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야, 너 뭐냐?
* * *
“후....”
강하는 자신의 머리에 둘렀던 두건을 풀어 해치며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음...쩝쩝....형..! 왓...쩝...어?”
“아이씨 드러, 입에 있는 건 다 처먹고 말해!”
그러자 접시에 얼굴을 박고 허겁지겁 음식을 비우던 혁수가 강준을 반기며 입에 있던 밥풀을 튀겨가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역겨워진 강준은 인상을 팍 구기며 소리쳤다.
그곳에서는 만찬에 참여하지 않은 스타 주막 직원들이 한데 모여 그들만의 만찬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들을 환영하기 위한 만찬이었지만, 귀족들 속에 엮여서 불편하게 식사하기가 싫었던 그들은 따로 한곳에 모여, 강준이 따로 준비해 준 요리를 먹고 있었다.
만찬이 이루어지던 화려하고 거대한 방보다 초라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잘 먹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아씨.”
“어? 벌써 다 먹었슴까? 사부님 보통 이것보다 더 많이 먹지 않나요? 심지어 소갈비찜 인데?”
“사...살 빼는 중이야! 암튼, 저는 왕궁이나 좀 둘러보고 있겠습니다.”
“어?...어어...그래...”
그때, 힐라가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식사를 마쳤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그릇에는 한참 음식이 남아 있었다.
그 점이 이상했는지 옆에 앉아있던 혁수가 그녀에게 물었지만, 살을 뺀다는 대답을 마지막으로 부리나케 방 바깥으로 나갔다.
“그럼 남은 건 내 꺼...”
“어림도 없다!”
“아악...! 치..치사하게....!”
“우하하하!!! 네 녀석이 늦은 게 아니더냐!”
그녀가 나가자마자 힐라가 남긴 음식을 탐내던 혁수가 손을 뻗어 자신의 앞으로 가져오려던 찰나, 틈을 노린 류월이 순식간에 가로채버리며 흉포하게 웃음을 지었다.
“에휴.......암튼 만찬은 무사히 끝났고, 이제 남은 건....하.....인생....”
강하는 밥상머리 앞에서 등신 같은 짓을 하는 두 사람을 간단하게 무시하고,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압도적인 절망감을 맛봤다.
“그러고 보니 밤에는 무슨 무도회...? 한다며?...엌ㅋㅋㅋㅋㅋ또 그 드레스 입겠네?”
“닥쳐 임마!”
“케흑!”
그런 강하의 기분도 모른 체 괜히 옆에서 깝죽대던 혁수의 목에 강렬한 넥 슬라이스를 처박아 주었다.
“아무튼....좀 찜찜하네...”
언제나 밝은 모습을 보이던 힐라가 국왕과 대화하고 난 뒤부터 왠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뭐...자세한건 나중이고, 지금은 내가 더 문제라고....!”
강하는 다시금 그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부림을 마구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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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투정 부린다고 해결되면 진작에 됐겠지.”
강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왕궁의 거대한 무도회장.
화려한 샹들리에와 장식품들.
앞에는 갖가지 악기들로 귀를 즐겁게 만드는 클래식 노래를 들려주는 악단들.
그리고 아름다운 천들로 만들어진 정장과 드레스들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
그녀의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의 중심에, 강하는 우뚝 서 있었다.
그녀가 가장 입기 싫어하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체 말이다.
실례, 혹시 정해두신 파트너가 없다면, 한 곡 어울려주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이 상황에 진저리를 치던 강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와인 빛이 감도는 정장과 한껏 치장한 머리칼, 그리고 치렁치렁한 장식품을 잔뜩 치장한, 누가 봐도 나 고귀한 몸이요~라고 보이는 듯한 남성이었다.
아, 자기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세크린 공작가의 차남, 마르크 세크린이라 합니다.
아...네...
한에서 오신 레이디의 기품 넘치는 모습에 한눈에 반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레...레이디...? 우욱...!’
아..하하...! 괜찮아요...! 저 춤도 출 줄 모르고.....방해만 될 것 같아서....
얼굴에 버터를 처바른 듯한 남성의 오글거리는 말투와 가까이 들이대는 얼굴이 부담스러웠던 강하는, 죽빵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고, 그녀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상냥하게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누구나 처음이라는 것이 있는 법. 저야말로 레이디의 첫 춤 상대라는 것이 너무나도 기쁘군요!
‘이 씨이발....’
허나, 강준이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욱더, 부담스러운 얼굴을 들이대며 강하에게 같이 춤을 춰 달라고 요구했다.
그....죄송합니다! 그럼..!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던 강하는 대충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후다닥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젠장....기분 초쳤네 시발.”
