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스톡의 모든 것.
* * *
벼루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갓난아기 때, 모포에 감싸진 채, 외딴집의 마당에 버려진 벼루는, 다행이도 집 주인인 금술 좋은 노부부의 밑에서 잘 자랐다.
그 노부부들은 그런 갓난아이에게 [벼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숯을 구워서 마을에 파는 일을 하시던 할아버지는, 벼루가 좀 자라고 난 뒤부터, 항상 벼루를 데리고 숯에 쓸만한 나무를 구하러 산에 오르고는 했다.
산은 벼루에게 참으로 신비한 곳이었다.
자신의 키보다 몇 배는 거대한 참나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들, 운 좋게 발견할 수 있는 귀한 약초, 마치 폭풍이 치는 것 같은 엄청난 소리를 내는 장엄한 폭포.
그런 장면들을 바라보며, 할아버지가 나무를 구할 동안, 땅바닥에 나뭇가지를 들고, 자신이 보았던 장관들을 쓱쓱 그려가고는 했다.
그렇게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지나고, 벼루가 열 살 무렵, 노부부는 한날한시에 같이 벼루를 놔두고 저승으로 떠났다.
벼루를 처음 데려왔을 때부터, 나이가 많던 노령이었기에, 이만큼 벼루를 키워 낸 것도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벼루가 슬픔에 빠져있던 것도 잠시, 딱히 노부부가 재산을 모아놓거나 하지도 않았기에, 벼루는 살기 위해선 일을 했다.
그렇게 무작정 마을을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던 벼루는, 운 좋게 청라의 집에서 잡일을 하는 일을 구할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바쁜 청라의 집에서도, 벼루는 짬이 날 때면 항상 땅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주로 그리는 것은 청라의 집에 있는 귀한 물건이나, 사람들, 그리곤 이국에서 온 거대한 도마뱀이라는 와이번에게 하늘이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는 마구간에 지푸라기를 이불 삼아 바닥에 깔고는, 곤히 잠들어 있는 모습을 즐겨 그리고는 했다.
그 시절에는 가끔, 그런 생각들을 하고는 했다.
자신을 버린 친부모의 원망, 자신을 두고 떠난 노부부에 대한 슬픔, 자신도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게 자라고 싶은 바람.
벼루는 그럴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
그림만이 벼루의 유일한 숨통이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현재의 상황과 미래의 불확실함 같은 어두운 감정이 사라지고, 지금의 그림을 어떻게 그릴까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청라의 집에서 일하며, 조금씩 모아온 돈을 붓과 종이를 샀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언제나 열심히 그려도,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흙바닥의 그림이 아닌, 언제나 볼 수 있는 종이 위의 그림은 정말이지 신나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벼루에게, 정말이지 놀랍고도,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사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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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그리면...될까요?”
“음....좋은데? 잘 그렸어!”
지글지글 거리며 끓어오르던 스파게티의 김이 어느새 사라지고 차갑게 식을 때쯤, 벼루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강준에게 내보였다.
“그런데 이 ”펜”이라는 건 정말 신기하네요...”
그런 벼루의 손에는 새의 깃털이 달린, 한의 붓과는 다른 도구가 들려있었다.
책을 쓴다고 하자, 아델리아가 잔뜩 선물한 애슐란 제 종이와 잉크, 그리고 펜은 붓을 이용한 그림보다 훨씬 깔끔하고 진하게 그릴 수 있었다.
“물감도 받아왔으니까, 나중에 그것도 시험해보자!”
“물..감 이요?”
“그래! 그림에 색이 있으면 더 좋을 테니까.”
레시피 북을 쓰기 전, 새로운 도구를 벼루에게 주며 적응 기간도 거칠 겸, 시험 삼아 갓 만든 스파게티를 그려보라 했는데,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었다.
아직 색감이 없는 검은 선으로만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꽤나 생동감 있는 그림에 강준은 만족했다.
자. 다음은 너지?
자..잘 부탁드립니다!
벼루의 그림을 확인한 강준은 고개를 돌려 뻣뻣이 서 있는 파렌에게 말했다.
레시피 북이라고 한들, 그 수많은 요리법과 메뉴들을 전부 쓸 수는 없는 법.
그래서 강준은 기본에 충실한 레시피 북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 누구보다도 기본기가 필요한 파렌에게 가르치면서, 천천히 레시피에 쓸 목록들을 나열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기본 스톡*부터 배워보자.
