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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6화 〉 두 나라의 주인들과, 부대찌개. (146/289)

〈 146화 〉 두 나라의 주인들과, 부대찌개.

* * *

새하얀 인광이 바닥에 그어진 마법진을 따라, 아주 거세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을까.

마치 백전등 같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이내 그 안에서 누군가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오.....이것이 텔레포트인가....정말이지 대단하군...­

그가 바로 누구인가.

애슐란 왕국의 주인이자, 국왕인 애슐란 디 바이제르 였다.

백설이 애슐란 왕궁과 스타 주막을 이어놓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만들어둔 것은 이미 몇 개월이 지났지만, 바이제르는 오늘에 와서야 처음으로 스타 주막으로 올 수 있었다.

한과 체결해야 하는 일도 많았고, 갑자기 감옥에서 죽어버린 아몬 베르크 전 남작의 일도 있고 해서, 상당히 바빴던 일이 오늘에 와서야 겨우 마무리가 된 것이다.

서류 문서에 도장을 찍으면서도, 대신들과 회의할 때도, 그의 머릿속에는 스타 주막밖에 들어있지 않았으나, 오늘, 드디어 그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흠....그나저나 아무도 없군....분명 이 곳은 2층....1층이 홀이라고 했나?....아차! 그러고 보니 시차가 있다는 것을 깜빡했군...! 늦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바이제르는 애슐란은 아직 해가 저물지 않은 시간대이지만, 시차가 있는 한은 이미 밝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혹시나 오늘 장사가 끝났나 싶었던 바이제르는 자신이 있었던 방문을 벌컥 열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뚜벅뚜벅 걸어 내려갔다.

“그럼 그걸로 만들어 드릴.....응? 아델리아 왕녀님인가...어어?”­바이제르 폐하 아니십니까? 이거 참 오랜만에 뵙는군요.­

­음, 혹시 오늘 장사는 끝인가?­

­아아, 괜찮습니다, 오늘 마지막 손님은 폐하로군요.­

­휴....정말 다행이군. 드디어 시간이 나서, 이곳을 들렀건만, 자네의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실망이 아주 컸을걸세. 하하!­

­과찬이십니다.­

다행히도 바이제르가 1층으로 내려가자, 아직 밝은 홀에서는 강하가 어떤 손님의 앞에서 주문받고 있었다.

­그럼, 주문 도와드릴까요?­

­흠...그렇군, 어떤 음식을 먹으면 좋으려나....­

그러나 정작, 어떤 음식을 먹을지 정해두지 않았던 바이제르 였기에, 그는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메뉴판을 가져다 드릴...­

그런 바이제르를 위해 메뉴판을 가져다 주려던 강하였다.

그때.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같이 드시지 않겠습니까?­

­음?....잠시만....당신은...?­

금방까지 강하에게 주문을 하던 한 사내가 바이제르가 들을 수 있도록 유창한 애슐란 어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얼굴을 맞닿은 적은, 처음인 것 같군요.­

­하하....이것 참....처음 뵙습니다, 한의 주인이여.­

그의 정체는 바로, 바이제르와 마찬가지로, 한 이라는 나라의 주인인 왕제, 향종 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2주 만의 스타 주막을 방문한 참이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인 상황.

­에? 그나저나 왕제 저하, 애슐란 어도 할 줄 아셨습니까?­

­민위어와 상당히 다른 언어이기는 하지만, 꽤 즐겁게 배웠다네.­

­허허, 애슐란 어가 매우 능숙하시군요.­

­송구스럽습니다. 하하.­

‘....정말 틈이 없는 양반이구만...’

정말 그는 못 하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면, 같이 합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제안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하께서 부탁한 요리를 만들러 이만.­

그런 향종의 제안을 수락한 바이제르는 그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허어....잘 지냈다고 하기에는 뭐 하지만, 어찌어찌 버티고 있습니다.­

­이런, 무언가 틀어진 모양이지요?­

­다행히, 저번에 우리나라를 방문해준 강하 일행 덕에, 큰일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더더욱 좋은 일이 생겼죠.­

­그 이야기라면 저도 들었습니다, 한 귀족이 난동을 부렸다고 하지요?­

­예, 다행스럽게도, 흑룡이신 류월 공 께서 수습을 해주시긴 하셨지만, 상당히 놀란 사람들도 몇몇 존재합니다.­

­하하, 그 마음 잘 압니다.­

­귀공께서는 무탈하신지요?­

­저야 애슐란과 맺은 연 덕분에 하루하루가 바쁘지요, 곧 있으면 [화련]에서 대신들이 우리 한을 방문하게 될 터이니, 더더욱 바빠지고 있군요.­

­화련...이라면, 바로 한의 옆 나라인 대국, 아닙니까.­

화련.

