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천사는 주방에 강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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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으로 떠났던 사절단이 어느새 2주간의 시간이 흘러 애슐란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긴 여행으로 지친 몸뚱이를 당장이라도 자신의 방에 돌아가 쉬게 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든 다스린 진혁은 한으로 떠나기 전, 그때와 비슷하게 대리석으로 된 바닥을 걸으며 화려하게 치장된 문 앞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경비병은 진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곧바로 황금으로 도배된 문을 열었다.
그리곤, 저번과도 마찬가지로 서류 더미가 한가득 쌓인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와 달라진 것을 서류 더미의 높이가 더 높아졌고, 진혁을 반기는 국왕의 안색이 좀 말랐다는 점일 것이다.
아! 어서 오게 진혁! 긴 여행으로 몸이 지쳤을 텐데, 불러서 미안하군.
괜찮습니다.
허허....이렇게 불렀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군, 한 과의 조약지침에 대해 올라오는 서류들이 많아서 말이야....새로운 나라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닐세 허허!
그렇게 멋쩍은 듯이 웃는 국왕이 탁자에서 일어나, 소파와 탁자가 있는 앞으로 다가와, 먼저 소파에 앉고, 진혁은 이어서 그 앞에 앉았다.
차라도 한잔하겠나? 최근 향이 좋은 잎 차가 들어와서 말이지, 아! 쿠키도 있네.
아....쿠키는 괜찮습니다. 차만 받도록 하죠.
그렇게 티타임을 제안하는 국왕에게 쿠키는 거절하는 진혁.
‘이 세계의 쿠키만 먹다가, 형님이 만든 쿠키를 먹으니.....애슐란의 쿠키는 퍼석퍼석해서 못먹겠네.....입이 고급이 되어버렸어...’
그렇게 국왕이 손수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한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한의 왕제, 향종님의 첫인상은 꽤나 나쁘지 않으셨습니다. 인자하시고, 나긋나긋 한 목소리가 인상적이셨죠, 뭐, 앞으로의 두 나라에 관한 조약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다른 사절단의 서류에 적혀 올라갈 것입니다.
하하....또 처리할 서류가 늘어날 듯하군...
그나저나 ‘그’ 인물은 찾았나?
찻잔을 내려놓은 국왕이 진혁에게 물었다.
그 인물이라면....아~ 형...아니 파스타를 만든 사람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습관대로 강준을 형님이라고 할 뻔한 진혁이 가까스로 입을 막아, 틀어버렸다.
그렇지, 아델라가 그렇게 난리를 치며, 한까지 갔는데....어떻게 되었는가?
뭐....싫어도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음? 그게 무슨 소리지?
자신의 질문에 의뭉스럽게 질문하는 진혁에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국왕.
애슐란에 돌아온 아델리아가 어디 있을 것 같습니까?
아! 아델라!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
....흠...지금 시간이 보자.....곧 저녁 식사 시간이군요.
저녁....식사 시간이 무슨 문제가 있나?
하하...아뇨, 그냥, 그때쯤 되면, 아델라가 직접 모습을 비출 겁니다.
그렇게 말한 진혁인 다시 찻잔을 들어, 향기로운 차의 향기를 느끼며 한 모금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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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사절단이 애슐란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왕궁의 주방에는 뜨거운 열기와 우렁찬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저녁엔, 사절단과 왕녀님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만찬의 자리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 고기는 다 준비 됐나? 당근 썰어둔 건 어디 있어!
그리고 시끌벅적한 왕궁의 주방장. 가리우스 기린 의 목청도 그에 따라 덩달히 올라갔다.
요리인들을 통솔하고, 만찬을 완벽하게 완성한다는 사명을 등진 가리우스는, 오늘따라 더욱 크게 날뛰었다.
그렇게 한시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득한 주방에, 낯선 인기척이 들려왔다.
흠.....상당히 시끌벅적하군...
음...? 당신 누구.....와...왕녀님?!?!
가뜩이나 신경이 날카로웠던 가리우스가 신경질을 내며 돌아보자, 그곳에는 바로.
애슐란의 제 3 왕녀, 애슐란 디 아델리안. 일명 천사의 공주라 불리는 왕녀가 팔짱을 낀 체, 주방을 돌려보고 있었다.
애....애슐란 왕가 직속 요리장, 가리우스 기린이 왕녀님을 뵙습니다!
