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컵에 든 핫초코는, 손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 * *
“오랜만에 거리로 나왔네.”
시끌벅적한 사람들로 가득 찬 서라벌의 거리가, 강하를 이끌었다.
요즘, 자신의 행동 범위가 궁궐 아니면 주막뿐이었기에, 가끔은 기분전환 삼아 점심시간을 틈타, 거리로 나온 강하였다.
저마다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거리를 걷다 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어, 주모 아니오? 웬일이래.”
“가끔은, 기분 전환 삼아서 말이지.”
“앗, 주모다!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주모! 오늘 밤에도 갈 터이니, 맛있는 요리 부탁해!”
“우리 주막은 언제나 맛있는 요리만 팔거든?”
그리고, 그런 강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서라벌에서 스타 주막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 주막의 주인인 강하를 아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렇긴 해도 역시 적응 안 된다...”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알고 있다.
마치 길거리에 나온 유명한 연예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강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자신이 한 행동이 돌고 돌아 결국, 이렇게 됐지만, 역시나 부끄럽다.
그래도 여기 사람들이 궁궐 사람들처럼 막 진짜 연예인 보듯이 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강하였다.
그렇게 계속해서 거리를 돌아다니는 강하.
“어머, 주모?”
“아, 안녕하세요?”
마을 중심에 커다랗게 솟은 거대한 나무를 그늘 삼아, 삼삼오오 모인 아주머니들이 강하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여기는 무슨 일인감?”
“그냥....뭐...기분전환 삼아서, 돌아다니고 있죠.”
“그럼 바쁜 건 아닌가 보네?”
“예? 뭐...그렇죠?”
“그럼, 잠시 여 있다 가지 그래?”
“네?...어? 어어??”
________________________
“옆집 총각이 요번에 장가간다더구먼.”
“그려? 어휴....우리 집 자식 놈은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총각 딱지를 때질 못하니...”
‘.....어....어색해..! 어색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
그렇게 강하는 반강제적으로 아주머니들의 대화에 끼어들게 되었다.
어떻게든 변명을 대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아주머니들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얌전히 그녀들의 수다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모는 어때? 시집갈 때 아녀?”
“예?”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이 대화의 화두로 오르게 되자, 강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러네! 주모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아직 한창때 소녀 아닌감?”
“그제? 주모...아니 아가씨는 마음이 가는 사내는 없수?”
“아...아니 그러니까....”
“뭣하면 우리 아들내미는 어때? 나이도 비슷하고, 듬직한 게 천생연분이구먼!”
“어허! 거 아지매요! 어디서 수작이고?”
그리고 느닷없이 올라가는 언정 사이, 강하는 흔들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했다.
“아가씨가 아깝지! 어? 음식도 잘 만들어, 돈도 잘 벌어. 뭐가 아쉬워서 시집을 가겠남?”
“그래도, 아낙네 곁에는 듬직한 서방이 있어 줘야 하는 것 아니겠냐?”
“그래서, 아가씨는 어때?”
“어...음....아! 저 바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한참 동안 이어지던 대화 끝에, 다시금 자신에게 질문이 돌아오자, 강하는 대충 변명을 둘러대고는 후다닥 자리를 벗어났다.
“후.....간신히 빠져나왔네.”
아주머니들이 있던 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까지 빠르게 걸어온 강하는 그제야 한숨을 푹 쉬며 속도를 줄였다.
“무슨 명절 때 친척 아주머니들인 줄 알았네...”
미슐랭 셰프라는 누구나 선망할 직업을 가지고 있던 강하.
하지만 그는, 32살이 될 때까지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모쏠.
그렇기에 명절날만 됐다 하면 주변 친척들의 잔소리나 오지랖을 한 꾸러미는 들어야 했다.
“결혼...인가...”
슬슬 돌아갈 시간이다.
강하는 몸을 돌려 자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왔다.
__________________
“셰프님?”
“........”
“셰프님??”
“어? 어어. 뭔데? 뭔 일이야?”
향이가 불러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강하는, 향이가 바짝 가까이 붙어 다시금 부르자,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12번 손님께 드릴 뫼니에르*(프랑스식 가자미 버터구이) 준비 끝났어요.”
“그래? 금방 갈...으악!”
“꺄!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에요?!”
깜짝 놀란 강하가 서둘러 움직이다 탁자 위에 올라가 있던 접시들을 떨어뜨려, 와장창 소리가 났다.
