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8화 〉 피는 물보다 진하다. (88/289)

〈 88화 〉 피는 물보다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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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왕자니임....지금이라도 궁궐로 돌아가는 것이....”

한의 왕가 호위무사인 제린은 이마에서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대며 말했다.

“싫다! 여기까지 와놓고, 어찌 돌아간단 말인가!”

그의 앞에는 제린이 섬기는 주군, 한의 제 4 왕자 향진이 얼굴을 부풀리며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한의 주인인 향종, 그의 아들인 향진은 보통 이 시간이라면 화려한 옷을 입고, 학자들에게 둘러싸여 한창 공부에 힘써야 할 시간.

하지만 향진은 고급진 천으로 만든 옷이 아닌, 자신의 머리보다 큰 갓을 눌러쓰고, 평민들이 입을만한 옷을 입은 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왕제님께 이 일이 들통 나면 어찌할 생각이십니까...”

“에잇...! 그렇게 아바마마가 두렵다면, 너 먼저 돌아가도록 해라!”

“왕자님을 두고 잘도 돌아가겠습니까...”

그런 향진에게 궁궐로 돌아가자 아무리 말해도, 향진은 확고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했다.

그럴수록 제린의 얼굴은 더더욱 썩어들어갈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평민들이나 입을 옷을 입고, 어디를 가신단 말입니까?”

“지금 서라벌에, 내가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지 않겠느냐.”

“서...설마?”

향진의 목적지를 어렴풋이, 아니 거의 확신이 들 때쯤, 그들은 이미 목적지의 바로 앞까지 오게 되었다.

이미 길게 늘어진 사람으로 된 줄과, 그 멀리 보이는 2층의 건물.

스타 주막.

그것이 향진의 목적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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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진은 왕자다.

한이라는 나라의 제 4왕자인 향진은, 보통의 사람들이 구경하기도 힘든 산해진미는 이미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그런 그가 어째서 굳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서라벌의 거리까지 나왔는가.

애슐란의 사절단이 한을 방문했을 때, 그도 왕자의 입장으로 함께 만찬의 구성원이 되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옅은 갈색의 땋은 머리를 가진 그녀를.

이미 궁궐에서는 강하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무려 한의 주인인 향종이 ‘부탁’하는 존재.

허나 그녀는 나이 많은 학자도,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도 아닌, 향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

그렇기에 향진은 그녀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그녀는 만찬의 시간이 되면, 언제나 새로운 요리를 바치며, 그 요리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마치고, 일말의 여지도 없이 뒤돌아 방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향진은 자꾸만 시선이 갔다.

향진은 아마, 이 요리의 맛이 엄청나기에 그것을 나른 그녀에게 관심이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사절단이 한을 떠나고, 만찬이 끝나자, 그녀는 더 이상 궁궐에 들락날락하지 않게 되었다.

향진은 그렇게 된 이후부터, 자꾸만 가슴속 무언가가 응어리가 진 채로 빠져나오지 않는 감각을 느꼈다.

이 감정은 아마, 그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였기에 답답해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향진은, 결국 궁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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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고의 시간 끝에, 둘은 스타 주막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두 사람이ㄷ....입니다.”

그런 둘을 반기는 벼루에게 언제나처럼 반말로 대답하려던 향진이 순간 말을 멈추고는, 다시 존댓말로 바꿨다.

왕자라는 직책은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었다.

심지어 이곳은 평민들이 가득한 거리의 주막.

갑자기 한의 왕자가 나타난다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그렇기에 향진은 최대한 평범한 평민처럼 연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떠냐....이렇게 하면 왕자처럼 보이지는 않겠지?”

“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소년처럼 보이십니다!”

그런 둘이 쑥덕거리며 신나게 벼루를 따라갈 때.

‘어디의 높으신 도련님인가 보다....’

이미 벼루는 향진이 왕자인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적어도 높으신 분이라는 것은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향진이 평범하다고 생각한 옷은, 평민 기준으로 아주 비싼 비단으로 만든 옷이었고.

