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 두 엘프는 다시금 만났다.
* * *
이것을 마무리로, 체결됐군.
감사합니다, 인간의 왕.
쉴새 없이 움직이던 펜이 마무리를 지으며,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가 드디어 끝이 났다.
아닐세, 이 한 몸 고된 것으로 엘프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니, 상당히 남는 장사니까 말일세.
후훗.
바이제르는 그동안의 서류 작업으로 피로가 쌓인 손가락을 풀며, 마지막 서류를 넘겨주었다.
긴 귀를 쫑긋거리며, 나긋나긋한 미소를 짓는, 엘프들의 마을 이샤렌의 족장, 이르마가 그 서류를 넘겨받아, 마지막 줄 하나하나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 서류에 이샤렌의 미래가 달린 만큼, 아주 철저하게 검사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보기에는 꽤 서로 간의 이익이 충분한 동맹이어서, 마음이 놓였다.
그럼, 일도 끝났으니, 내일 떠날 때까지 준비된 방에서 푹 쉬도록 하게, 불편한 점은 있을까 염려되는군.
괜찮습니다, 아주 멋진 방이어서 몸도 마음도 편안했습니다.
하하, 다행이군.
그것보다도, 제가 왕도를 방문한 이유는 이 동맹 서약도 있긴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지요.
아아....알겠네, 하인을 시켜 길을 안내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부디 아샤의 은총이 영원하시기를.
음, 예슐란의 가호가 그대와 함께 하기를.
그렇게 서로 간의 인사를 끝내고, 이르마는 바이제르가 말한 하인을 따라, 성 내부를 걸었다.
여기입니다. 그럼.
고마워요.
계속해서 앞으로 쭈욱 나가던 하인이 우뚝, 어느 방 앞에서 멈추더니, 이내 스윽 하고 자리를 벗어났다.
혼자 남은 이르마가 방문을 열자, 그 방의 바닥엔 고농도의 마력이 담긴 마법진이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이르마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조금 기쁜 듯이 사뿐사뿐 걸어, 마법진에 올랐다.
그러자 이내 마법진이 새하얀 인광을 내뿜으며,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잘 지내고 있을까...? 엘드라.’
내 오랜 친우.
잠시 후, 인광이 사라진 마법진 위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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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 시각.
스타 주막의 한 구석진 자리.
누가 봐도 상당히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질 만큼 불안하게 길다란 귀를 쫑긋거리는 엘프가 있었으니.
“언니, 긴장돼?”
“.....솔직히 말하면 그래...”
힐라의 언니이자, 하백 영감의 아래에서 그를 지키는 무사, 엘드라 였다.
힐라가 애슐란에 다녀온 뒤, 엘프의 마을이 있었다는 사실하고, 애슐란과 스타 주막을 이어주는 텔레포트진 마저 있다는 이야기를 자매들에게 해주자, 온 바탕 난리가 났다.
그 소식을 들은 엘프들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그들은 하백 가에 은혜를 입은 몸,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달려 나갈 욕구를 꾹 참고, 힐라를 통해 오랜 친우이자 현재 엘프 마을의 족장인 이르마를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 바로 오늘.
이미 건장한 청년의 나이가 된 하백이었지만, 수천 년을 살아가는 엘프들의 눈에는 아직 불안 불안한 도련님이었기에, 나머지 자매에게 호위를 맡기고 나온 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엘프들이 오랫동안 살아온 존재라고는 하지만 다른 엘프들과 헤어진 지 이미 5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당장 만나고 나서 건넬 인사를 고민하는 데 여념이 없는 엘드라 였다.
그때.
“어?” {족장님! 오셨어요?}
“으왓!”
또각거리는 걸음 소리를 눈치 챈 힐라가 뒤돌아, 오랜만에 방문하는 손님, 이르마에게 인사를 건넸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오랜 친우의 모습에 순간적으로 당황하던 엘드라는 결국 고개를 푹 숙여서 붉어진 얼굴을 감추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힐라, 반갑구나.....잘 지냈어? 엘드라.}
{어...으...오...오랜만이지...?}
{후훗, 여전히 무른 내면과 비교되는 딱딱한 얼굴이구나, 조금 풀어지면 좋을텐데...}
{....그 이야기는 정말 질리지도 않는구나.}
{어머, 그랬나?}
{그래, 너는 언제나 나를 볼 때마다 그런 소리를 하곤 했지.}
{하지만, 엘드라 넌 정말 귀여운데, 그 미모가 아깝잖니.}
{.....짓궂은 장난은 그만 둬.}
{알았어, 그러니까 화 풀어.}
상당히 긴장되던 만남이었지만, 이르마가 유연하게 말을 이어나가며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 엘드라 였다.