(스톡*:넓은 의미에서는 살코기, 뼈, 생선, 채소 등을 우려낸 국물을 뜻하며, 서양요리에는 소스나 스프를 만들 때 두루두루 사용되는 중요한 재료)
넵!
스톡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색이 나지 않아 투명한 색의 화이트 스톡.
주로 피쉬 스톡이나, 치킨 스톡, 베지터블 스톡이 화이트 스톡에 들어간다.
그리고 브라운 스톡.
스톡을 끓이기 전, 주된 재료들을 충분히 로스팅하여, 마이아르 반응과 캐러멜 반응을 일으켜 더욱 진한 맛을 끓여내는 스톡.
주로 깊은 맛의 진한 소스를 만들 때 사용한다.
포크, 비프 등의 스톡이 이 브라운 스톡에 들어간다.
그리고 스톡에서 절때로 빠져서는 안 되는 재료들이 있으니.
양파, 당근, 셀러리, 총 세 종류의 채소를 일컫는 “미르포아(mirepoix)” 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레비스 미르포아 라는 공작의 주방장이 개발한 요리법으로, 미르포아 공작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스톡, 수프, 스튜, 브레이즈 등 향미를 내기 위해 사용하며, 보통 양파:당근:셀러리를 2:1:1 비율로 사용한다.
다음은 프랑스어로 꽃다발을 의미하는 주방의 아름다운 꽃들로 무장한 재료.
“부케가르니(Bouquet Garni)” 이다.
파슬리 줄기, 월계수 잎, 대파, 타임, 로즈마리 등을 끈으로 한데 엮어, 스톡에 첨가하는 향신료이다.
스톡이 다 끓으면, 묶여있는 채로 건져 내기만 하면 된다.
스톡의 감칠맛과 향을 올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재료이며, 그만큼의 맛을 보장한다.
허나, 향신료는 수많은 형태가 있기에, 끈으로 묶기 힘든 것들도 존재한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바로, 사세데 피스(Sachet d'Epices)이다.
끈으로 엮기 힘든 통후추, 정향, 말린 타임, 팔각 등을 천 주머니에 넣어 육수에 넣는, 부케가르니의 파생적인 방법이다.
작은 향신료들은 일일이 건져내기에도 불편해서,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부용(Bouillion) 이라는 스톡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요리도 있지만, 너무 길어지니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스톡에는 대부분 뼈를 넣어 사용하지만, 부용은 뼈 대신 살코기로 스톡을 내어, 그대로 손님에게 내는 요리라고 생각하자.
자, 시험 삼아 미르포아와 닭 뼈로 화이트 스톡, 소뼈로 브라운 스톡을 만드는 걸 보여줄 테니, 잘 기록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것이 좋다, 라는 말처럼, 강준은 곧바로 시범을 보이기 위해 준비한 재료들을 꺼냈다.
먼저 미르포아를 위해 양파와 당근, 셀러리를 손질한다.
어짜피 스톡에 들어가는 재료이기 때문에, 크게 칼질에 조심할 필요는 없고, 적당히 손가락 한 마디 안 될 정도로 큼직하게 썰어준다.
먼저 화이트 스톡.
잘 발라내 뼈만 남은 닭 뼈를 먼저 팔팔 끓는 물에 한 번 데쳐준다.
이러면 뼈에 남은 불순물과 쓸모없는 지방, 핏물이 빠져, 깔끔한 스톡의 맛을 자랑할 수 있다.
데친 물은 버리고, 새로운 물을 받아, 미르포아와 닭 뼈를 찬물부터 넣은 뒤, 강불로 끓인다.
기포가 올라오며 끓기 시작하면, 그 즉시 중약불로 줄여, 세기를 낮추어 준다.
이 방법을 보일링(Boiling)이라 하며, 불순물의 제거와 뼈의 감칠맛의 쉬운 용출, 그리고 단백질의 유실을 방지하는 방법이다.
저번의 하인즈의 주방인들은 이 보일링을 무시하며 스톡을 만들었지.
그렇게 손이 많이 가는, 대단한 조리법은 아니지만, 이 보일링을 했는지, 안 했는지가 스톡의 맛을 판별하는 중요한 조리법이다.
끓기 시작한 스톡의 불을 약불에 천천히 끓여준다.
끓이는 시간은 짧으면 20분, 길면 하루 이상이나 끓인다.
