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 한 사람을 위해 피는 꽃(2)
* * *
밤을 밝히던 달이 어느새 산의 봉우리로 사라질 무렵.
희끄무래한 햇빛이 어스레하게 두 사람을 비추었다.
“자자! 마지막으로 한 바퀴 더!”
“흐히익...헤엑.....”
쉬는 날인 오늘 이른 새벽부터 힐라의 수련에 동참하여 폭포수 같은 땀을 뻘뻘 흘리던 혁수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움직였다.
본래 같으면 낮까지 편하게 퍼질러 잘 정도로 게으른 혁수가 이렇게 수련을 나온 이유가 있었다.
하백의 집에 머물 때부터, 힐라에게 혹독하게 굴려가던 혁수는, 힐라의 앞에선 마치, 군대의 훈련병이 조교의 앞에 있는 것처럼 꼼짝도 못 하는 것이었다.
“자...이걸로 오늘 수련은 끝!”
“후하...후하....하...”
그렇게 마지막 달리기가 끝이 나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진 혁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꼼짝달싹 하지 못했다.
그렇게 힘든 수련을 끝내고, 혁수의 목이 물을 간절하게 원할 시점.
“이거 드셔요.”
“하아...어? 아...예?”
그런 혁수의 앞에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으니.
은빛 꼬리를 살랑거리던 매화가 바가지에 물을 가득 채운 후, 혁수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금방 떠온 물이니까, 시원하실 거예요.”
“아 네...감사...합니다...”
영문도 모른 체, 일단 바가지를 받아둔 혁수는 차가운 물을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음....잘 되고 있는건가?’
그런 혁수를 바라보던 매화는, 어젯밤 일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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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새벽?”
“예! 그때쯤이면 혁수랑 제가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 예정이거든요!”
“그런데....그럴 때 내가 가서 뭘 해야 하는지....”
“제가 병사들을 가르칠 때 느낀 건데, 막 엄청 힘든 훈련이 지나고, 자신을 찾아오는 여성이 있으면 바로 반하더라고요, 뭐랄까....그 힘든 일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지친 시점에 딱! 하고 나타나서 물 한 바가지를 건네면, 그걸로 끝이죠.”
“음 음....그렇지. 군대에서 면회 와주는 사람처럼 고마운 사람 또 없으니.”
“네?”
“아...아냐! 혼잣말이야!”
힐라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던 강하는, 당황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아..아무튼, 내가 보기에도 그건 통한다!”
“아 네....뭐 그건 그렇다고 치고. 다음은 어떡하지?”
“데이트...아니 어디 놀러 가자고 해봐.”
“어디로?”
“그거야 뭐....이른 아침의 동네 산책?”
“아....아무튼 알았어. 내일 새벽, 말이지?”
그렇게 힐라와 강하의 조언을 들은 매화는, 다시금 들었던 조언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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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수 씨는 오늘 바쁘신가요?”
“네? 아뇨! 딱히 일은 없....는데...요...?”
“어머! 마침 잘됐다! 그럼 혹시 같이 마을에 가주실 수 있으신가요?”
혁수에게 오늘의 스케줄을 묻던 매화는 혁수의 말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마...마을이요?”
“새로운 비녀를 사려고 하는데, 이왕이면 같이 봐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요.”
물론 개뻥이다.
화의정의 일등 미녀인 매화는, 사소한 치장품부터 목걸이, 비녀, 보석까지 전부 화의정에서 손수 골라 직접 대접한다.
마을에서 파는 것보다 수십 배는 비싸고, 아름다운 치장품들이 많은데, 굳이 마을까지 내려와서 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혁수와 마을을 돌아다닐 구실이 필요했던 매화에게는 안성맞춤인 구실이었다.
“같이....가주실....거죠?”
“아...예!예! 가겠습니다.”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 똘망이는 눈방울로 치켜보는 매화의 얼굴에, 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알겠다고 끄덕였다.
“정말요? 다행이다~ 그럼 오늘 진시(07~09시)가 될 때쯤에 마을 입구로 나와 주세요! 그럼!”
“아! 저기.... 잠ㄲ...!”
혁수의 대답을 들은 매화는 손뼉을 마주치며 빙긋 웃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됐다...! 약속을 잡았어....! 이럴 때가 아니지....어서 돌아가서 무엇을 입을 지부터 골라야....!’
혁수의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마구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던 매화는 발개진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뭐지...”
그리고 갑작스러운 만남을 제안한 매화를 떠올리던 혁수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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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금이 진시가 맞나?”
혁수는 지금, 마을 입구의 앞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여성과 단 둘이서 다녔던 적도 별로 없었던 혁수였기에,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해보지만, 두근대는 마음을 전혀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이건....데이트...? 인가? 아냐...또 혼자서 망상하지 말자....”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자신을 콕 집어서 고른 매화를 떠올린 혁수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데이트라는 글자가 생각났지만, 후다닥 지워버렸다.
