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그 아름다운 꽃은, 간을 좋아해.
늦은 밤. 어느새 집 곳곳의 불들이 하나 둘 씩, 꺼져가고.
힘차게 나무를 베던 나무꾼은 내일은 더 많이 나무를 벨 것을 다짐하며 잠이 들고.
오늘 던져놓았던 통발에 물고기가 가득할까 싶어 설래발을 치며, 잠들지 못하는 낚시꾼이 억지로 몸을 뉠 시간.
그러나 이곳은 아직까지도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가득한데.
그곳은 바로 화의정, 이라 불리는 기생들이 있는 곳이었다.
꽃들을 기억하라는 이름이어서, 이곳의 기생들은하나같이 꽃의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서라벌에서 으뜸인 기생집이 어디인가? 하고 묻는다면.
남자, 여자,어린아이 가릴 것 없이 화의정을 가리킬 것이다.
그만큼 화의정의 인기는 끝이 없었으며, 매일 밤, 남자들이 하룻밤의 달콤한 꿈을 꾸기 위해 한 송이의 꽃을 보러 오는 곳이었다.
그런 화의정에서도 으뜸 중의 으뜸인 기생이 있었으니.
“매화님,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종인 여자아이가 고개를 푸욱 숙이며 말했다.
“그래, 너도 고생이 많았다. 어서 들어가 보거라.”
간드러지는 목소리,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흑발과 요염한 눈빛.
그녀가 바로 화의정의 으뜸기생, 매화였다.
그녀가 한번 눈을 감았다 떠주면, 남자들은 자신이 들고있는 돈들을 모조리 꺼내었고.
그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름을 한번 부른다면, 아예 집문서마저 들고나올 판이었다.
그런 매화였기에, 화의정도 그런 매화를 아주 극진히 다루었다.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매화를 부르려면,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인 매화의 가치는, 화의정을 위치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 편히 쉬시기를.”
인사를 마친 시종이 매화의 방문을 닫고 돌아갔다.
“.......어우 뻐근해...”
매화는 그런 시종이 방을 나서자마자, 인자하던 미소를 풀고는, 힘없이 어깨를 돌렸다.
그런 그녀는 금방까지만 해도 양반집 남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거문고를 뚱땅거리며 왔기 때문에 손가락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귀찮다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던 매화가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밤하늘 같던 흑발은 새하얀 백발로 변하고, 진주 같던 동공이 빨간 적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바로, 그녀의 엉덩이에서 돋아난 아홉 개의 여우 꼬리와 머리에 돋아난 여우 귀였다.
매화, 그녀의 정체는 바로 구미호였다.
“인간이 사는 곳으로 섞여 들어가니 편하기는 한데...”
인간들의 정기를 흡수해, 힘을 키우는 구미호는 인간들을 습격하거나, 홀려서 그런 힘을 쌓아가는 요물이었다.
그러나 매화는 생각을 달리했다.
어짜피 인간들을 상대해야 한다면, 인간으로 변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그녀의 생각은 적중했다.
허나 기생이 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았는데.
글 읽기는 기본이오, 학문과 악기를 다루며, 명석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은 기생들은 말 그대로 아무렇게나 남자들에게 몸을 대주는 매춘부였다.
구미호인 매화는 그런 매춘부도 나쁘지 않았으나, 이왕 인간들이 사는 곳으로 내려온 겸, 한번 남자들을 애태우며, 인정받는 위치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인간들의글을 배우고, 거문고를 뚱땅 거린지어언 3년.
3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에 매화는 화의정의 최고급 기녀가 되었다.
그러나.
“하....그나저나 남자의 정기를 먹어본 적도 꽤나 오래 됐구나...”
너무나 비싸져 버린 그녀의 몸값은 아무나 쉽게 낼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기에, 그녀와의 하룻밤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으나, 정작 매화는 그들에게는 하늘의 별 취급이었다.
이러려고 기생했나....점차 회의감이 드는 매화였다.
“......이런 날에는 역시 그곳만 한 곳이 없지...!”
꿀꿀한 기분이 들 때는 기분전환이 답이었다.
매화는 자신이 보관하던 꾸러미를 꺼내, 금화 하나를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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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손님들이 뚝 끊기는 어두운 밤.
아직 어린 벼루와 향이, 그리고 내일 아침 빵을 준비해야 하는 힐라는 쉬러 들어가고, 강준과 류월이 뒤처리 청소를 하는 것이 일상이 된 스타 주막이었다.
“....오늘은 안 오시려나?”
“음..? 누구 말이더냐?”
주막 바닥을 닦던 강준이 중얼거리자, 류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왜 있잖아. 가끔 이 시간대쯤에 오는 그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구시렁거리던 강준.
그때, 주막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아직 장사하죠?”
“....말하니까 진짜 오네.”
서둘러서 주막으로왔는지 휘날리는 머리칼을 정돈하는 매화가 스타 주막으로 들어왔다.
“오! 여우 아니더냐? 강준이 말하던 손님이 여우였군!”
그런 매화를 본 류월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흑룡 님께서도 평안하셨는지요?”
“오냐.”
그런 흑룡에게 마저 인사하는 매화.
처음 스타 주막에 왔을 때, 매화는 그런 류월을 보고는 기절초풍을 할 뻔했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그저, 어린 여자아이로 보일 수 있었으나.
영물이었던 매화에게는 그런 거대한 힘을 완전히 숨길 수가 없었다.
첫 만남에서 바닥에 얼굴을 붙인 체, 벌벌 떨었던 기억은 매화가 떨쳐내고 싶은 기억 중 하나였다.
“오셨네요? 그럼...오늘도 그건가요?”
“응! 부탁해 주모!”
“주모....주모라니....하 참....”