그런 향진을 따라 뒤에 서 있는 남성은 누가 봐도 그런 도련님을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호위무사였다.

아무리 평민을 연기한다고 해도, 너무나도 어설펐기에, 그들만 모르는 평민인 척 하는 연기는 이미 들통나있는 상태였다.

“메뉴판을 보고, 주문을 결정하시면, 저희 직원을 불러주세요~”

“알겠ㄷ...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벼루가 안내한 자리에 앉아, 메뉴판들 들여다보았다.

“.....이게 다 뭐지? 프...렌추 어뉘언? 포테이토 크륌? 치킨 콩소메? 너는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느냐?”

“.....송구하오나 저도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큰 난관에 부닥쳤다.

메뉴판을 보아도, 이게 뭔 요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의 음식과는 전혀 다른, 처음 보는 요리들이었기에, 무엇을 시켜야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를 않았다.

“이를 어쩌면 좋을까....”

그렇게 두 사람이 머리를 싸매고 있을 무렵, 누군가가 다가왔다.

“음? 왜 그러고 있는 것이냐? 주문은 하지 않고.”

““......!!!!!!!!!!””

주문하지 않고 멍하니 중얼거리던 두 사람을 이상하게 여긴 류월이 다가온 것이었다.

허나 두 사람은 류월을 보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흑룡 류월.

평범한 사람들은 이 여자를 그냥 평범한 꼬맹이로 보지만, 왕가의 사람들은 이미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선조, 충하 전하를 도와 3국을 통일하고 한을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한의 수호룡.

그녀의 업적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왕자인 자신도 감히 함부로 굴지 못하는 신격 높은 흑룡이었기 때문이다.

“아....저...그게....”

“흠....그렇군....자네들, 이곳이 처음인가?”

“네?....아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흑룡에게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쩔쩔매던 향진에게 류월이 물었다.

처음 이 주막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메뉴판을 보며 고민에 빠지는 것을 보았던 류월 이었기에 그들도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햄버그 스테이크를 추천하지, 역시 고기가 최고니까 말이다! 하하!”

“아...그렇다면 그것으로....”

“알겠다. 아, 치즈는 추가할 것인가?”

“치...치즈...?”

“잘 모르겠다면 일단 추가하거라, 후회는 없을 터이니.”

“예..예! 그렇다면 치즈도 추가하겠습니다.”

“좋다,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예...”

“.................”

“................?”

그렇게 주문이 끝났음에도, 류월은 향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한.

“네 녀석, 짜증 나는 아비를 닮았군.”

“예?”

“아니다, 금방 올 테니 기다리도록 하여라.”

향진의 얼굴에서 익숙한 향종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한 류월은, 한 마디 남기더니 돌아가 버렸다.

“......휴.”

“오...왕자님....저...저희 금방, 흑룡님을 뵈었던 겁니까?”

“그렇겠지....내 긴장이 억력하여 가슴이 옥죄이는 듯했구나.”

“그런데도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았을까요?”

“아서라, 이곳에서 난리를 피우는 것이 더 민폐일 테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겠지요?”

“그래, 지금은 나오는 요리를 기다리거나 하자꾸나.”

그렇게 그들은 폭풍 같던 류월의 등장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요리가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햄버그 스테이크 치즈 추가, 2인분 나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자리에 안내했던 소녀, 벼루가 그들의 앞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철판에서 지글거리는 고기 같은 동그란 것이 강렬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오...오오....! 이것이...햄버그...스테이크?”

“엄청난 향....와...왕자님! 어서 드시지요!”

“어?...어어 알겠다.”

잠시 그 놀라운 자태를 감상하던 향진은 능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원래라면 젓가락과 숟가락만을 사용하던 향진이 이런 식기를 사용할 리가 없었지만, 전의 만찬 때 요리를 맛보기 위하여 연습했던 결과였다.

“어...이렇게...?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에혀....자, 보거라. 이것은 포크! 이쪽은 나이프! 자. 이 포크라는 것을 들고, 나이프로....이렇게. 어떠냐? 알겠느냐?”

“아! 예! 알겠습니다!”

