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청란-6
“닥쳐라. 네놈들이 이제 와서 이 몸을 부르는 이유가 무엇이냐! 또 다시 나의 힘을 빌려놓고, 다시금 나를 버릴 생각이겠지. 안 그러느냐?”
류월은 온몸에서 검은 번개를 내뿜으며, 저 위에 고고하게 앉아있는 향종을 보며 말했다.
그때, 자신을 깨운 존재인 강준과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그 일들을 잊을 수 있는 일들.
강준의 음식은 맛있었고, 향이라는 아이는 착했으며, 강준은 어느새 자신과 비슷한 용족이 되었다.
그런데.
왜 또다시 나를 불러내어, 그 추악한 얼굴을 들이 내미는 것 인가.
나를 두려워하고, 나를 배신한 놈들의 얼굴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청란의 기억이 나는 것이 무서웠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흑룡이어.”
“그렇다면 뭐지? 어째서 나를 불러내었는가?”
그러자 그 높은 자리에서 앉아있던 향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며 류월에게 다가왔다.
“와...왕제저하! 저 자는 위험합니다! 함부로 다가가시면 큰일이 일어날 것 입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본 신하들과 병사들을 향종을 뜯어말렸으나.
“가만히 있거라. 이것은 이 한의 왕조와, 흑룡간의 일이거늘.”
향종은 아랑곳 하지 않고, 묵묵히 류월에게 다가갔다.
“무...무슨 짓이더냐?”
그런 향종의 행동에 살짝 당황한 류월이 물었다.
“저희 한의 1왕제, 충하 선왕께서, 류월님께 남긴 편지가 있사옵니다.”
“...뭣?”
그렇게 말한 향종은 자신의 품에서 조심스래 꺼낸 한 상자를 꺼내었다.
그 상자는 꽤나 오래되어 보인 듯 했지만, 매우 깔끔해 보이는 것이, 그동안 관리를 철저히 한 것이 보였다.
그 상자에 향종이 꺼낸 열쇠를 열쇠구멍에 밀어 넣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문이 열렸다.
그러자 상자의 내용물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
그리고 그 안에는.
소중하게 접힌 종이 하나와, 비녀가 있었다.
검은몸체에 푸른빛이 맴도는 꽃이 장식된.
청란이 자신에게 선물한 그 비녀가.
아주 고급진 천에감싸, 상자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것이 충하 선왕께서, 류월 님께 남긴 것입니다.”
“저는 그저, 이것을 류월 님에게 돌려주기 위해 부른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없사옵니다.”
“.........”
“편지를 읽어 보시겠습니까?”
편지.
청란이 자신에게 남긴 편지.
그토록 미워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던 사내가, 자신에게 남긴 편지.
류월은 어느새 상자에서 편지를 꺼내어, 접혀있던 종이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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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그 존재를 보았을 때.
나는 마치 꿈을 꾸는 듯 했다.
자신보다 수십 배는 큰 크기, 날카로운 손톱, 먹물같은 아름다운 비늘, 그리고 머리에 자신의 존재가 무엇임을 널리 알리는 듯 한, 높게 뻗어난 뿔.
바로 용이라는 존재를 마주쳤기 때문이다.
[뭐냐, 네놈은.]
그렇게 중얼거리던 용은, 나에게 물었다.
“나..? 나는...란...청란!”
이것이 꿈이라면, 조금 더 꿈을 꾸고 싶을 만큼, 나는 그런 용에게 한순간에 반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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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아랫마을의 위에 있는 산, 분명 오늘은 산에서 도토리를 주을 예정이었다.
“그래서 있지? 오늘엄마가 말이야...”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자신을 흑룡이라 밝힌 용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눈다기보단, 그저 내가 있었던 일들을 줄줄히 늘어놓고 있었지만, 괜찮았다.
처음에는 별 반응 없던 흑룡도, 어느새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고 있었다.
흑룡은 겉모습만 보기에는 정말이지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저, 흑룡의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으나, 어느새 내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고 있는 흑룡을 보자니, 그만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마을에서는 밥을 짓는 연기가 솔솔올라오는 저녁시간이 되었다.
“어...이제 나는 가봐야 할 것 같아”
[가는 것이냐?]
“응...늦으면 엄마한테 엄청 혼나.”
이번에도 저번처럼 늦었다가 저녁밥을 굶고 싶지 않았던 나는, 어떻게든 움직이지 않던 발을 떼고,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그러자 흑룡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너무 쓸쓸하게 보였다.
나는 아직 흑룡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아. 잠시만! 이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내일 또 올게!”
나는 다시금 몸을 돌려, 흑룡에게 말했다.
[내일?]
“응! 용 님은 싫어?”
[.....마음대로 하도록 해라.]
“아싸! 그럼 내일 봐!”
내일.
내일 다시 흑룡을 만난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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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나는 매일같이 뒷산으로 달려가 흑룡을 만났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별거 없었다.
어제 우리 옆집에 사는 남자애가 실수로 달걀을 전부 깨버려서, 엄청나게 혼이 났다던지, 뒷집 아저씨가 결혼을 했다던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흑룡을 잘 들어주었고, 나도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밤에 아랫마을에서 축제를 벌인대! 맛있는 것도 많겠지?”
풍작을 기원하며 1년에 4번씩 열리는 축제가 바로 오늘밤이었다.
저번에 먹었던 꼬치구이가 정말 맛있었는데. 오늘 밤에 또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축제라...]
[그렇담 오늘은 일찍 가봐야 겠구나.]
그렇게 말하던 흑룡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쓸쓸해보였다.
“너도 나처럼 생겼다면 같이 갈 수 있을텐데.”
그런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변할 수 있다만?]
“뭐? 하지만 난 한 번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흠. 그렇군, 그럼]
그러자 흑룡의 모습이 안개에 휩싸이더니, 형체가 점차 줄어들었다.
“와...”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 살짝 빨간 동공, 그 모습은 마치 어릴 적 엄마가 자기전에 해주던 선녀이야기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 말거라.”
그런모습이 부끄러웠는지 흑룡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볍게 가리며 말했다.
“진짜 이쁘다! 선녀님 같아!”
“...농이 지나치구나.”
“아닌데? 진짜 엄청나게 이쁜데?”
“......”
그런 흑룡은 자신이 항상 걸터앉아있던 바위에 뒤돌아 앉았다.
“있잖아, 그러면 너도같이 축제에 가지 않을래?”
“흠, 축제라....좋다.”
그렇게 나는 흑룡과 같이 축제를 즐기게 되었다.
흑룡과 같이 내가 맛있게 먹었던 꼬치구이도 먹고, 여러 가지 신기한 구경도 잔뜩했다.
그러다가 쥐불놀이를 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흑룡은 잠시 그것을 지켜보다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보랏빛 구체를 만들어서 밤의 도화지에 마음껏 그림을 그렸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렇구나.
나는 흑룡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