그런 매화를 반기던 강준이 주모라는 소리를 듣자, 내심 한탄하는 얼굴로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매화는 그런 강준을 바라보다가, 슬쩍 빈 자리에 앉았다.
“후~ 여기에서는 좀 편하게 있을 수 있어서 기쁘네요.”
그렇게 말한 매화는 다시금 인간 모습을 풀고, 본 모습으로 돌아왔다.
여기 흑룡이 있는데 매화 같은 여우 한 마리쯤, 아무것도 아녔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있으면 곤란하니, 이런 늦은 시간에만 골라서 오는 거지만.
이왕 맛있는 식사를 하는데, 불편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먹기는 싫은 매화였다.
“후우...마당 청소 끝냈....어라? 매화 씨?”
“어머~ 혁수 씨? 오랜만이에요~”
“그...그러게요...하하..”
그때 빗자루를 들고 주막으로 들어오는 혁수를 본 매화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보통 남자 같은 경우에는, 그런 매화를 보며 졸도할 정도였지만, 혁수는 떨떠름하게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매화가 평범한 여자였다면, 혁수도 단번에 뿅 가버렸겠지만, 구미호라는 것을 알게 된뒤로는, 영 떨떠름한 혁수였다.
그래도 그 미모가 너무 뛰어나니, 혁수 본인도 정신을 못 차린다면 헤롱헤롱해질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우와....저 터질듯한 근육, 다부진 어깨, 커다란 키....진짜 맛있겠다...’
그런 혁수를 보며 매화는 입맛을 다셨다.
남자의 근육을 좋아하는 매화의 눈에 혁수의 몸은 매화의 입장에서는 최상급의 남자처럼 보였다.
‘그래도 이렇게 말해도 잘 넘어오지가 않네....그냥 확 덮쳐버려...?’
“자! 나왔느니라! 맛있게 먹거라!”
“아..! 네..넵!”
그렇게 혁수를 가지고 상상의 나래에 빠지며 흐흐 웃는 매화의 앞에 그토록 기다리던 요리가 나왔다.
‘히야...이거지 이거...’
그녀가 스타 주막에 오면 항상 먹는 요리인.
돼지 간 부추 볶음이 모락모락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구미호가 인간의 간을 빼먹는다는 이야기는 많이 퍼져나갔지만, 정작 구미호들은 간 보다는 남자를 육체적으로 먹었으나, 그렇다고 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인간을 죽여 가며 먹을 필요는 없었을 뿐.
인간을 덮치고 마무리로 간을 빼먹는 게 별미라는 구미호도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들의 세계에 섞여, 온갖 요리들을 먹어본 매화에게는 그저 비린 고기일 뿐.
하지만 이건 달랐다.
코끝을 찌르는달콤하면서도 고기의 풍미가 참을 수가 없었다.
매화는 이내 젓가락을 들어, 한 입 맛보았다.
“으음....! 너무 맛있다!”
달콤 짭짜름하게 퍼지는 양념의 감칠맛, 그리고 아삭아삭한 부추.
그것보다도 놀라운 것은 바로 이 돼지 간이었다.
돼지의 간은 단백질로 이루어져서, 열에 많이 익히면 금세 퍽퍽해지는데, 강준의 실력이 합쳐지니,쫄깃하면서도 탱탱한 식감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한입이 두 입이 되고, 두 입이 여러 입이 되는, 그야말로 도술 같은 요리였다.
“여기 청주도 하나!”
“오야! 조금만 기다리거라!”
결국, 음주를 참지 못한 매화는 청주도 하나 주문했다.
솔직히 이런 음식을 앞에 놔두고, 금주라니, 거의 고문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온청주를 따르고 마시는 매화.
뜨거운 술이 매화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간다.
“크으.....이거지!”
간 한입, 부추 한입, 그리고 청주 한잔.
말 그대로 끝없이 들어가는 입이 요망하기만 했다.
지금의 매화는 그 어떤 금은보화도, 아름다운 장관보다도 이 요리 한 접시가 더욱 귀중했다.
“하아....잘 먹었습니다...”
어느덧, 장식으로 올라간 깨 한 톨 남기지 않고 싹 비운 매화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우리 집은 일단 양식을 파는데 말이지....뭐 상관은 없나?”
그런 매화의 미소를 보며복잡 미묘하게 웃는 강준 이었다.
뭐, 여기는 정확히는 주막이니까,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가끔 양식을 잘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서 간단한 한식도 준비를 해 놓으니, 괜찮겠지.
“오늘도 잘 먹었어요.”
“그러면 다행이네요.”
“참으로 복스럽게 먹는구나.보는 내가 다 행복해질 정도로군.”
“하..하하!”
접시를 다 비운 매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류월과 강준에게 인사하고는, 입구로 나섰다.
“여기, 금화 한 잎이요. 잘 먹었어요~남은 건 혁수 씨 용돈 하셔요.”
“아...이렇게 오실 때마다 챙겨주시면 죄송한데?”
“죄송해요? 어머~그렇다면 좋은 일도 하고, 은혜도 갚을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보통의 값보다 비싸게 지불하는 매화를 보며 머리를 긁적이던 혁수에게, 매화는 싱글싱글 웃으며 혁수의 팔뚝에 자신의유방을 강조하며 부볐다.
“아...하하...”
“...뭐 오늘은 먼저 돌아 가볼게요?”
“아..넵! 다음에 또 오시...길.”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하는 혁수를 보며 씨익 웃던 매화는 혁수의 다부진 팔뚝에서 밀착된 자신의 몸을 떼내어, 주막을 나섰다.
‘흐음....다음번에는 이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을 거지만..? 쿠후..’
달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밤.
오늘도 한 송이의 꽃은 그 아름다운 꽃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그 꽃에 가시가 있는지, 없는지는, 그 꽃만이 알고 있을 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