허나 포크도, 나이프도 처음 보는 제린이 낑낑대자, 향진은 직접 시범을 보이며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그럼 어디...”

향진은 먼저 자신의 존재를 강력하게 내보이는 햄버그 스테이크에 나이프를 갖다 올렸다.

마치 나무를 자르듯 톱질하며 잘라내자, 햄버그의 내용물이 튀어나왔다.

“이...이것은...?”

하얗고 끈적이며,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치즈였다.

“이게 그 치즈인가 하는 것인가 봅니다.”

“향이 엄청나구나, 그럼...”

향진은 햄버그를 한입 크기로 잘라, 치즈를 돌돌 말은 체로 입에 넣었다.

“....! 으음...!”

그냥 구운 고기가 아닌,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완벽한 비율로 갈려 반죽된 고기의 육즙은 엄청났다.

곱게 갈린 것이 아니라 일일이 칼로 다진 듯, 다져지지 않은 알갱이들이 더욱 식감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

갖가지 향신료와 양파, 마늘들이 더욱더 다채로운 향을 내뿜었고, 토마토를 주체로 한 소스의 새콤한 맛이 더욱 입맛을 돋우었다.

그것보다도 놀라운 것은 바로 치즈.

자근자근 씹히면서 쭈욱 늘어나는 치즈의 고소함은 완벽 그 자체였다.

“오..왕자님....이 요리....엄청나게 맛있습니다...!”

“그래, 나도 맛나구나.”

마찬가지로 햄버그의 맛에 놀라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붕붕 흔드는 제린의 모습이 나이대에 맞지 않은 꼬마 같다고 생각하는 향진이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하루의 일탈을 즐기며 맛나게 햄버그 스테이크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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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그래, 오늘 몸 상태가 좋지 아니하다고 하던데, 괜찮느냐?”

“예...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아바마마.”

향진의 몸이 나빠 오늘 하루 수업을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향종이 향진을 자신의 방으로 부른 것이었다.

“그래, 이만 방으로 돌아가 쉬도록 하여라.”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안부를 묻던 향종이 향진을 돌려보내던 찰나.

“주막은 2주에 한 번 정도 다니도록 하여라, 한 나라의 왕자가 너무 거리를 다닌다면 왕가의 품평에 문제가 갈 터이니.”

“예, 주막은 2주에 한 번....예?”

갑작스러운 향종의 말에 향진은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느냐, 하지만, 너의 마음도 이해하느니라, 그러니 앞으로는 2주에 한 번 정도 다니도록 하여라.”

“아니..예...아..그...알겠습니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아버지의 모습에, 향진은 당황하며 서둘러 방을 나왔다.

“....아바마마는 무엇이든 알고 계시는 구나....”

자신이 오늘 행했던 일을 순식간에 눈치 챈 향종을 보며, 두근거렸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래도 아바마마...이런 나에게 주막의 출입을 허락하시다니....”

그런 향종에게 감동을 느끼던 향진은, 발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 나도 2주가 지났군.”

향진이 방을 나서자, 향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숨겨둔 장롱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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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놈이냐?”

“이렇게 저를 반겨주시니 기쁨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군요.”

사람이 없는 늦은 밤의 스타 주막.

류월은 마치 못볼 것을 본 것마냥 얼굴을 구겼지만, 향종은 그런 류월에게 개의치 않으며 빙긋 웃었다.

“네놈도 그렇고, 네놈의 아들 녀석도 그렇고, 참 짜증 나는 얼굴이구나.”

“피는 속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아들도 이 주막을 올 것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조금 빠르군요.”

향종이 수업을 빠지고 몰래 왕궁을 빠져나와 주막으로 간 것을 크게 꾸짖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정작 향종 그도 2주에 한 번, 몰래 주막으로 와서 강하의 음식을 즐기고 있던 상황이였기에, 크게 꾸짖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럼, 메뉴판을 부탁드립니다.”

“.....어서 먹고 꺼지기나 하거라.”

향종은 오늘도 메뉴판을 뒤적거리며 행복한 식사를 즐기기 위해 입맛을 다셨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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