아, 고생이 많아~
‘왕....왕녀님? 갑작스럽게 주방에는 무슨 일인 거지...?
갑작스러운 왕녀의 등장에, 가리우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저녁에 만찬이 준비되어 있었지?
ㅇ...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만찬을 직접 만들려고 말이야.
아 그렇습니.....예?
갑작스러운 왕녀의 선언에 가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아델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럼에도 아델리아는 아주 당당히, 그리고 약간의 흥분감이 가미된 얼굴을 보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주방에 남는 자리 하나 좀 쓸게, 괜찮지?
아...아무리 그래도 귀하신 왕녀님이 직접 칼을 만지신다니....그 무슨...!
에이 괜찮아~ 왜? 안되?
아...아니....그러니까....
대충 저 구석에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알겠지?
‘아니 어떻게 신경을 안 쓰냐고...!’
자신이 요리하는 곳, 구석에 왕녀가 있는데, 그 누가 신경을 쓰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천사님은 이미 빠른 걸음으로 주방에 들어선 이후였다.
에...에잇! 네놈들은 왕녀님에 대해 신경끄고! 어서 움직이기나 해!
예...예!
가리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주방인들에게 소리치며 닦달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지인 아델리아.
자....이 요리책이 과연 얼마나 쓸모 있는지 한번 볼까?
품속에 귀중히 챙겨놓은, [기초 조리 교본]을 꺼낸 아델리아가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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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방장님....
왜!
애슐란 왕궁 직속 부요리장, 다렌 파르민이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가리우스에게 다가왔다.
아니...왕녀님은 갑자기 왜 주방으로 오신 겁니까?
그리고는 도저히 참다못해 나온 말이 왕녀님이 저기서 저러는 이유였다.
.....자신이 직접, 만찬에 나갈 요리를 만들 것이라 하신다....
아 그렇구나....아니 예에??!! 왕녀님이 도대체 왜....?
그 소리를 듣고는, 자신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이는 다렌의 모습에, 역시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니지 싶은 가리우스는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글쎄다....왕녀님의 생각을 우리가 어찌 알겠냐? 그냥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지...
그렇긴 하다만....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뭐?
그렇게 말하는 다렌은 왕녀님의 앞에 있는 냄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도대체 저 냄비에는 무엇이 들어있으며, 왕녀님은 어떤 요리를 만들고 계시는지 말입니다. 궁금하시지 않으십니까?
아델리아는 마침 한창 냄비에다가 무언가를 넣고, 잘 섞이도록 저어주던 중이었다.
끄....끄응.....솔직히 궁금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겠지...
사실 미치도록 궁금하다.
가리우스는 애슐란 에서의 요리실력 중 탑은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것을 보증하는 애슐란 왕궁 주방장이라는 직책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아주 자랑스러웠다.
그런데 평생 손에 물 한번 묻혀본 적 없는 왕녀가 갑자기 자신의 구역에서 요리를 만든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뜬금없는 흥미로 괴상한 것이나 만들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어라? 그게 없네? 저기~ 잠시만!
그렇게 생각에 빠진 가리우스를 다시 현실로 끌고 온 것은 왕녀의 외침 덕이었다.
네? 무슨 일이신지?
그게, 조금 큰 접시가 필요한데....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아! 그거라면 다렌! 왕녀님을 모시고 안내해 드려.
예! 이쪽입니다 왕녀님!
그릇을 찾는 왕녀에게, 다렌을 붙여서 안내를 시켰다.
.....갔나?
이미 두 사람은 접시를 찾으러 옆 방으로 들어간 상황.
...꿀꺽...
만약, 그 의문스럽고, 미지의 냄비 안을 볼 기회는 지금이라고, 가리우스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지금이면.....슬쩍 엿볼 수 있지 않나?’
‘아니! 감히 왕녀님이 만든 요리를 몰래 보려는 건가? 미쳤어?’
‘근데 궁금하잖아 솔직히....안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슬쩍 보는 데 얼마가 걸린다고 생각하냐? 지금이 기회라니까?’
....그래. 얼마나 걸린다고...
마음속의 서로가 양분화해서 싸우는 것이 느껴진 가리우스는, 결국 슬쩍 보자는 자신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다짐을 한 가리우스가 화로에 보글보글 끓고 있는 왕녀의 냄비에 다가갔다.
그리고, 뚜껑을 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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