 이러는 건가? 네가 해야 할 일이 그만큼 중요한 건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
“나보다도 말인가?”
류월은 언제나 마음속에서만 맴돌던 말을 내뱉었다.
나는 언제나 너의 곁에 있는데.
이런 전쟁보다, 나를 바라주길 원하는데.
“.........“
“청란. 너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는 건가.”
결국, 류월은 이왕 입 밖에 꺼내게 됐으니, 청란의 생각을 알고 싶었기에, 그의 생각을 물었다
“너야.“
“무..뭣이?”
하지만 그런 청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류월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슬프게 떠나보낸 가족을 위해서, 상처받은 백성들을 위해서, 아님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같은 이유 따위가 아니였다.
“소중하고, 하나뿐인 내 친구. 류월. 너를 위해서야.”
그 말을 한 청란은, 그때그 일 이후로, 처음으로 가면 없이 진심으로 류월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때의 청란의 말을, 류월은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나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라는 말이 류월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노...농이 지나치구나!! 그런 속없는 말을 하여, 내 속을 뒤흔들다니....”
“이렇게 된 거,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모르겠다.”
그렇게 청란의 말을 들어 새빨개진 얼굴을 애써 감추려던 류월에게 자리에서 일어난 청란이 가까이 다가와 무언가를 건넸다.
그것은 몸체가 칠흑같이 어두운검은 색에 보랏빛이 약간 물든, 파란 꽃이 장식된 비녀였다.
“이게...무엇이냐?”
“선물. 너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야.”
“아..그...나에게....비녀?”
“예전에 비녀 집 누나가 비녀를 하나 공짜로 준 적이 있었는데, 동생들이 엄청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너에게도 주고 싶었어....음! 됐다.”
몹시 당황하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던 류월의 머리에 청란 자신이 직접, 비녀를 꽂아 주었다.
“....그래서. 잘 어울리느냐? 이 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냐?”
그렇게 비녀를 꽃은 채, 말이 없던 류월이 겨우 한 마디를 말할 수 있었다.
“괜찮아. 아주 이뻐.”
청란은 그런 류월을 보며 방긋 웃어 보였다.
“...고맙구나...그럼 이 몸은 돌아가지.”
그렇게 말한 류월은 순식간에 청란의 방에서 도망치듯이 나왔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청란이 알아차려 버릴 것만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