그렇게 자리를 빠져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아가씨, 그렇다면 저와 함께 이 노래와 맞추어 손을 맞잡아보는 것은....
흐익?! 죄송함다!
당신의 아름다운 갈색 머리칼에 한눈에 반했....
안녕히 계세요!
아름다운 레이디여, 나. 명실상부한 최상위 공작의 첫째, 마드리 라이칸의 파트너가 되는 것을 허락...
아 꺼져! 쫌!
꺼...꺼져라니...!
강하는 계속해서 날파리처럼 달라붙는 남정네들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발....내가 무슨 드라마 여주인공도 아니고, 뭐야 이게?’
잠시 구석진 곳에서 숨을 돌리며 강하가 인생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실례, 안녕하신가?
괜찮습니...아 넵!
또다시 그녀에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리자 가볍게 거절하고 떠나려던 찰나, 그자의 얼굴을 본 강하는 허리를 세우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자는 만찬회에서 테이블에 앉아있던 귀족.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난 에몬 베르크라고 하네, 일단은 남작이지.
그래, 애로크 인지 베로크 인지 하는 이름이었지.
아...예...저는 강하라고 합니다. 그런데....어떤 용무가 있으신지,,,?
아! 별 거 아닐세. 그저 만찬회에서 맛보았던 자네가 만든 음식이 너무나도 뛰어나서, 인사라도 하고 싶었네.
남작이라면 공작 바로 아래 정도 되는 높은 계층 일 텐데, 그런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자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 싶었지만, 딱히 별일은 없는 모양이었다.
하하! 맛있게 즐겨주셨다면 저에게는 크나큰 영광일 뿐입니다.
그래, 혹여 내가 자네의 시간을 방해는 하지 않았을까 싶군, 그럼.
아....안녕히...
가볍게 인사를 건넨 에몬은 금새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저 계집이 그 강하라는 계집이군....그래도 인사 정도는 해봤으니 됬어.
이윽고, 에몬은 천천히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걸어가, 자신의 양복 속 주머니를 손으로 뒤적거리더니, 어떠한 물건을 꺼냈다.
나다. 지금 바로 시작하도록.
...예.
그 물건은 남작 정도가 되는 부를 가진 에몬에게도 상당히 큰 지출을 요구하는 통신 마도구였지만, 목숨값에 비하면 이 정도는 껌값이었다.
자....이제 시작이다....!
누군가에게 전하던 통신을 마친 에몬은, 수상쩍은 미소를 씩 지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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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시끌시끌한 무도회장에 맞추어, 분주한 분위기의 왕궁 주방.
차례차례 나가는 음식들을 준비하며, 그들은 부리나케 손을 움직였다.
후....이제 나갈 음식은 다 나갔고....이 샴페인뿐인가?
어....에고 어깨야....엄청 힘드네...
그래도 이번 일은 강하 셰프님이 오시는 기념으로 열리는 파티잖아? 힘을 내야지.
네 말이 맞다....그래도 일단 샴페인이 나갈 시간까진 좀 멀었으니, 좀 쉬자.
좋지.
어느새 나갈 음식들은 무도회장으로 다 나갔고, 앞으로 나갈 것이라고는 샴폐인 뿐.
그렇기에 주방인들은 한껏 긴장되었던 어깨를 풀고, 잠시 휴식을 위해 주방을 비웠다.
그렇게 아무도 남지 말아야 할 주방.
.....지금인가.
그 순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몰래 주방으로 들어온 자가 있었다.
분명....남작님이 말씀하신 샴폐인이....여기있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감자 상자에서 몸을 빼낸 그 남자는 자신의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더니, 무도회장으로 나가는 샴폐인 잔들 속으로 병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조심히 부어, 섞어내었다.
누가 누구의 몫인지는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주인의 명은 그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 독이 든 샴페인을 마시게 하라는 것, 그뿐이었으니까.
내용물은 아주 부드럽게, 어떠한 티를 내지 않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샴페인에 녹아들어 갔다.
일은 마쳤고....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자신의 일을 마친 남성은 샴페인 잔에서 떨어지며, 탈출구를 찾아 떠나려던 그 순간.
야.
멈칫.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뒤덮었다.
나아가려던 발이 우뚝 멈추더니,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뭐지! 설마 들킨 건가? 허나....지금 이 시간엔 분명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텐데....?’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났던 장소로 시야를 돌렸다.
너 뭐냐? 이 시발새끼야?
그곳엔, 순백의 프릴이 달린 아름다운 드레스와 밝게 빛나는 갈색 머리칼을 신경질 나게 흩트려 놓고, 그것보다 더 화가 난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여성. 강하가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