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범선 [나탈리]호.
* * *
“자! 다들 모였지?”
어느새 해가 중천에 뜬 시각.
저마다 하전마을을 돌아다니며 즐기는 시간이 끝나고, 다시금 선박장으로 모였다.
향이와 류월은 결국 나와 같이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먹거리를 즐겼고.
혁수는 힐라랑 같이 다닌 것 같은데...
“이번의 그 유명한 신작....[막심] 7권...! 역시 항구가 근처라서 그런가...운이 좋구만...!”
“[그 머슴은 매일 쌀밥을 먹는다.]라.....이건 살 수밖에 없네에~”
그들의 손엔 외설적인 느낌이 폴폴 나는 책들 한 꾸러미를 양손에 가득 들고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혁수는 몰라도 힐라도 은근 저런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저거 봐, 저 표정은 완전 짐승이야....
.....나중에 한 권 빌려야지.
“바닷가의 그림을 그리는 건 처음이라 굉장히 좋았어요!”
“어우....셰프님, 벼루는 다음에 화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새 강하에게 쪼르르 달려와 자신이 그린 그림이 그려진 노트를 펼쳐 보여주는 벼루.
물감 없는 단색으로만 그려진 그림이었지만, 모래사장의 한가운데 에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그녀의 옆에서 자신감 없이 자신이 그린 그림이 부끄럽다는 듯이 숨기는 파렌의 노트도 흘깃 바라보니, 귀여운 토끼들이 모래사장에서 모래성을 쌓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그림이었다.
“파렌 오라버니도 잘 그렸는걸요? 엄청 귀여워요!”
“그...그래? 그런가? 너도 엄청 잘 그렸어!”
“크흡...!”
욕망에 빠진 미소를 짓던 두 사람과 엄청나게 대조되는, 서로의 그림을 칭찬하며 싱글벙글 웃는 벼루와 파렌의 모습을 바라보자, 갑자기 금방까지 들었던 추잡한 생각이 부끄러워 질정도였다.
“크흠...! 일단, 시간이 되었으니 가볼까?”
강하는 헛기침을 내더니, 자세를 돌려 자신들의 앞에 정박하여 있는 거대한 범선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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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애슐란 왕가 직속 범선, [나탈리]호에 탑승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배에 탑승하자마자 그들을 반긴 것은, 1자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환영인사였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저택의 사용인처럼 단정하고 깔끔한 제복을 입었으며,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모습이 보였다.
범선은 그 크기만큼 내부도 무척 거대했으며, 천장 또한 약 건물의 7층은 될 정도로 높았다.
길을 쭉 따라 하나같이 화려한 인테리어가 이곳이 범선이라는 것을 잊을 만큼 조형미가 굉장했다.
“와...이 시대는 현대에 쓰던 도구들도 없을 텐데....이거 만들던 사람들 죽어서 이미 무덤에 있을 것 같네....”
건축 설계 및 인테리어 일을 하던 혁수는 범선의 내부를 감탄한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숙연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이 곳에 지내실 동안 여러분들의 편의를 돕는 아넬 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예! 잘 부탁드립니다.”
그중, 그들의 정면에서 인사하던 한 여성이 다가와 강하에게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짙은 보랏빛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넘긴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한껏 머금었다.
아마 그녀가 애슐란으로 가는 동안 우리를 전담하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강하 님, 그리고 일행분들이 애슐란으로 떠나는 길 동안 편히 지낼 방부터 안내하겠습니다.”
거침없이 우리를 안내하던 아넬을 쫄래쫄래 따라,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 곳. 손님 대접용으로 이루어진 방을 한 사람당 방 하나씩 사용하시면 되겠습니다.”
“우...우와....”
그녀가 안내한 개인실은 마치 고급 진 아파트의 집처럼 매우 거대했다.
화장실과 침실, 그리고 넓은 거실이 마치 현대의 시설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주 발달한 기술이 들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와...개쩐다....”
“형! 이것 봐! 심지어 샤워실도 따로 있는 데다가 물도 나와!”
“뭐?!?”
스타 주막에서는 언제나 물을 길어서 씻었건만, 이곳은 따끈따끈한 온수가 직통으로 나온가는 것이었다.
“아! 이 기구는 우리 애슐란의 저명하신 마도학자들이 모인 진리의 탑에서 개발된 마석을 사용한 것으로 설치된 마석에 응축된 마력이 펌프 작용을 하여....”
우리의 관심이 샤워기로 쏠리자, 아넬은 마치 자랑을 하는 듯 샤워기의 발동 원리부터 그 대단함에 대해 우리에게 설파하기 시작했다.
“....뭔 소린지 알겠냐?”
“일단 마석이라는 게 쓰인다는 건 알겠음.”