대학생 때 일이 아직까지 상처로 남은 혁수는, 활기찬 성격과는 다르게, 연애 쪽에서는 매우 소극적이게 되었다.
“여기 계셨네요?”
“아..넵!”
그리고, 그런 혁수의 뒤에서 마치 옥구슬처럼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매화는, 스타 주막에 있었던 모습과는 다르게, 검은 머리와 꼬리를 숨긴 채, 혁수와 만났다.
본 모습으로 마을을 돌아다녔다가는, 다음에 일어날 일이 생각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홍빛 저고리와 반짝거리는 목걸이, 분을 칠하지도 않았는데도 새하얀 얼굴과 빨간 입술.
화의정의 손님을 대접할 때보다는 화려함이 덜한, 수수한 복장이었지만, 그런 모습에도 남자들 여럿 죽일만한 모습이었다.
“그럼...갈까요?”
“그...그럴까요?”
그런 모습에 당연히 건장한 청년이던 혁수도 크게 반응했지만, 매화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보통의 매화라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감정쯤이야, 눈뜨고 이게 떡인지 밥인지 알아볼 만한 정도로 쉽게 알 수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혁수와 단 둘이서 만난 이 상황 때문에 긴장이라는 안대가 매화의 눈을 가린 탓이었다.
그렇게 쭈뼛거리던 두 사람은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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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시작되는 아침.
한의 수도인 서라벌도,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 천지였다.
가게의 문이 하나씩 열리고, 팔만한 물건들을 가게 앞에 내놓기 시작한다.
주막들의 굴뚝에서는, 불을 때며 생기는 연기가 피어 올랐고, 두부 장수는 두부를 잔뜩 실은 지게를 이고, 종을 울리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런 모습은, 서라벌의 거리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생명을 불어넣는 듯했다.
“어! 엿장수다! 혁수 씨! 엿 하나 드실래요?”
그리고 커다란 가위를 요란하게 흔들어대며 엿을 파는 엿장수를 발견한 매화가 혁수에게 물었다.
매화가 아직 인간 마을에 가기 전, 숲속에 있었을 때, 자신을 위해 엿을 챙겨온 동포가 전해준 엿을 처음 먹었던 매화는, 그것을 계기로 인간 마을에 가겠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물론, 요즘엔 매일같이 화의정에선 비싼 간식들이 나오고, 스타 주막에선 상상하지도 못한 맛있는 음식들이 나왔지만, 가끔 별다른 장식 없는 하얀 엿이 생각나고는 했다.
그것을 보면, 마치 어릴 적, 자신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일지도 모른다.
“아...저는...”
“?우물우물...마시써오...!”
갑작스럽게 엿 먹으라는 소리를 들은 혁수가 움찔거릴 때, 이미 매화는 어느새 엿장수에게서 엿을 산 뒤, 힘껏 입속에서 오물거리고 있었다.
“혁수 씨도 드세요.”
“풋...! 아..그럼 감사히...”
그런 매화를 바라보던 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내며, 매화가 건넨 엿을 받았다.
매화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얼핏 보게 된 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감싸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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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둘은 조금 더 평온하게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침의 거리는 사람도 적었기에, 두 사람은 여러 가지를 둘러보았다.
갓 뽑아낸 가래떡도 한 입 해보고, 책방을 기웃거리던 혁수를 밀어내기도 하면서. 둘은 어느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여기다!”
그리고 둘은 마침내 이 만남의 목적이었던 비녀를 사기 위해, 장신구를 파는 가게를 찾았다.
갖가지 아름다운 비녀들과 장신구들이 가득한 가게를 비집고 다니며, 매화는 꼼꼼하게 비녀를 골랐다.
“이...이건 어때요?”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분홍빛 꽃무늬가 장식된 하얀 비녀를 고른 매화는, 자신의 머리에 비녀를 꽂고, 혁수에게 그 모습을 보이며 물었다.
‘아 잠시만...이거 부끄럽네...’
기분이 들뜨던 매화는, 자연스레 비녀를 보였지만, 그때쯤 되니까 그 모습이 부끄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본 혁수.
“예...예쁘네요...잘 어울려요.”
그런 매화를 바라보던 혁수는, 자신도 모르게 매화의 시선을 피하며, 아름답다고 전해 주었다.
“그....그런가요?”
혁수의 말에, 살짝 상기되었던 두 뺨이, 어느새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럼, 이걸로 살래요.”
“네? 아직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하지만...이게 이쁘다면서요? 그럼 이거면 충분해요.”
그렇게 말한 매화는 돈을 지불하고 혁수가 칭찬해준 비녀를 구매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가 구매한 비녀는 화의정에 있는 비녀들보단 촌스럽고,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잘 어울린다....라...쿠후...’
그가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중얼거린 매화는 혁수가 모르도록 뒤로 돌아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은 마치, 그녀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매화꽃의 모습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