“아이고....미안, 실수로 깼네, 내가 치울 테니까, 가까이 오지 마, 잘못하면 다치겠다.”
“괜찮아요, 셰프님은 괜찮으세요?”
“나야 뭐, 괜찮아! 미안해 금방 치울게~”
“깜짝 놀랐네, 그럼 저는 다시 돌아갈게요.”
“미안 파렌. 향이도.”
“네...”
‘정신 차리자....이게 뭔 꼴이야...’
강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자신이 깨뜨린 접시 조각들을 한곳에 모았다.
____________________
“하아....”
어느덧 장사도 끝나고, 마무리 청소를 끝낸 직원들은 저마다의 방에 들어가,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할 시간이 다가왔지만, 강하는 잠들지 못한 채, 주막의 홀 구석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집...인가.’
시집.
강준에서 강하가 된 지도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의 꼬맹이 같던 신체도, 조금씩 자라기 시작해서 지금은 중학생 수준의 몸 정도로 자라났다.
그리고 이 정도 나이대면, 한에서는 결혼 적령기였다.
“시집이라니, 난 남자라고...”
장가도 아니고 시집이라니.
그래, 현대에 있었을 때도 결혼은 개뿔 연애도 못 해봤어.
그래도 말이지, 한번 남자였던 내가 어떻게 남자랑 결혼하냐고...
아직 현대로 돌아갈 방법은 깜깜하고, 돌아간다고 쳐도, 다시금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다는 보장도 없었다.
처음엔 정말로 끔찍했던 생리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최근엔 가슴이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것도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이대로 살아가게 된다면, 나는 평생 여자로 살아야 하는 건가?
“하아....정말 어쩌면 좋을지...”
“뭘 하고 계시는가요?”
“으악! 깜짝이야!”
복잡해진 머리가 뜨거워진 강하가 탁자에 턱을 괴고 한탄을 하고 있자니,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향이? 아직 안 자고 뭐해?”
그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향이었다.
“오늘따라 잠이 안 와서요, 도령님은요?”
“......나도 마찬가지야.”
천천히 강하의 곁으로 다가온 향이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어? 아냐 아냐, 그냥.....별 것 아닌...그런 일이야...”
“그런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둘 사이에서 장시간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요, 여기 계셔요.”
“어? 어어...그...그래.”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향이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이내 주방으로 쓱 하고 들어갔다.
한 5분 쯤 지났을까, 향이는 자기 손에 컵을 들고 다시금 강하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 잔 어때요?”
“이건...?”
“핫초코에요, 저번에 도령님이 알려주셔서, 가끔 혼자 만들어 먹거든요. 후훗.”
“그래?”
따뜻한 우유에 녹인 초코를 넣은, 달콤한 핫초코가 살짝 식은 강하의 손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정말, 별일 없으신가요?”
“그...럼?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신경이 쓰이는걸요.”
“..!”
향이는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웃으면서, 강하를 바라보았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인데 말이지...”
왜일까? 강하는 그 미소를 보더니, 자신의 마음속에 감추어 두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야....”
“그렇군요.”
“나는 남자인데....세상은 전혀 알아주지 않아....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난 여자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걸? 갑자기 남자를 사랑하라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라...”
“.......”
“...하하, 나보다도 어린 애한테 이런 추태라니....꼴이 말이 아니네....”
얼떨결에 자신의 속내를 털어내던 강하였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니 자신이 살아온 나이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한테 징징대고 있는 꼴이라는 것을 눈치챈 강하는 엄습해오는 쪽팔림을 숨기기 위해 씁쓸하게 웃었다.
“......도령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응?”
“도령님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건, 남자였건, 지금 제 눈앞에 계신 도령님은 도령님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리지 말고, 천천히, 고민해봐요.”
“향아...”
“여차하면...저한테 장가오실래요? 후훗.”
“...하하, 그때는 잘 부탁해.”
‘우습네, 향이 말대로. 이게 뭐라고 끙끙대던 걸까?’
여자가 됐던, 남자가 됐던, 나는 나.
시집이든 장가든 사랑이든, 원래의 나도 잘 모르던 일이잖아?
천천히 생각하자, 시간은 많으니까.
“.....맛있네, 핫초코.”
“그쵸.”
따뜻하고, 달콤쌉싸름한 핫초코가 너무나도 맛있는 밤이었다.
* * *