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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화 〉 '그 분' (117/289)

〈 117화 〉 '그 분'

* * *

세계수의 꼭대기 층은, 무언가 엄숙한 공기가 맴돌았다.

상당히 거대한 공간이지만, 가구나 물건 자체는 매우 적어, 소박한 느낌이 들었다.

{족장님, 손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일행들을 안내하던 리브는, 앞으로 쭉 걸어가더니, 이윽고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엘프어로 말했다.

리브의 앞에는, 별다른 장식 없이, 바닥에서 자라난 나무줄기가 얽힌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엘프 여성이 보였다.

그는 외관상으로는 힐다나 리브처럼 젊어 보였고, 복장 또한 크고 화려한 옷이 아닌, 장식이나 무늬도 없는 백색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 기다리고 있었다. 저들이 힐다를 데리고 온 손님들이니?}

{예.}­모두들 이쪽으로.­

­아..! 예예...!­

잠시 앞에 앉아 있는 엘프 여성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던 리브가 고개를 돌려, 강하 일행을 부르자, 그들은 헐래벌떡 달려가 리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앞에 섰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엘프들의 마을 이샤렌의 족장을 맡은 이르마, 이르마라고 합니다.­

­아..네...반갑습니다. 강하 라고 합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엘프 여성은 자신을 이 마을의 족장이라고 소개하며 인사했다.

­여러분들이 힐다를 데리고 오신 것을 매우 감사히 여기고 있습니다. 이것 참....이 정도면 손님이 아닌, 귀인 대접을 해도 모자랄 텐데, 준비가 부족한 점, 죄송합니다.­

­아...아닙니다! 저희야말로, 뜬금없이 찾아온걸요? 저희야말로 죄송하죠...­

그리고 그녀가, 힐다를 이 마을에 데려다준 것을 매우 고마워하며 고래를 숙이자, 강하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이르마는 엘프 마을의 족장이라는 지위를 어깨에 올려 두었으면서도, 위엄이라는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포근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밤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만찬을 열어야겠군요, 여기까지 오시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리브, 그들을 손님 대접용 방으로 안내해주겠니?­

­예, 족장님.­

­저녁때까지 그곳에서 푹 쉬시지요, 저희가 나중에 인원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그럼 감사히...­

­잠깐, 분명 이 내가 여기서 가장 지위가 높은데, 왜 저 아이가 대표로 인사하는...읍읍..!!!­

­아 아님다, 그냥 무시해 주세요.­

(왕녀님...눈치 좀 챙겨...)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쯤, 갑자기 튀어나온 아델리아가 왜 자신이 아닌 강하가 엘프 마을의 족장과 이야기하냐고 불만을 표출하자, 그 옆에 있던 진혁이 물 흐르듯 그녀를 저지하고 뒤로 물러났다.

­아..하하! 그...그럼 저희는 이만...­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리브를 따라가려던 강하.

그때.

“이봐, 잠깐만...이쪽으로.”

“응? 왜? 무슨 할 말이라도?”

몸을 돌려 걸어가려던 강하를, 류월이 부르자, 강하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잠시 빌리마.”

“어...어엇?”

류월은 강하가 몸을 숙이는 찰나, 강하의 가슴팍에 달려있던 펜던트를 휙 하고 낚아채 버렸다.

“이걸...이렇게...­아..아아....됐군.­

“야! 갑자기 무슨 짓이야?”

펜던트를 낚아챈 류월이 기를 흘려 넣더니, 애슐란어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할 말이 있어서 말이다.­

갑작스러운 류월의 돌발 행동에 놀란 강하가 다그쳤지만, 류월은 몸을 획 돌려, 엘프 마을의 족장, 이르마에게 다가갔다.

­무슨...일이신지?­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잘 대답해라, 꼬맹이.­

“야..! 야이 미친...! 너 그게 족장님께 무슨 말버릇이야 임마!”

자신에게 걸어오는 류월을 바라보던 이르마는 무슨 일인가 싶어 류월에게 물었지만, 류월은 아주 무엄한 말투로 이르마에게 말했다.