한의 영토 10배를 가볍게 넘기는 대륙의 나라.

수세기 전, 그 대지는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며 새로운 황제를 탐닉했으나, 화련이라는 자가 그 모든 대륙을 통일하고, 자신의 이름을 본따 세운 나라.

본디 바로 옆에 있었던 한은 그런 대국과 연을 맺어,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거듭나 있었다.

솔직히, 수평관계라고 하기에는 한의 국력이 아직 아주 낮지만, 다행히도 화련은 침략 대신 화평을 원했기에, 이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실례하....윽, 또 네놈인가....뭐야.”­이웃나라 코쟁이도 왔구만.­

­하하, 반갑습니다 수호룡이시어.­

­오랜만에 뵙습니다. 류월 공.­

그러던 와중, 향종이 주문한 요리를 들고 오던 류월은 향종을 얼굴을 보자 얼굴을 찌그러트렸다.

­참....두 나라의 주인 나리들이 팔자가 편하구먼. 이왕이면 그 뺀질거리는 면상을 들이밀지 말거라.­

­하하! 류월 님께서는 부끄러움이 많으신 듯 합니다.­

­이놈이 자꾸...!­

­어머. 류월,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되잖니~­

­...으익...! 놓거라!­

그런 류월에게도 싱긋 웃으며 능글거리자 살짝 울컥한 류월이 손을 들자, 어느새 다가온 백설이 그런 류월을 감싸 안았다.

­평안하신지요, 백설님.­

­오...오랜만입니다, 백설 공.­

­오랜만이에요~­

­으익...! 이 몸을 무시하지 말거라!­

­네~네~ 류월이는 나랑 같이 가자~? 그럼 맛있게 드세요~­

­으힉!­

그리고는 씩씩대는 류월을 들쳐 안고는,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저렇게 보면 참 귀여운 여자아이 같은데 말입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헌데, 류월 공 께서는 어찌 저하를 저리 싫어하시는지?­

­하하....그저, 저희 선조께서 크나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죠....­

­아아....­

­자! 이렇게 기운 없게 하지 마시고, 어서 맛있는 요리나 먹도록 하죠.­

­아아..! 그게 좋을 것 같군요. 근데...이 요리는 무엇인지?­

무언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던 바이제르가 살짝 당황하자, 향종은 분위기를 바꾸며 자신들의 눈앞에 나온 요리를 가리켰다.

­아, 이것은 바로, ‘부대찌개’ 라고 하는 것입니다.­

­푸...푸대찌개?....저번에 먹었던 김치찌개와 비슷한 발음이군요.­

부대찌개.

남북전쟁이 일어나고, 모두가 굶주리고 있을 당시.

미군들이 남긴 음식을 한 솥에 모두 던져 넣고 고추장과 물을 풀어 끓여 먹던 요리.

미군 부대에 자주 음식들이 남겨진 채 버려졌기에, 부대찌개라는 이름이 붙은 요리이다.

이 요리는 그렇게 세월이 흘러, 현대의 재료들과 잘 어울리는 요리가 되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요리가 되었지만, 그것은 현대의 이야기.

그들의 눈앞에는 커다란 냄비에 여러 가지 각종 재료, 그리고 냄비 아래에 있는 마력 화로가 눈에 띄었다.

­제가 저번에 맛을 보고는, 금세 빠져들고만 요리입니다, 충분히 만족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호오...그것 참 흥미롭군요, 그럼 바로 먹으면 되는 것인지요?­

­아직 기다리셔야 합니다, 이 밑에 있는 화로에 불을 켜고, 끓게 놔두어야 하지요.­

­이것 참....훌륭한 마도구로군요...참으로 탐이 나는....­

­이 도구는 금방까지 계셨던 류월님께서 만드신 도구입니다.­

­....큼...어떻게 만드셨는 지 여쭙고 싶군요.­

그렇게 그들은 마력 화로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의 일렁거림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뜨거운 열을 받은 냄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매콤하고, 구수한 냄새가, 점차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오....이제 먹어도 되는 것입니까?­

­아직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요.­

­.....지..­

­아닙니다.­

꿀꺽, 침이 입에서 고인다.

자꾸만 손이 냄비 쪽으로 다가가고, 버티기가 힘든.

영락없는 기다려 들은 멍멍이 꼴이었다.