{헤헤....그래서 주문은 어떻게 하실래요?}
{어?....나...나는 애플파이로 부탁해.}
{난 오렌지 파운드케이크, 커피도 한 잔 부탁해.}
{네입! 언니는 마실 거 필요 없어요?}
{어? 마실 거라니....그...그럼 이르...아니 족장님과 같은 걸로.}
{알았어! 금방 내올게!}
그 사이 주문을 부탁한 힐라에게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이르마를 바라보던 엘드라는, 얼떨결에 같이 마실 음료도 주문하게 되었다.
{족장이라니, 그냥 편하게 불러도 되는데...}
{....솔직히 네가 족장이라니, 아직도 믿기지 않아...}
{....많은 일이 있었지....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어. 하지만, 다행히 좋은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은 상당히 괜찮아.}
{.....그래...}
{그나저나, 엘드라 너는 정말로 애플파이 좋아하는구나? 생각해보면, 너희 자매는 언제나 애플파이를 달고 살았지.}
{그만큼 애플파이가 맛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지만....이 곳은 정말로 맛난 음식들이 많아, 이럴 때 다른 것들도 먹어보지 않으면 손해라고?}
{....다음번엔 다른 걸 시켜볼게.}
{후훗, 잘 생각했어.}
그렇게 잡담을 이어가던 중.
“애플파이와 오렌지 파운드케이크 나왔...”어머나~이르마! 오랜만이구나
직접 만든 디저트를 가져온 백설이 이르마를 발견하곤 환하게 웃었다.
오랜만입니다, 백룡...아니 백설 님.
“아, 당신이 바로 백설님....안녕하십니까!”
“어머 어머, 그렇다면 네가바로...엘드라..니? 반갑구나! 예전부터 이르마가 너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고는 했지, 그때 이르마는 언제나 밝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지!”
“그렇습니까?”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렴~”
오랜만에 만난 이르마였지만,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 백설이었기에, 간단한 인사만 끝내고 곧바로 돌아섰다.
{....엘드라, 백설님이 뭐라고 하신 거야?}
{....안 알려줄래.}
{뭐어? 뭐라고 하신 거야 대체...!}
{푸흡..!...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먹자.}
{....그래.}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지만, 그들은 일단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음식을 가만히 둘 수는 없었다.
오렌지 파운드케이크는, 가운데 유자청이 들어가 있었고, 위는 생크림과 견과류, 그리고 오렌지 한 조각이 올라가 있었다.
‘음....한 입 먹기도 전에 진한 오렌지의 향이 정말 마음에 드네~생크림도 달콤하고, 견과류가 오독오독 씹히며 고소한 맛을 내는 것도 좋아...!
빵은 마치 입에서 녹아버리는 것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유자가 혀를 자꾸만 자극시켜!'
{역시 맛있네!}
{오랜만에 먹는 애플파이도 참 맛있네....}
역시, 그 아이의 요리는 절대로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달콤한 음식을 계속 먹다 보면, 입안이 너무 텁텁해질 때가 있다.
그때 마시는 커피 한 모금.
커피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질거린다.
적당히 씁쓸한 커피가 달콤하던 입을 개운하게 만들어 줘서, 얼마든지 더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줬다.
{음...역시 커피는 맛있네....}
{웁....이거 사약이야? 이런 걸 어떻게 먹는 거야?}
커피에 익숙해진 이르마와는 다르게, 커피를 처음 먹어보는 엘드라는 한 모금 마시자마자 기겁을 하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색깔도 거무스름한게, 딱 사약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 어린애구나? 이런 맛을 즐기지 못한다니...}
{....아니거든? 충분히 마실 수 있어.}
{후훗, 그래 그래.....아 맞아, 저기, 힐라?}
{네? 부르셨어요?}
{이 오렌지 파운드케이크, 몇십인 분 정도 싸갈 수 있을까? 다른 아이들에게도 맛보여주고 싶어서.}
{그럼요! 백설님께 말씀드리고 올게요!}
{고마워~}
이런 맛있는 음식을 혼자 먹기엔 아쉬웠던 이르마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자매들을 위해, 오렌지 파운드케이크를 다량으로 주문했다.
{아이들인가....언젠가, 반드시 만나러 가야겠어.}
{....그래, 언젠가 곧, 말이야....}
참으로 머나먼 세월.
두 갈래로 갈라졌던 인연의 끈은, 어느새 매듭지어가기 시작한다.
그 매듭이 다시는 풀리지 않게, 아주 단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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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제스트(껍질)를 넣어 반죽한 오렌지 파운드 케이크에 녹인 화이트 초콜릿을 끼얹고, 그 위에 생크림, 피스타치오, 마무리로 오렌지 한 조각!
2학기가 시작되고, 디저트 수업도 새로 생겼습니다.
베이킹은 아직 익숙치가 않아서, 살짝 빵을 태우거나 생크림이 요상하게 얹어지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먹을만 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이 만드신 파운드 케이크도 한 입 맛보았는데, 역시 교수님은 교수님....차원이 다른 극상의 맛...!
베이킹도 빨리 능숙해지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