­이 숲을 둘러싸고 있는 도술....아니 너희들 말로는 마법인가? 그래...그 마법을 펼친 자가 누구냐.­

­......무슨 뜻인지?­

­잡아떼지 말거라,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그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필히 누군가 대신 펼쳐주었겠지, 그게 누구냐고 묻고 있는 거다.­

“적당히 좀.....해...! 뭔 소리를 하는거야...?!­죄..죄송합니다아....이 녀석이 워낙 버릇이 없어서...하하...!­”

­에...에잇, 놓아라! 난 이 질문의 대답을 확실히 들어야 겠으니....!­

더 이상 버릇없이 구는 류월을 봐줄 수 없었던 강하가 류월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으나, 류월은 계속 버티며 대답을 들어야 겠다며 소리쳤다.

­꼬맹이...라....후훗...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군요...­

허나, 분명 분개하리라 생각한 강하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르마는 그저 쿡쿡 웃을 뿐이었다.

­역시 저 따위는, 드래곤님이 보시기에는 꼬맹이나 다름없기는 하죠.­

­그건 그렇긴 한데....응?....그걸 어떻게...?­

아니, 이 여자는 왜 류월이 용이라는 걸 또 알고 있는 거지..?

향종도 그렇고, 애슐란의 국왕에 이어, 이젠 엘프들의 족장마저 류월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세상천지 모두가 류월이 용이란걸 알겠다 싶은 강하였다.

­확실히, 저희만의 힘으로는 이 거대한 마을을 숨길만 한 위장막을 만들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임은, 부정할 수 없죠.­

­그래, 그러니 누가 만들었는지 어서 말해라.­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제가 안내하도록 하죠, 그 위장막을 만드신 분이 계신 곳으로.­

류월의 질문에 이르마는 몸을 일으켜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드..드래곤이라니...‘그 분’과 똑같,,..조..족장님...! 아무리 그래도 ‘그 분’께 손님을 데려가도 되는 겁니까..?}

{걱정 마시길 리브, 일단 먼저 내려가 있으시겠어요?}

{.....네 족장님...}

류월이 용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리브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류월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려 이르마에게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르마는 상냥하지만, 칼같이 거절하고는, 그녀에게 먼저 내려갈 것을 요구했다.

꿇고 있던 무릎을 핀 리브는, 터덜터덜 우리가 타고 올라왔던 구멍으로 걸어가더니, 슉 하고 내려갔다.

­그럼, 이쪽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이르마는,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의자를 감싸던 나무줄기들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내 완전히 의자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의자가 분해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의자가 사라지고, 남은 공간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분께 가는 가장 빠른 길이랍니다. 그럼.­

그리고 이르마가 손가락을 딱 하고 소리를 내자, 분명 사방이 막힌 공간 일 텐데,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불어오던 바람은 하나의 형체로 뭉쳐지더니, 이윽고 인간 여성 정도의 크기로 변했다.

[뭐야? 나를 부르다니? 무슨 일이야?]

그리고, 마치 바람처럼 하늘거리는 머리칼과 옷차림을 입은 여성이 툭 튀어나왔다.

­상급 정령인, 린디입니다. 저와 계약한 정령이죠.­

[음? 뭐야? 이르마? 쟤들은 누구야? 인간에다가....드래곤? 심지어 두 마리?!?......잠깐....뭔가 이상한데?]

­....어....안녕...하세...요?­

린디라고 불리는 정령은, 리브가 부른 실프와는, 차원이 다른 고농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말도 하지 못하던 실프와는 다르게, 말까지 할 수 있었다.

린디는 자신을 불러낸 이르마를 바라보다가, 우리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와 류월을 바라보더니, 이내 눈가를 찌푸리며 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명 인간인데....드래곤의 마력도 섞여 있잖아....? 인간? 드래곤? 인간? 드래곤?....아 복잡해! 아 몰라 몰라! 그래서, 나를 부른 이유는 뭐야?]

멋쩍게 인사하는 강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린디는 머리가 복잡한지 마구 머리를 헝클더니, 이르마에게 다가와 자신을 부른 이유를 물었다.

­린디, 저희를 ‘그 분’이 계신 곳으로 보내 주시겠어요?­

[엉? 그분이면.....나 저번에 그분한테 장난쳤다가 혼났단 말이야!! 무서운데....]

­부탁드려요 릴리, 손님께서 그 분을 뵙고 싶어하셔서...­

[흐음....그으래애....알았어, 대신! 나는 안 갈거야!]

이르마에게 ‘그 분’이 계신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껄끄러워하던 린디였지만, 이르마의 부탁에 결국 승낙했다.

[그럼, 출발 준비는 끝났지? 바로 간다?]

“와..와와....! 이건 또 뭐야?”

“아! 나 이거 스폰지밥에서 봤어!”