­이제 다 익었으니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덜어 드리지요.­

­오..! 고맙습니다!­

드디어 부대찌개가 완성되자, 향종은 직접 국자로 부대찌개를 덜어내어 앞접시에 옮겨 담아 바이제르에게 건넸다.

‘음....냄새가 아주 좋군....이건 참을 수가 없구만...!’

­그럼, 잘 먹겠습니다....­

­부디, 맛있게 드셔주시길.­

그렇게 말하는 향종 또한 자신의 몫을 덜어, 이내 먹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던 바이제르는 숟가락을 들어, 먼저 국물을 맛보았다.

­.....오오...! 이것은 참...!­

진한 김치 양념이 잘 배어든 국물은, 여러 가지 재료들이 한데 모여 짭짤하면서도 감칠맛 넘치는 훌륭한 맛이었다.

건더기로 같이 달려온 햄과 소시지 또한, 뜨거운 국물이 잘 배여, 따뜻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최고였다.

그리고 건더기가 아주, 아주 많았다.

금방 먹은 햄과 소시지 뿐만이 아닌, 어묵, 각종 채소, 버섯, 달콤하게 조린 콩 등, 수많은 재료들이었지만, 각자의 개성을 잘 살리며 아주 맛 좋게 어울렸다.

­집중하는 중에 괜찮으시다면, 한 잔 어떻습니까?­

­한 잔 이라면...?­

­이 부대찌개는 이 청주와 함께 즐기면 더더욱 맛이 살아나지요.­

그러던 와중, 향종은 작은 항아리를 꺼내, 마찬가지로 작은 잔에 내용물을 부어내며 바이제르에게 건넸다.

­그..그럼 딱 한 잔만 받겠습니다.­

­물론, 여기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낸 술잔.

‘호오...한의 술은 아주 투명하구나...마치 맑은 호수를 바라보는 것 같군....그리고 이 내음은....상쾌한 자연의 냄새가 난다...­

마음속으로 청주에 대한 감탄사를 자아내던 바이제르는 그대로 술잔을 들어 쭈욱 마셔냈다.

­....크으...! 이거 참, 끝내주는 군요!­

시원하면서도 감칠맛 있게 목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속은 후끈해지는, 상당히 좋은 술이었다.

­이 부대찌개와 함께 즐겨주면, 최고의 안주가 따로 없답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군요!­

칼칼하고 얼큰한 부대찌개 국물과 시원하고 화끈한 청주가 완벽한 하모니를 자아내며, 딱 한 잔만 받겠다고 하던 바이제르는 어느새 자꾸만 술잔을 기울이며 부대찌개를 즐겼다.

그렇게 서로 술잔을 마주치며 마시다 보니, 어느새 술병은 내용물이 비었고, 부대찌개 또한 건더기가 확 줄어버렸다.

­후....아주 맛있는 식사였습니다, 끝나는 것이 아까울 정도군요.­

이내 국물만이 남은 부대찌개를 바라보던 바이제르는 살짝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말을 남겼다.

하지만.

­어허,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그것은?­

그런 바이제르를 바라보던 향종은 옆에서 슬며시 가져온 어떤 것을 부대찌개에 넣고는, 다시금 화로에 불을 붙여 강하게 끓여내었다.

그것의 정체는 바로.

­라면,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대찌개의 마무리는 이것이 정석이지요.­

­라면이라면....아아! 들어본 적 있습니다, 최근, 한에서 열풍이 일고 있다는 음식 아닙니까? 우리 애슐란의 상인들도 어떻게든 그 라면이라는 것을 들여오기 위해 열불을 내고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가는 냄비의 안에서, 부드럽게 익어가는 라면의 면발.

­자, 라면도 드셔 보시죠.­

­그럼 감사히...저는 아직 포크가 편한가 봅니다, 젓가락은 상당히 힘들더군요.­

다시금 향종이 라면을 덜어 그에게 건네주자, 포크로 스파게티를 먹듯 라면의 면발을 돌돌 말아 입속에 넣어주었다.

­으음...! 이것 또한...훌륭하군요!­

탱글한 면발이 가득 졸아들어 진한 맛이 남은 국물을 듬뿍 빨아드려, 후루룩 소리가 끊기질 않았다.

­그리고, 이것 또한 빠지긴 섭섭하죠.­

­오오!! 아주 좋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향종은 어느새 두 번째 술병을 꺼내 잔을 기울였다.

­자, 오늘만큼은 모든 짐에서 벗어나, 개운하게 마셔 봅시다!­

­바라던 바입니다!­

그렇게 한 나라의 주인들은, 술잔을 기울여가며, 잠시 어깨에 눌린 짐들을 내려놓고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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