끓이면 끓일수록, 재료들의 성분이 국물에 진하게 우려나, 더욱 훌륭한 맛을 주지만, 오늘은 이것저것 할 일이 많으니 30분 정도로 끓이기로 한다.
그 사이, 하인즈의 주방에서도 선보였던 브라운 스톡을 위해, 화덕에 넣어 고루 색을 낸 소뼈를 꺼내준다.
이번에도 미르포아를 사용하지만, 치킨스톡과는 다르게, 냄비에 버터를 두르고, 강불에 야채들이 색이 나도록 빠르게 볶아준다.
그다음 어느 정도 색이 난다면, 소뼈와 물을 넣고, 볶으면서 냄비 바닥에 생긴 탄 흔적들을 살살 긁어내는 작업인 디글레이징(daglaze)을 해준다.
이렇게 하면, 바닥에 눌어붙은 감칠맛들을 국물에 풀어낼 수 있기에, 반드시 해주는 작업이다.
비프스톡도 마찬가지고 강불에 끓이다가, 기포가 올라오면, 약불로 낮춘다.
이렇게 끓어오르는 스톡 위로 올라오는 거품들을 걷어주는 작업을 해주는데, 이것을 스키밍(Skimming)이라고 한다.
떠오르는 거품과 지방, 기타 불순물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작업이며, 부케가르니와 사세데 피스는 이 첫 스키밍이 끝나고 넣는 것이 좋다.
그렇게 약불에 천천히 끓여가는 스톡을 바라보며, 가끔 스키밍을 해주고, 면 보자기에 한번 걸러주면 끝!
자. 이쪽이 치킨 스톡, 옆의 것이 비프 스톡이야. 한번 맛 봐봐.
넵! 한번 맛보겠습니다!
“네...네!”
완성된 스톡을 접시에 담아, 파렌과 벼루에게 하나씩 건네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먼저 치킨스톡을 한 입 맛보았다.
‘...! 깔끔하면서도 닭의 풍미와 향이 아주 잘 녹아들어 있어....채소들의 달콤함과 향신료들의 감칠맛...우리 주방에서 맛본 육수하고는 역시 차원이 달라...!’
한 입 맛보자 파렌은 말은 없었지만,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안면에 퍼져있었다.
“어...저...잘 설명은 못하겠지만....그, 닭의 맛이 엄청 진해요...!”
요리는 시킨 일만 그럭저럭해내는 벼루가 맞보기에도, 꽤나 맛있는 스톡에 맛에 뭐라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충돌하다가, 결국에는 간단한 설명으로 끝냈다.
“그래그래. 다음은 비프 스톡이야.” 참! 파렌 너는 한번 물로 입을 행궈, 그리고 금방 맛본 스톡과 차이점이 뭔지 최대한 네 혀로 느껴봐.
네...넵! 알겠습니다!
강준의 말에, 물로 입을 한번 깨끗이 행군 파렌이 브라운 스톡에 숟가락을 넣곤, 입으로 옮겼다.
...! 뭣...!
진하다.
금방의 치킨스톡과는 완전히 다른, 그야말로 감칠맛의 폭격.
깔끔한 치킨스톡에 비해 묵직하고, 그만큼 깊이가 있는 비프스톡의맛에, 파렌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입으로 나왔다.
‘이것을 최대한으로 맛보기 위해 입을 행구라고 하신 거구나....!’
확실했다.
엄청나게 화려하고, 멋있는 요리가 아닌, 단순한 기본기만으로도 애슐란 왕궁의 전 요리인을 가볍게 농락할 수 있는 강준의 실력에, 파렌은 다시금 감탄했다.
어때?
그런 파렌의 모습을 보며, 팔짱을 낀 체 한층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말하는 강준.
저 오만함은 단순히 뭣도 없는 허세가 아니었다.
자신감.
자신의 실력에 대한 압도적인 자신감이 바탕이 된, 그야말로 요리의 제왕, 그 모습 자체였다.
저는...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조금 더, 조금이라도 더 셰프님께 요리를 배우고 싶습니다!
좋아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이제 본격적으로 이 스톡의 정보를 뇌에 때려 박아 주마!
예! 잘 부탁드립니다!
한에 오기를 정말 잘했다.
그렇게 생각한 파렌이 두 손을 불끈 쥐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렇게 뜨거운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두 사람 사이.
“어....저는 그림 연습이나 해야겠네요...”
타오르는 두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던 벼루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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