“뭔가 불안한데...?”

한숨을 푹 쉬던 린디가 손뼉을 두드리자, 마치 비눗방울 같은 물체가 강하 일행을 감싸기 시작했다.

[자! 목적지는 그분의 방! 안전을 위해 손잡이를 꼬옥 잡아 주세요~ 물론 손잡이 따위는 없어! 그럼 안녕!]

“자..잠까...!”

우리를 감싼 투명한 비눗방울이 움직이며, 이르마가 만든 구멍으로 가까이 다가가더니, 이윽고 우리를 포함한 체, 구멍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아가가가가가가!!!”

­이...이거 안..안전....안전한 게 맞....맞아아아!?!?!­

­꺄아아아악!!!­

아주 천천히 올라가던 실피의 방식과는 다른, 말 그대로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이 그들에게 휘몰아쳤다.

­네, 괜찮답니다. 린네의 정령술은 허술하지 않거든요.­

“저..전혀 아닌데에엑!!!”

갑작스레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와중에도, 이르마는 이미 익숙한 듯 아주 평온한 얼굴로 소리치는 그들에게 말했다.

아니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저리 다소곳하게 서 있을 수가 있지?

­저...저기!!!바닥! 바닥!!!­

한참을 떨어지다가, 슬쩍 아래를 바라보던 파렌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저 멀리서, 아주 빠른 속도로 바닥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이 추락이 끝나는 것 같았다.

우리 목숨도 끝날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게 바닥이 50미터, 30미터, 10미터, 5미터, 이윽고 바닥이 눈앞까지 다가왔다.

­히야아아악!!!!­

“꺄아아아아아!!!!”

“혀..혀엉!!!!”

그렇게 서로를 얼싸안고 고성방가를 하던 우리는 드디어 바닥에 부딪히게 되는데.

푹신.

“아아아.....엥?”

­......무사...한거 맞지...?­

­그...그런 것 같아요...­

“....야! 이제 떨어져! 어휴! 덩치는 산만한 게 뭐가 이리 겁이 많아?”

“........”

“뭐! 뭘 꼬라봐!! 크흠...!”

린네와 이르마의 말대로, 전혀 위험하지 않고 푹신하게 쿠션쳐럼 눌리던 방울이, 일행들을 안전하게 바닥에 내려놓고는 파악! 하고 터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그 분’이 계신다는 최하층까지 도착한 강하 일행 이었다.

그곳은 최하층이라는 점과 다르게, 천장에는 은은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고, 바닥에는 새하얀 꽃들 천지였다.

마치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 같은 풍경에 그들은 잠시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도착 했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그걸 만든 녀석은 어디느냐?­

여태까지 우리들이 난리를 쳐도, 그저 찌푸린 얼굴만 고수하던 류월은, 도착하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 분’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잠이 깨버렸네...]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으윽..!­

­뭐...뭐지...? 이 감각....온 몸이 떨리잖아...­

단 한마디.

그저 단 한마디가 울려 퍼졌을 뿐인데, 모두 그대로 몸이 굳은 체, 덜덜 떨고 있었다.

“혀..형! 이..이건...”

“그래...그때랑 똑같아...”

그때.

강하와 혁수가 처음으로 류월을 만났을 때와 같은 위압감.

그때보다 덜 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절대로, 저 존재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주...주인....! 나...자꾸 몸이 떨려....!)

­네...네가 떨릴 정도라면....상대는 보나마나 그것이겠지...­

진혁의 허리에 있던 드라고노바가 자신의 떨리는 검신을 말해주자, 진혁도 본능적으로 ‘그 분’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손님이, 수호자님을 뵙고 싶다 하여, 이렇게 데리고 왔습니다.­

[나를? 흐음....그래. 알겠어. 금방 나갈게.]

이르마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말하자, 형태가 없던 목소리가 대답하더니, 이내 분명 꽃만이 가득하던 꽃밭이 일그러지더니, 무언가의 형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와...와와....­

­내...내 생에 이런 존재를 두 마리나 만나게 될 줄은...­

­와...왕녀님은 머릿속이 참 편하셔서 좋겠습니다...참...­

거대한 날개, 두텁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 어떤 무구도 상처 입히지 못할 것만 같은 새하얀 비늘.

­아....역시...맞았어....네 놈이었구나....백룡...!]

그리고, 거대한 뿔과 길게 찢어진 동공.

그것은, 동양의 용인 류월과는 다른, 분명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새하얀 드래곤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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