점차 길어지는 말에 전혀 이해하지 못한 우리였지만, 일단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편히 쉬어 주시기를, 무슨 일이 있다면 언제든 1층의 카운터로 와 주시길 바랍니다,”
일장 연설을 마친 아넬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그럼, 일단 각자 방에서 편히...”
“히히! 침대에서 뒹굴 거려야지!”
“난 일단 씻을래! 따뜻한 물로 편하게 씻을 수 있다니....여기가 극락일지도...!”
강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이웨이 혼이 불타는 혁수와 힐라는 냉큼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이런 방에 저따위가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왕궁에서 일할 때도, 이렇게 고급스러워 보인 방에서 묵어본 적이 없던 파렌은 내심 기대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체 강하에게 물었다.
“괘...괜찮아 괜찮아! 우린 손님이야! 까짓거 편히 보내!”
“ㄴ....네!”
‘솔직히 여행 다니던 시절 지냈던 호텔보다 비싸 보여서 나도 떨린다고...’
그런 파렌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두들겨 주던 강하였지만, 자신도 설레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밥은 언제 먹느냐?”
“....진짜 너는 한결같다....”
그리고 이런 고급스러워 보인 방을 내버려두고, 밥부터 찾는 류월이 강하에게 묻자, 강하는 그런 류월에게 대단하다는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이정도로 고급스러워 보인 범선인데, 요리는 어떻게 나오려나?’
류월에게는 조금 질책하는 말투로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그녀 또한 요리에 관심 많은 요리사.
나탈리 호의 요리사들의 상태가 궁금하기도 했다.
“그거야 나중에 아넬이 알려주러 올 테니까. 일단 방에서 쉬고 있어.”
“알았다.”
그렇게 스타 주막 전원이 각자의 방에서 저마다의 휴식을 즐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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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이거 진짜 좋은데?”
각자의 방에 비치된 샤워실에서 깔끔하게 몸을 씻어낸 강하가 침대에 몸을 던지며 뒹굴거렸다.
한에서는 침대가 없었기 때문에, 이 고급스러워 보인 천과 부드러운 쿠션감이 그녀의 몸에 진한 안정을 전해주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내 전신을 보는 게 익숙하지 않을 줄이야....”
지금까지 강준이 아닌 강하의 몸으로 살아오면서 몇십 번은 몸을 씻어냈지만, 그때야 대충 자세히 자신의 몸을 보지 않고 씻어내었다.
하지만 이 나탈리 호의 샤워실은 고급스러워 보인 만큼 여러 가지의 것들이 존재했는데, 샤워실 벽에 붙어있던 전신 거울 또한 그중 하나였다.
평소처럼 몸을 씻기 위해 옷을 벗고 샤워실로 들어간 강하는 들어가자마자 바로 자신을 비추는 전신 거울로 인해, 예상치 못한 광경을 바라보고 말았다.
남자였을 때와는 다른, 뽀얀 피부에, 조그마한 손발.
근육이라곤 보이지도 않은 얇은 팔다리와 라인이 조금씩 보이는 허리.
아직 크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바라보는 사람이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부풀어 오른 유방.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가 언제든지 지키고 있던 그곳의 휑함까지.
“으...아앗!”
그런 광경에 강하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돌겠네...”
결국 강하는 정면으로 자신의 몸을 볼 용기가 없어, 눈을 감은 채 오로지 감으로만 의지하며 몸을 씻어내었다.
어영부영한 자세로 샤워하던 강하는 기를 사용하면 더 편하게 씻을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샤워를 끝낸 후였다.
그나저나 나탈리 호에는 향기로운 장미 향이 나는 비누까지 있었기에, 은근 탐이 났다.
현대에 살아가던 강하는 보통의 한의 사람처럼 비누 없이 몸을 씻기 불편해서, 하인즈와 거래할 때 잔뜩 쟁여놓기는 하지만. 이 향기는 보통의 비누보다 훨씬 고급스럽고 자연스러운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져나가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아 몰라...이불 밖은 위험해....”
그렇게 침대에 육체의 자유를 맡긴 체, 기분 좋게 잠이 들려는 찰나.
똑똑.
“...? 누구세요?”
갑작스럽게 울리는 노크 소리에 강하는 몸을 일으켰다.
“쉬는 도중에 죄송합니다 강하님. 아넬 입니다.”
‘아넬...? 밥 먹는 시간이라도 알리러 온 건가..?’
그 노크 소리의 주인은 바로 아넬이었다.
“잠시만요~”
무언가 전하는 것을 잊었나 싶던 강하가 침대에서 벗어나, 문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된 점.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그...혹시...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멜은 매우 곤란하면서도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강하에게 부탁을 해왔다.
“부탁이요?”
뭔 부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